8월의 마지막 주말을 지내면서 뭔가 다급해진 듯 지난 주 목요일부터 매우 열심히 몰아쳐가며 책을 읽었다. 특히 금요일에는 달리 갈 곳도 없으면서 일은 하기 싫었던 탓에 계속 책을 읽어냈다. 덕분에 잘하면 이번 달에는 스무 권을 다시 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씩 전집을 다 읽었다. 다른 판본이나 소설집에서 조금씩 접해봤지만 이렇게 몰아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그리고 그와의 교류를 통해서 나온 다른 작가들의 작품까지 다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점점 책이란 걸 한번 읽으면 좀처럼 다시 읽기는 어려운 것이 장년의 독서가 아닌가 싶을만큼 앞으로 나아갈 뿐 다시 돌아보지 못하는데, 지금부터의 삶은 돌아보기 시작하는 시간이라서 뭔가 우습다. 고딕소설이라는 분야는 예전부터 있어온 유럽의 전통이지만 현대에 와서 이를 구체적으로 적립한 공은 러브크래프트와 동료들에게 있다고 얘기해도 과장은 아닐만큼 이를 주류장르의 하나로 끌어올린 세계관은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백인우월주의와 서구주의에 기반한 지독한 황색혐오와 흑인에 대한 차별이 드러나는 무지한 세계관은 당시의 눈으로 봐도 문제가 많다. 작품의 묘사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인물설정과 묘사에서도 보이는 이런 면은 비교적 무덤덤하게 보는 나로써도 조금은 불쾌했으니 말이다. 그런 점을 조금 비껴서 보면 소설은 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인데 비록 조금은 두서가 없고 정리가 필요하지만 그가 만든 크툴루신화의 세계관은 매우 훌륭하다. 원초적이고 악, 그 자체로서의 악, 그러니까 악한 의도가 없이 순수한 악의 존재를 마주친 인간이 미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좋았고, 고대로 정신이 끌려갔었던 학자가 현대에 발굴된 미지의 유물에서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작품도 아주 괜찮았다. 소품집에 가까운 글모음은 조금 수준이 떨어지지만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권까지의 수록작품들은 꽤 좋다.


셜록 홈즈로 가장 유명한 코난 도일이지만 사실 보다 더 '문학'에 가까운 창작을 하고 싶어했고 홈즈 외에도 다른 인물과 설정으로 작품을 쓰기도 했다. 북극성호의 선장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으로써 그가 북극해로 고래잡이배를 타고 다닌 기억을 토대로 만든 단편이다. 짧은 이야기라서 책을 구성하는 건 다른 유수작가들의 단편들인데 모두 읽기에 무리가 없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은 이야기는 없지만 읽는 내내 가볍고 편한 시간을 주었다.



저자의 목적은 단 하나, 읽는 이의 "책더미를 세 배쯤 늘리는 것"이다. 나의 경우 그렇게 되면 책이 현재의 시점에서는 2만 권이 넘게 될 것이니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 흥미를 갖고 구입했으나 구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묻어두었다가 지난 금요일에 읽었고 그 결과 책더미가 세 배로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흥미를 갖고 주문한 책이 열 다섯 권이 되었으니 저자의 목적은 어쨌든 조금이나마 달성된 셈이다. 그토록 가보고 싶은 서점들의 그림과 지역, 책과 도서관을 빽빽하게 소개하니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퇴근을 앞두고 조승연의 방송을 들으면서 또다시 책을 다섯 권 정도 구했는데 좋은 책은 한국어로도 구해서 주변에 권하고 싶기 때문에 아마 어느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쇼핑벽이 도지는 스트레스 가득한 그런 날이 오면 또다시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적이 있다면 선물해도 좋을 책이다. 잘하면 그를 파산하게 만들 수도 있을테니까.


