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시차가 상당해서 새벽 두 시에 눈을 뜨고 책을 보다가 다섯 시부터 다시 자고 일어나서 운동을 다녀왔다. 시차가 있는 곳을 다녀오면 느끼지만 잠보다 소화가 가장 문제가 되는데 오늘도 일주일 만의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별로 나지 않았다. 내가 큰 병을 앓은 적이 없고 그저 감기나 엘러지로 고생하는 정도지만 전체적인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 크게 아파지는 편이라서 늘 소화-순환에 신경을 쓰는데, 역시 이 부분기 가장 약한 연결고리가 아니가 싶다. 대충 잠스케줄이 안정될 무렵 함께 좋아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럴 땐 그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어쨌든, 운동을 하고 씻고 서점에 나와서 여름이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연휴를 보내면서 시차를 극복하고 있다.  


사적인 여행이면서 공적인 면이 없지 않았지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3월부터 이어진 강행군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면서 다시 문자향을 맡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휴식이었다. 맛난 것도 많이 먹었는데, 나이가 든 탓에 양을 조절해야 했고, 술도 무엇도 예전처럼 들이부을 수 없음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젠 정말 구르메는 구르메가 되는, 양이 질을 결정하는 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다.  










민음사의 오프슛, 쏜살문고. 예쁘고 아담한 문고판에 유명한 작가들의 단편, 여기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글들,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짐을 가볍게 꾸리는 여행과 함께 하기에 좋다. 지난 번에 빅 아일랜드를 갈 때도 몇 권 가져가서 읽었는데, 이번에도 이들과 함께했다. 김승옥, 고골, 호손과 뫼리케의 책을 봤다. 소소하게 재미있었고 소소하게 불쾌하기도 했는데, 김승옥을 비롯한 한국문단의 60-90년대까지의 작품들 중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남성중심이라고 봐도 정당화가 어려운 어떤 시대의 무식함이랄까, 이런 것 말이다.  위악적인 면이 없지 않던 젊은 시절, 아니 일부러 더 그런 모습을 부각시키려 하던 시절에도 싫어했던 여성에 대한 표현과 인식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소설이나 작가를 모조리 매장하는 것 또한 하나의 극단이겠지만, 어쨌든 남자인 내가 불쾌하다면 여성 일반은 얼마나 싫어할까.















언제나 늘 조금 아쉬운 것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이다. 예전에 몇 권을 읽고 더 읽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유명한 추리작가의 소설은 모조리 읽고 싶은 마음에 다시 시작했다. 두 권 모두 딱 어느 수준의 재미를 주기는 하는데, 늘 30%정도가 떨어진다.  엘러리 퀸의 소설처럼 가상의 이야기에 작가자신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건 맞는데 시대성이나 이야기의 촘촘함, 극화적인 재미 등 여러 면에 있어 한참 모자란 수준이라는 생각이다.  '월광게임 - Y의 비극 88'은 처녀작이라서 그렇다고 해도, '절규성 살인'에서 모아놓은 단편의 수준이나 재미는 유명작가치고는 무척 낮은 편이라고 본다.


폴 오스터라는 작가는 김영하 작가의 '책 읽는 팟캐스트'에서 처음 접했는데, 듣는 재미에서 상기된 읽는 재미로 하나씩 구해 보고 있다. 영문판도 여러 권을 갖고 있고, 국문판도 유명한 건 모두 갖고 있는데,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책은 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사 놓고 읽는 것이라서, 이제 겨우 세 권인가 네 권째를 읽었다.  달의 궁전 (뉴욕 3부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을 보면 조카인 화자가 외삼촌의 이야기를 하면서 도입부가 시작되는데, 이때 묘사된 외삼촌을 연상시키는 사람이 '브루클린 풍자극'의 화자가 되며, 이야기에서 함께 다뤄지는 사람이 조카가 되니, 작가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일, 주변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잘 버무려서 이런 저런 책을 낼 수 있다는 생각, 여기서 잘 하는 작가의 경우 이런 편집과 짜집기, 각색이 자연스럽고 창의적이라서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아주 새롭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래서, 전작을 하면서 친해지는 것만큼, 특정 작가의 패턴이 파악되면서 흥미가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헌책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은 이야기들이 무척 재미있어서 역시 폴 오스터, 역시 뉴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런 책을 읽을때마다 NYC나 SF처럼 (LA는 싫다) 대도시에 살고 싶다는 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꿈은 역시 하와이지만, 각다귀처럼 얽힌 속에서 일상의 낭만과 문화생활을 즐기는 대도시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다.


