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이른바 '신본격'은 추리물 중에서도 내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종류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황금시대의 추리'인데, 사실 신본격을 좋아하는 것도 신본격 그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신본격에서 황금시대의 느낌을 받을 수 있어 그런 셈이다.  

엄격한 물증의 존재를 그닥 요구하지 않는 심증과 정황증거와 (이상하리만큼 술술 잘도 내뱉는) 자백이 제 몫 이상을 하는 세계.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현실로부터 5cm정도 떨어져 존재하는 일종의 가'장'현실. 실제론 존재할 수도 없는 트릭들도 오로지 논리만 맞다면 목적을 이룰수 있는, 작가와 독자간의 치열한 두뇌 게임을 위한 무대.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황금시대추리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과학수사와 프로파일링을 위시한 현대 수사기법이 픽션과 논픽션을 가리지 않고 일반에 널리 홍보됨으로서 이젠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박제동물처럼 되어버린 장르기도 하다. 포와로의 회색 두뇌와 홈즈의 변장술, 밴스의 현란한 말빨은 DNA와 범인상분석, 현대 수사체계가 도래함과 동시에 그 빛을 잃고 '과거'라는 시간 속에 갇혀있다. 황금시대 추리물은, 그래서 이제 일종의 '동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옛날 옛적에 회색의 뇌세포를 가진 탐정님이 살았어요..'로 시작하는.  

때문에, 황금시대추리처럼 독자와 작가간의 공평한 게임과 정교한 트릭을 지향하는 현대의 이른바 '신본격'는 자칫 신기루를 쫓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신본격을 많이 읽지만, 좋아하는 신본격 작품이 드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옛날 이야기는 말을 타는 왕자님과 드레스를 입는 공주님이 나와야 재미있는 법이고, 람보르기니를 타는 왕자님과 최신 명품으로 몸을 휘감은 공주님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누추한 느낌을 주니까. 다시 말하자면 포와로와 헤이스팅스가 특급열차 일등칸을 타고 놀러가다 눈속에 갇혀버린다는 건 그럴듯한 모험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대학의 미스터리 클럽원들이 누군가의 친척이 가지고 있다는 '이상한 건축물이 있는' 무인도에 고립되어 버리는 일은 매일아침 케이블 채널들에서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를 방영하는 지금에 있어선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유치해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본격에 실망도 자주 느끼곤 한다. 또한 때로는 허무하다. 아침뉴스만 챙겨보아도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끔찍한 사건들을 하루에 몇건씩이나 접할 수 있는 것이 현실, 깊은 산 속 숨겨진 저택이나 무인도의 별장이나 어딘가에 있다는 성 같은 곳에 굳이 찾아가서 연극처럼 잘 꾸며진 연쇄살인과 맞설 필요가 있을까. 추리소설이 아무리 도피문학이라지만 그에서 아무런 현실감도 찾을 수 없다면 그건 문학이 아니라 그저 게임이나 퍼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소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을 처음 접할 때의 마음도 비슷했다. 꽤 괜찮은 신본격물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또 제법 기이하다는 덧붙임까지 접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지만 기대만큼 '이번에도 또 실망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의적인 독자의 눈 앞에 일본작가가 펼쳐놓은 것은 미국의 어느 시골 동네, 장의사, 펑크 커플이었다. 게다가 '시체가 살아나고 있다!'니. 비현실적 설정이라도 이 정도면 극까지 밀어붙인 셈이다. 무인도나 산속, 눈밭 위의 '그 이후엔 다시 찾을 수 없었던' 저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또 시작인가'라는 생각대신 '뭐지? 이 물건은...?'이란 느낌이 들었다. 우선은 조금도 쉬지 않고 퍼부어지는 유머감각이 꽤 괜찮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복수와 한이 서려있는 점잖은(?)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거대한 소동극에 가깝다. 이 소설의 유머감각을 딕슨 카에 비견하는 사람도 있는데, 유머있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꽤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시체가 살아난 이상 CSI도 할 일이 없겠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제대로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과학수사에 자주 등장하는 표어 중의 하나는 '죽은 자는 말한다'라는 것인데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죽은 자가 '말을'하니. 그리고 이 소설은 그렇기에 묘하게 현실적이 된다. 기존의 본격추리가 그곳이 무인도든 산 속이든 간에 어쨌든 현실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수준에서 모든 것이 진행되는 반면에 이 소설은 그 끈을 끊어버림으로서 역으로 나름의 타당성을 획득한다. 자연사박물관에 용가리가 전시되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잘 만든 것이라고 할 지라도 무척 튀어보일테지만, 놀이공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는가. 그래서 더 이상은 '지문은? 혈흔은? DNA는?'이라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이상 떠들면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이 소설에선 정말로 '필요가 없다'.  

심지어는 일본인이 미국 무대인 추리소설을 쓴다-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약점과 불안에도 작가는 답할 필요가 없다. 소설속의 미국이 현실의 미국과 다르면 어떤가, 일본인이 현실과는 다른 미국을 묘사하면 또 어떤가. 어차피 시체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세상인 것을.  

물론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 사학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 부분은 그리 지루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유머감각을 무장한 다른 부분은 책장이 그야말로 날아가듯 넘어간다. 그리고 다른 신본격들처럼 복잡한 설계도를 앞에 놓고 풀어나가는 느낌은 거의 받을 수 없는 것도 나름의 단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신 거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운 자잘한 소동들을 톡톡튀는 문체로 묘사한 부분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머릿속으로 문제를 푸는 대신 끊임없이 영사기를 돌려야 하는 종류의 소설인 셈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매우 영리하고 상당히 독특하며 제법 찰진 소설이다. 과학시대에 본격추리는 어떻게 현실성을 담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작가는 약간 입꼬리를 올리고 '그렇게 바둥거릴 필요가 있어?'라고 대답하는 데, 썩 괜찮은 답인 듯 싶다. 물론 유일한 정답은 아니지만. 그리고 읽는 입장에서야 새로운 답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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