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크 - 성과 과학의 의미심장한 짝짓기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파라북스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메리 로취의 글은 항상 유머스럽고, 조금 심술궃기도 하고, 적당한 깊이가 있다. 그러니까 과학에 대해 별 지식이 없으나 흥미는 있고, 뭔가 시간을 때울 필요가 있는데 소설책이나 자기개발서는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읽을만한 그런 정도의 깊이. '정식의' 과학서를 읽을 때처럼 읽고 난 후 어떤 세계관이 생기진 않지만 잡담거리로 삼을 만한 몇 가지 사실들은 알게 된다. 가령,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 보다 파트너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 따위의. 이 책은 성에 대한 이야기이니 어디가서 맥주 한 잔 하며 이야기하기 딱 좋다. 그리고 한 편, 그 잡담 뒤에 뭔가를 더 덧붙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성을 생각할 때 우리-동아시아 문화권에 사는 여성이라면 특히-의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펼쳐지는 막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 막은 깜깜하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거의 투명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막은 거울처럼 나 자신을 비추고 또 누군가의 막에는 일본 성인 영화 배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봉크는 그 막을, 조금 벗기고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게 한다.

 

이 책의 앞부분을 읽는 동안의 느낌은, 마치 시험기간처럼 사람이 많은 도서관에서 비치된 큰 사전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야한 단어'가 눈에 들어올 때와 비슷했다. 당황스럽고, 자꾸 눈길이 가고, 또한 내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낯모르는 이가 자꾸 신경쓰이는 기분 말이다. 왜냐하면, 우선은, 이 책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으로 야한 단어들을 툭툭 뱉어놓기 떄문이다. 질, 페니스, 클리토리스, 성교, 자궁, 고환 등등. 하지만 기대는 마시라. 여기서 만나는 이런 단어들은 야설에서 만나는 단어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책에서 이 단어들은 거기 있지만 마치 거기 없는 듯 하며 그러나 거기 있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어서 무엇도 예전과는 같지 않게 만드는 '무언가'이다. 전반적인 내용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매우 신경을 쓰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는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 즉 약간 불편하고 거북하나 매우 흥미로운 뭔가를 읽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구역질이나 불편감등을 동반한 경미한 위장장애를 가지고 있는 내가 종종 새벽 2,3시쯤에 아주 매운 라볶이를 해먹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이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하지만 본론의 첫장셈인 킨제이에 관한 장을 넘어가게 되면서부턴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여전히 몇몇 부분의 해부학적 명칭이라던가 (자궁목? 질안뜰? 음경해면체?) 어떤 상황 (물탱크를 페니스 끝에 매달고 응급실에 실려간 남자?) 는 도저히 그게 뭔지 쉽게 떠올리기 어려워 생각만큼 속도는 나지 않지만 그 즈음 되면 이 책은 그렇게 잡아뜯을 듯 달려들어 한구절 한구설 새기거나 행간마다 시비를 걸며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물흐르듯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게 된다. 낄낄거릴 수 있는 것은 물론, 메리 로취의 뛰어난 글 솜씨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성행동이 침팬치와 얼마나 비슷한가라던가, 암컷 원숭이의 페로몬을 가슴에 바르고 자면 파트너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 거라던가, 폴리에스테르 바지와 정력의 상관계라던가, 어디와 어디 사이의 거리가 무엇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공주라던가 그런 지식을 쓸 만한 데는 거의 없다. 다만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몰랐던 내 몸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을 하나 알게 되어 내 무지에 좀 충격을 받았다.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 웃다가 뒷통수 맞은 격이랄까? 그래서 이런 책이 그저 심심풀이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신하는가. 그럼 이 책을 읽어보라. 물론,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 읽어보는 것도, 아마 저자는 대환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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