국가는 절대성을 가진 존재인가, 정권이나 행정부, 또는 특정한 집단은 국가와 동일성을 가지는가, 동기나 목적의 순수성이 결과를 보장하거나 책임을 회피시키는가 등등 책이 쓰이던 당시까지 한국의 정치현상과 고대부터 근세까지의 정치와 철학이론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의 답을 준다. 운동가로서, 정치가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상당한 위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특히 모든 것이 고도로 전문화된 현대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유시민처럼 출세(?)한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무척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고 보는데, 그 모든 세월과 경험, 성찰이 잘 버무려져 좋은 책으로, 사상으로 나오는 것 같다. 유일하게 법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용인된 폭력을 보유한 '국가'라는 조직은 그 목적과 동기, 수단, 그리고 결과까지 두루 일정한 수준을 갖춰야 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지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얻었다. 트럼프의 대두로 보여진 미국형 민주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폭주와 한계를 보는 요즘, 복잡한 심경인데, 과연 미국의 자정능력이 공화당과 백인들의 무지와 욕심, 좌절과 분노, 여기에 진보/자유주의의 엘리트성에 기인한 오만함을 이겨내고 대안을 찾을 수 있을지.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고 그의 책을 여럿 사들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도시 3부작은 정작 아직 읽지 못했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이나 방법과 형태는 다양한데, 종종 이렇게 한 권의 책에서 작가에 대한 관심이 발생하고 사정이 되면 이런 작가의 책을 한꺼번에 구해서 몇 권을 읽다가 방치하기도 하며, 어떤 계기로 인해 다시 그의 책을 읽곤 한다.  지금은 세 권 정도를 읽었는데 다소 답답하기도 한 것이 그의 문체라서 천천히 읽어갈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선물로 보내진 코끼리가 빈에 도달하는 것까지의 여정.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촌극은 뭔가 사람이 사는 모습을 닮았다. 누구나 자기만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코끼리는 짐에 해당하고 이를 둘러싼 이야기는 삶에서 겪은 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좀 그럴 듯하지 않을까.  기적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주로는 고생의 대상이고, 가끔은 감동이나 즐거움을 주기도 하는 이 코끼리는 막상 빈에 도착착하고는 스토리가 끝나버리는데, 우리 삶도 그렇게 뭔가 다 나른 짐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끝을 보지 않는가 하는 생각.  무척이나 빽빽한 글이 중간 중간 읽기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독특한 소재와 발상을 소설로 만들어내는 솜씨가 대단해서 손을 놓지 않게 된다.  


이들 외에, 독립서적이라서 알라딘 database에 뜨지 않는 이새보미야의 '여전히 카미노를 걷는다', 그리고 치유와 구마은사로 유명한 수녀님의 이야기 두 권을 더 읽었다.  생각하면 여러 모로 힐링과 휴식이 된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더 멋진 내년과 만남을 기약하면서 그 시간까지 낭비를 막고 자신을 단련하고 열심히 일하면 또다른 휴시과 힐링의 여행이 어느새 다가올 것임을 믿는다.  


내일부터는 전쟁이다.  일단 밀린 잡무가 너댓 건, 여기에 창의력이 필요한 일도 있고, 여전히 계속 들어오는 상담, 이를 계약으로 만들 노력과 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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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28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랜님의 이 글을 보니 평소에 자신의 몸을 잘 들여다보는 분이시구나 싶네요. 내가 이런 것에는 취약하고 이런 것에는 약하구나, 하는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사실 소화 부분은 나이 들면서 약해지는 게 큰 것 같아요. 저 역시 먹는 양이 예전과는 확 다르게 줄어들었거든요. 그렇다해도 아직 소식이라고 말할만큼은 아니지만, 예전엔 매일 매끼 과식이었던 사람이라 지금의 변화가 당황스러워요. 주변에서도 왜그렇게 ‘예전보다‘ 못먹냐고 하는데, 술 마시는 양도 확 줄더라고요. 으으.. 싫어요.

먹고 마시는 거 즐거운만큼, 책 읽는 것도 즐거운 만큼, 앞으로도 계속 먹고 마시고 읽으면서 살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건강합시다.

transient-guest 2019-05-29 08:41   좋아요 0 | URL
아픈 곳이 몇 군데 생기고 치료하고 관리하면서 그렇게 됐네요. 20대는 커녕 이젠 30대의 왕성한(?) 식욕은 없어졌습니다. 덕분에 몸관리가 수월해진 면도 있어요. 요즘 보면 칼로리나 양에서 일정한 하루치가 있고 그 이상은 잘 안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저 건강이 최고입니다.ㅎ

비연 2019-05-2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여행을 다녀오면 달라졌다고 느껴지는 게,... 시차적응이 예전만큼 쉽게 안된다는 것, 그리고 속도 예전만큼 좋지 않다는 것. 서글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여행 다녀오고 회사 나온 후 한나절만에 아니 반나절만에 정글 속에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제 지지난주가 떠오르네요. 모쪼록 여행의 기운이 오래 가시길.

transient-guest 2019-05-29 08:45   좋아요 0 | URL
저는 다행히 회복이 빠른 편인데 아마도 꾸준한 운동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출근해서 열심히 살고 있네요.ㅎ 아침엔 새벽에 깼다 자느라 좀 허둥댔지만요. 힐링의 기운이 쭉쭉 빠져가는 걸 느끼면서 하루를 보냈어요.ㅎㅎ-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