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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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모르지만, 미스테리 소설은 여러 하위 장르로 구분된다고 한다. 각 장르 마다에는 다른 종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과 개성이 있고, 소설의 맛을 최대한 느끼기 위해서는 그 장르에 알맞는 방법으로 독서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알맞는 방법'이란 표현이 다소 마음에 안 들긴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방법'이란 서양 테이블 매너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다. (나는 포크에서 늘 실패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하든 서양 테이블 매너는 복잡하다!)  그냥 긴장을 풀고, 각 장르의 분위기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퍼즐 미스테리라면 '어디 나를 속여봐'라는 기분으로 덤벼 드는 게 옳겠지만, 하드보일드의 경우에는 그런 각오는 살짝 치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말이다.

언젠가, 하드보일드는 '뽕'의 장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다. 상당히 거친 표현이지만, 유머스러운 걸 좋아하는 나는 이 표현을 마음에 들어한다. '뽕'이란 히로뽕의 그 뽕이 아니라 좋지 않은 말로 '가다' '간지'라고도 하는, 한 마디로 분위기 한번 제대로 잡는 장르라는 의미이다. 퍼즐 미스테리가 독자와의 두뇌게임을 유도하는, 그리하여 한 편의 소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형식이고, 그 형식만으로 소설의 미학이 거진 완성되는 부류라면 하드보일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뽕을 위해 형식의 아름다움을 잠시 제쳐두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챈들러가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가 된 이유는 이런 의미에서 독보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말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빅 슬립'은 하나의 문제가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근데 나는 뒤의 설명을 읽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퍼즐미스터리라면 상당한 감점 요인이다. 허나, 레이몬드 챈들러와 그의 탐정 필립 말로에게는 사소하다고 해도 좋을 구멍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필립 말로가 담배를 피고 칵테일을 마시고 아름다운 여자들과 정중하나 날카로운 말장난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매력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퍼즐 미스터리에서 독자와 작가(탐정)은 사건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다면, 하드보일드에서 독자는 탐정 뒤를 졸졸 쫓아 다니면서 어둡고 칙칙하고 은근한 분위기를 한껏 즐긴다. 퍼즐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나는 돌 굴러가는 소리;;; 를 듣곤 하지만, 챈들러를 읽으면서는 멀리서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를 배경으로 깐 재즈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소리나 나름의 맛이 난다. 미스테리의 어느 장르든지, 나름의 맛을 가지고 있듯이.

사실 내가 구구절절 쓸데없이 늘어놓은, 그러나 양에 비해 턱없이 부실한 사용설명서(?)는 정작 챈들러를 펴게 된다면 소용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챈들러와 그의 탐정 말로의 활약은 사용설명서고 하위 장르고 분위기고 뽕이고를 단숨에 날려버리고 자기 뒤를 천천히, 엇박자 스텝으로 따라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피지도 않은 담배 냄새가 손가락에 배여 있고 마시지도 않은 칵테일 향기에 취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탐정 반을 창조해낸(이건 책 뒤표지의 설명에서 따왔다) 필립 말로의 매력에 담뿍 빠져 있을 것이다. 손가락 끝으로 필터까지 태워 없앤 담배 꽁초를 튀기며 쓸쓸한 미소를 짓는 필립 말로...

갑자기 위에 썼던 표현 하나를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수정해야 할 건 산처럼 많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하드보일드를 '뽕'의 장르라고 했을 때 그 뽕은 히로뽕의 뽕이 아니라고 했던가? 바로 그 부분을 고치고 싶다. 하드보일드는 그런 의미에서도 '뽕'의 장르이다. 매력, 아니 마력의 장르인 것이다. '빅 슬립'은 당장이라도 어둠이 내린 보도위를 두터운 구둣발 소리를 내며 뛰어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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