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면 비가 왔어야 한다. 이번 주 초입까지만 해도 비가 올 기미가 없이 Butte County의 대화재로 인한 스모그만 가득한 채 마치 핵겨울을 맞은 양 진한 잿빛의 돔에 갖혀 있던 것도 갑자기 옛 이야기가 된 듯, 수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금요일 오후인 지금까지 내려주고 있다. 깨끗해진 하늘의 모습과 함께 쌉쌀한 늦가을의 찬 공기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이른 아침을 맞이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인지 우중충한 사흘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좋기만 하다. 마침 오후부터 혼자의 시간을 보낼 여건이 되어 적절한 볼륨으로 빗소리와 함께 재즈를 틀고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은 된장질을 만끽하고 있으니 기분이 나쁠 수가 없다. 11월에는 요 근래 드문 좋은 영업성과도 달성했기 때문에 더더욱 당장의 마음은 가볍다.  사람의 일이란 것이 물론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늘 걱정거리를 달고는 살지만 그래도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계속 CD를 바꿔가며 판돌이를 자처하고 빗소리와 음악과 함께 책을 읽으니 딱히 부러울 것이 없다.


어쩌다 보니 읽은 책들이 제대로 정리하기에는 조금 불완전하여 페이퍼는 미룰 수 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바그라스 연대기는 2권을 다 읽어도 3-4권을 구해야 할 것이고, 아서 왕의 죽음도 2권을 마저 읽어야 한꺼번에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투리로 읽은 최근에 도착한 이태준의 수필은 따로 그것만 정리하기에는 내키지 않는데 retro modern은 잘 만나면 푹 빠져들수 있는 매력이 있는 반면에 잘 맞는 인연이 아니면 여러 모로 뜻을 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태준의 수필은 아무래도 후자였던 것 같다.  주말까지 읽으려고 가져온 '젖과 알'을 마치면 다시 '아서 왕의 죽음 2'로 돌아가 이를 마칠 생각이다.  이후 읽으려고 집에 갖다 놓은 두꺼운 책들 중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읽어도 좋을 것이고 예전에 구한 몇 권의 지중해나 비잔틴제국에 대한 책을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운동을 하는 중간에는 조금씩 스파이소설을 보는 것이 좋겠고, 12월이 되어 조금 더 추워지면 밤에 불을 밝히고 러시아의 근대소설을 보는 것에 구미가 당긴다.  


예전에는 술을 마시면서 '소오강호'나 '신조협려' 혹은 '의천도룡기'를 읽기도 했는데 이제는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뇌도, 눈도, 위장도 이제 그 시절의 나보다 두 배는 더 나이가 들어버린 탓인지, 취기가 오르면 책의 내용이 제대로 가슴에 박히지 않는다. 덕분에 좀처럼 영호충이나 양과, 장무기와 대작을 할 기회가 없다.  '웅심'도 '협기'도 먹고 사는 일에 치여 그렇게 멀어져가는 것 같아 많이 아쉽다.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했으나 반가운 비에 취해 개발새발 몇 줄 적은 것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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