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관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6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추영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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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기는 덮었으되, 첫장을 막 펼쳤을 때와 전혀 달라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열흘동안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어가면서 읽었는데... (그 고생을 생각해보니 정말 울고 싶어진다) 사실은 막 출간되었을 즈음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한 번 도전했다가 진절머리를 내며 때려치운 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책을 손에 들겠다고 결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이 괴서에 손을 대겠다고 결심했을 때의 높은 기개와는 달리 (이해가 안 되면 다시 돌아가서 읽는 헛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나...) 마지막엔 완전히 나가 떨어져 순전히 오기로 붙들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으니까 범인이 밝혀지고 나서도 참 어이없다든지, 뒷통수를 단단히 맞았다든지, 놀랍다든지 하는 감상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오직 하나... "다 읽었다!"라는 헛된 성취감만이 허무하게 마음에 떠돌 뿐.  

내 이해력이 보통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를 비롯한 현학적인 내용으로 악명높은 책들도 나름 즐거워하면서 봤고(물론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른바 '덤비는 책'-즉 난해하다고 소문난 책을 일부러 찾아 즐기는 변태기질도 좀 있기 때문에, 현학적인 문체나 내용에는 어느 정도 맷집이 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해왔다.

근데, 맷집은 무슨 맷집... 나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일생일대의 적수가 짠 하고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딱 다섯페이지를 읽었는데 그랬다. 

처음에는 번역의 문제인 줄 알았다. 아마,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그렇다! 다 읽었다면서 내용조차 파악을 못 하고 있다!)에 여기저기를 뒤져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번역자 탓을 하고 다녔을 것이다. 허나, 추리소설 고수님들의 증언과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이걸 번역해서 책으로 낸 거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분위기만큼은 꽤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용감하게 책을 내준 분들께 격려의 메세지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옛티가 심하게 나는 단어나 문투라던가 뒤죽박죽인 외래어의 표기를 조금 손을 본다면 훨씬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일본어 원본을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개정판이 나와준다고 해도 별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건 자체는 꽤 흥미롭다. 흑사관이라 불리는 성에 사는 괴상한 사람들이, 괴상한 방법으로 하나하나씩 살해당한다. 여기서 '괴상하다'가 그냥 '좀 특이하군'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흥미가 최대한으로 돋구어질 것이다. 허나, 돋구어진 대로 만족을 시키는 건... 그야말로 쓰레빠 신고 히말라야 최고봉에 오르는 일이다. 우선 가장 큰 장벽은 탐정역인 노리미즈의 말이다. 온갖 문헌과 신비주의적인 에피소드들, 그리고 괴상한 비유를 섞는 것만으로도 읽는 이의 진을 빼게 하는데, 게다가 말씀 참 길게도 하신다. 현학적인 탐정하면 제일 첫손에 꼽히는 파일로 반스 조차도, 이 노리미즈란 탐정과는 십분간의 대화도 나누지 못할 것 같다. 아마 신경질을 버럭 내면서 자리를 뜨겠지.  

게다가 다른 등장인물들도 다를 바가 없어서, 심지어는 꼽추 고용인이나 비서까지도 반스의 뺨을 두다스는 칠만한 현학적인 대사들을 줄줄줄 잘만 읊어댄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이러할진대, 묘사가 평범할 리 있겠는가. 사실 글의 묘사는 참으로 참신한데다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어 작가의 대가다운 솜씨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허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치 책 전체가 자신은 천재에 의해 쓰여졌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 같다. 좀 미친 과학자 류 같긴 해도, 오구리 무시타로는 그런 자랑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단순히 현학적인 분위기에 어쩌다 휩쓸려간 감상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긴 해도 문장의 밀도는 상당히 높고, 분위기를 유지해 나가는 솜씨가 신묘하다.

그러나 감탄은 감탄이고... 감상은 감상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내게 남은 건 한 권을 순전히 오기로 끝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놈은 내게 전혀 읽히지 않았다는 현실이었다. 언젠가는 이 놈을 다시 한 번 더 손에 쥘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벌벌 떨고 있다는 건 보너스인가?  하지만 그건, 독서라기보다 극악한 체험에 다름 아니었던 열흘간의 기억 때문이 아니다. 어쩐지 중독되어 버릴 거 같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니까, 중독이 되서 이 내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다고 이것저것 뒤지고 다니면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이 정도 내용을 이렇게나 늘어놓을 수 있는 작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솟아오른다.

일반적인 의미와는 많이 다르지만, 나름 정말 좋은 미스터리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한테 제대로 싸움을 걸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꽤 장기전을 말이다. 뭐, 독자편에서 기권할 가능성이 너무너무 높아 보이긴 해도...

(별을 안 주면 등록이 안 되서... 그냥 줬습니다. 별은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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