그가 초기에 쓴 글을 좋아한다. 비주류를 잘 팔았다는, 아니 그의 스타일이 세상에 잘 먹히기 시작한 어느 지점부터 유명한 방송인으로 그리고 라디오 DJ이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의 본질은 사실 글을 꽤 잘 쓰는 기자와 평론가의 어느 중간지점의 글쟁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읽은 몇 권의 책은 심지어 정규재로 인해 심하게 오염된 후 슈퍼꼰대가 되어버린 안쓰럽기 짝이 없는 나의 아버지도 무척 감탄하면서 읽었을 정도로 상당히 깊은 울림이 솔직하고 사무치게 느껴졌었다. 그러다가 방송에서의 그는 뭔가 그의 글과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과 기벽을 보여주는 걸 보면서 "얜 또 뭐야?" 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듯 방송에서의 주가를 올리던 그는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일단 완치판정을 받고 다시 라디오 DJ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책은 그 투병과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을 모은 것인데 비록 젊은 시절 그가 겪은 생활에 기초한 이야기와는 다르지만 매우 raw한 내면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깊이 공감하면서 그의 아픔과 공포와 구역질과 여타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여전히 조금은 나랑 맞지 않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그의 책은 돈을 주고 사 읽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부디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건강을 잘 챙기고 자신의 모습을 잘 유지하면서 늙어갔으면 한다. 진석사를 필두로 그간 꽤 괜찮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이상한 짓을 벌이고 거지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변하는 건지, 원래 그랬는지, 무슨 생각인지 내가 알 수는 없으나 나의 가치관이나 판단의 척도에 비춰볼 때 조국이라는 한 사람과 그의 가족에게 적용하는 잣대는 unfair하고 가치편향적이란 생각을 한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늙어갈 수는 없는 것인지. 끝으로, 우리 모두 암에 걸리지는 맙시다. (라는 생뚱맞은 말이 나와버렸다)


이토 준지는 그 서리얼함이 여전히 서늘하고 기괴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그의 세계관으로 만든 지난 번의 작품을 본 이후로 원작보다도 더 깊이 그 내용과 이미지가 각인이 되어버렸는데, 어려운 문학작품들은 특히 이토 준지가 그렇게 다시 창조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리아주는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으니 와인의 세계가 여전히 궁금한 나로써는 계속 볼 수 밖에 없다. 와인채널을 보면 확실히 값에 대한 면이 나와는 다르구나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중저가로 잡는 것이 소매가로 35-40불대의 와인이고, 좀 쓸만하다고 소개하는 것들은 대다수가 70-100불대의 와인이라서 주로는 20불대의 와인이면 만족하는 나는 마리아주 같은 만화에서 나오는 와인은 근처라도 가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만. 요즘 맥주나 위스키, 소주 보다는 막걸리나 와인처럼 고운 술을 선호하고 있어서 그래도 계속 들여다 볼 생각이다.  


특별히 남은 건 별로 없는 책. 그저 셜로키언으로의 여정에서 한번 정도 만나게 되는, '셜록 홈즈'를 파는 다른 책이라고 생각한다. 흥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의 범죄사건과 포렌식을 토대로 과학적인 분석으로 셜록 홈즈의 에피소드를 접근하지만 more like 이를 이용해서 한창 포렌식과 법의학, 과학수사 같은 것들이 사회적인 테제가 되었던 몇 년 전의 유행에 편승한 듯한 느낌도 받는다. 요컨데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지만. 이다혜 기자의 책에서 reference되지 않았더라면 굳이 찾아서 읽었을까 싶다


