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판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54
마고 제마크 그림, 하브 제마크 글, 장미란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 그 전까지는 거의 보지 않던 그림책을 제일 자주 보게 된다.

물론 아이들을 읽어주기 위함이지만, 새 책을 사들일때마다 제일 가슴 두근거리는 건 바로 나다.

좋은 그림책들은 크기도 제 각각이고 내용이나 그림도 각 권마다 개성이 넘쳐서

책장에 꽂아놓기는 좀 어렵지만 한 권 한 권 읽고 기억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그리고 한편, 그림책에는 가끔 어른들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깊이가 있기도 하다.

'어른다운' 좁은 소견으로 아이들이 이 내용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 '어리석은 판사'의 경우 날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풍자의 날카로움도 날카로움이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의 등 뒤를 서늘하게 하는 그런 내용이라

우연이겠지만 (이 책은 2004년에 처음 나왔다) 아주 인상적이다.

 

내용은 이렇다. 사람들이 판사에게 와서 커다란 괴물이 나타났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판사는 사람들의 호소에 이런 대답을 할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장 감옥에 쳐 넣어라!"

"머리가 이상한 게 틀림없다.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

"당장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버리거라. 감히 나를 속이려 들다니!"

"이런 거짓말쟁이! 머저리! 멍텅구리! 얼간이!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

 

근 몇년간 우리는 수 많은 '괴담'과 '유언비어'와 '불법'과 '불순분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과 '신속한 수사' '주의 당부' '정치 공세' 또한 보았다.

사람들은 경고했고, 호소했으며, 그 경고가 옳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으며 호소가 정당하기도 했고 좀 지나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다 했으며, 뭘 모른다고 했으며, 연예인을 따라한다고도 했으며, 괴담 유포자를 잡아넣고, 처벌하고, 여러 법적 장치를 새로 만들고 강화했다.

 

말은 물과 같다.

물이 흐르다보면 굽이치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고, 마르기도 하고, 녹조가 끼기도 하고, 나쁜 물이 섞여 냄새도 나고, 얼기도 하고, 쓰레기나 시체가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오염이 되기도 한다.

이런 물을 정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기본이 되는 방법은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댐을 세우고 보를 세우고 로봇 물고기를 풀고 약품을 풀고 하는 건 다 부차적인 방법이고

물은 흘러야 깨끗해진다. 흘러서 더 많은 물을 만나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순환되어야 다시 깨끗해진다.

한 마디로 돈만 자유롭게 흐르게 하는 게 아니라 말도 그렇게 자유롭게 흘러야 되는 것이다.

사회가 할 일은 물가에 뜰채를 들고 서서 간혹 흘러 내려오는 쓰레기를 건지거나

많이 오염이 되었을 때 적당한 조치를 취해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여보는 것 뿐

물을 막고 가두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은 독한 약품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런 물은 건강하지 않다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말을 막고 가두고 처벌하여서 과연 '옳은 말'만 살아남게 하는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옳은 말'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수억의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가두어지고 독한 약품을 뿌려대서 남은 말,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책에서 판사는 다섯명을 그런식으로 감옥에 가둔 후 사람들이 말했던 바로 그 괴물의 방문을 받게 된다. 판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처럼 통쾌하거나 재미있거나 놀랍거나 무섭게 괴물앞에 선 판사를 바라볼 수가 없다.

이 사회의 일부를 구성하고 어떤 부분들을 선택한 '어른'들인 우리의 방문 앞에도 그런 괴물이 서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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