'부자 교육'이란 제목은 원제보다도 별로라고 생각한다만 제목과는 달리 책은 내용이 매우 실하다. 재정교육을 달리 받지 못하고 자란 나는 고등학교 12학년 2학기 때 학교에서 경제시간에 받은 교육을 잘 참고했어야 한다는 후회를 하게 만든 책.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하던 compound interest, 시간이 돈이 되는 그 이유와 공식, 그리고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라던 당부가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던 애기시절. 회사를 하면서 그제서야 이런 저런 절세의 방법으로 시작한 401k가 벌써 5년째. 지금부터 꾸준히 25년만 이 수준으로 유지하면 은퇴 후 충분한 노후자금이 된다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게 만든 책. 한국에서는 이걸 참고할 만한 제도적 받침이 되어 있지 않지만 결론적으로 적립형 펀드로 일정금액을 매달 붓고 연 성장률, 이에 상응하는 이익을 재투자한다면 지금의 20대가 60대가 되면 집 한채만 있어도, 아니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절약하게 되고, 좀더 멀리 미래를 내다보게 되는 책. 내가 본 이런 계통의 책들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론을 알려주는 군더더기 없는 책. 


이 시리지를 읽다 보니 몇 가지 공통점이 겹친다. 일단 지금까지 읽은 몇 권이 그런데 모두 석 달의 프로젝트처럼 기간을 정해놓고 외국에 살았고 어떤 지원절차가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책을 쓰기 위해 그런 자금지원을 이용한 건지 우연인지 내가 알 수는 없으나 어느 도시나 국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기에 석달은 짧은 기간이다. 주기적으로 자주 드나들었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시리즈는 왜 모아들였다 조금 후회가 된다. 도서관이 있었다면 빌려서 읽어봤을텐데. 게다가 이번 책의 저자가 보여주는 몇 가지는 정말 별로다. 마치 싸이월드시절 유럽에서 머무는 누군가가 미국과 유럽을 비교하면서 같은 토마토수프를 먹어도 미국 = 통조림, 유럽 = 경건한 홈메이트웰빙으로 표현하던 풍이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것이다. 도대체 식당에서 파는 pho가 100% 웰빙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요리의 기본을 모르는 것 같다. pho의 국물은 고기와 뼈로 나오지만 거기서 맛을 내는 추가재료는 생선액젓이고, 이는 99% 파는 걸 가져다 쓰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니까 MSG가 배제된 순수한 맛의 pho 국물이라는 건 신선설농탕이 100% 직접 우려낸 고기국물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말이 안된다는 말씀. 그런 예를 넘어서 책 곳곳에서 느껴지는 있어보임직한 젠체함. 책에서 묘사된 인간관계에서 (전적으로 주관적이지만) 유추되는 스타일까지 하나도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아이오와를 다녀온 작가의 책은 (시리즈에서) 맨 불만투성이였고 테헤란에 석 달 살다온 존자께서는 뭔가 그럴듯한 깡통같은 맨트를 계속 날렸으나 불쾌함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면 이 책은 나에겐 정말 별로였다. 모든 건 주관적인 이야기니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만. 


이로써 일단 밀린 정리를 끝냈다. 남은 5일 정도, 네 권을 읽어서 다시 20권 per month를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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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7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8-27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완독을 축하합니다!!

허지웅은 글쎄요.. 약간 재수없던데 그게 어쩌면 비주류라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막 작가로 이름을 알 릴 때 한 두 권 읽었는데 저는 좀 별로였습니다.
전 그 보단 그의 어머니가 인상이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transient-guest 2020-08-28 04:55   좋아요 1 | URL
분명히 방송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저는 원래 연예인들이 가족까지 다 TV에 나와서 연예인화하는 걸 싫어해서 별로 관심은 없습니다만, 방송에서 나오는 면을 빼곤 글이나 라디오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2020-08-27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8 0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0-08-27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지웅 저자의 책 샀는데, 괜히 샀다 싶어요. 글자가 너무 작아요. 표지는 대따 좋고...
독자들의 눈 피로를 배려해 주는 출판사가 많길 바라는 마음.ㅋ

transient-guest 2020-08-28 04:56   좋아요 0 | URL
저는 글자크기가 너무 커졌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그런 건 괜찮습니다. 사실 90년대 이후 글자크기와 간격이 커졌고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글로 책 한 권이 나오면서 책값은 비싸졌다고 보는 편이라서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