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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의 비밀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6
엘러리 퀸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평점 :
[로마 모자의 비밀]은 탐정 앨러리 퀸과 작가 앨러리 퀸이 첫등장하는 소설이다. '사람들이 탐정 이름은 기억하는 데 아무도 작가 이름을 기억해 주지 않기 때문에' 탐정 이름과 작가 이름을 똑같이 만들어버린 놀라운 정신세계의 사촌형제는 이 이후에도 탐정 앨러리를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같은 소위 국명시리즈와, 잠깐의 헐리우드 시대의 작품들과, 라이츠빌시리즈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외에도 버나비 로스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탐정 드루리 레인 시리즈가 있는데 그 중 한권이 그 유명한 'y의 비극'이다.
이 독특한 사촌형제는 고전추리소설(만약 그 표현이 허용된다면) 중에서도 특히 게임의 규칙과 공정성을 강조한 타입에 속한다. 그들은 책 속에 모든 증거와 단서를, 가짜정보를 섞긴 하지만, 제시하려고 노력하며, 독자를 스토리 속에 함몰시키는 대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자세로 책을 읽는 나와같은 이들을 위하여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삽입하기까지 한다. 독자는 드러난 정보와, 드러난 정보 중에 암시된 정보들을 가지고 게임에 참여하기를 요구받는다. 그래서 앨러리 퀸의 특히 초기작들은 좋게 말하면 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건조한 인상을 준다. 범인의 심리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 살인이 일어나는 와중에 꽃피는 사랑, 변장이나 미행, 비밀 문이나 비밀 통로도 없다. 앨러리 퀸은 매력이 있다고 묘사되는 무척 유머스러운 남자긴 하지만, 이름부터 괴상한 포와로나 잘난척 대마왕 반다인이나 탐정의 대명사 셜록 홈즈에 비하면 역시 심심한 남정네에 가깝다. 심지어는 형제가 만들어 낸 다른 탐정 드루리 레인에 비해서도 심심하다. 이런 심심한 인물은 탐정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여성 캐릭터 묘사는 평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지적이고 얌전하지만 가슴속에 욕망을 품은 여성과 전형적인 1920년대 헐리우드식 팜므파탈. 앨러리가 여자에 관심이 없어 다행이지, 관심이 있었다면 크리스티처럼 읽기에 즐거운 관계들이 펼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멜로드라마적인 진행 혹은 마술적인 깜짝쇼가 없어도 앨러리 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고전 미스테리의 중요한 작품들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의 처녀작 [로마 모자의 비밀] 은 그 이유를 알려주는 듯한 작품이다. 끝임없이 제시되지만 무척 사소해보이는 증거 하나가 결국 기막힌 결말을 이끌어내는 재주는 찬탄을 이끌어낸다. 살인이 계속되지도 않고 자극이 계속되지도 않으며 긴장을 주었다 풀었다 하지도 않지만 야구에서 스트라이크 존으로 던진 패스트 볼처럼 정직한 태도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라이츠빌 시리즈에서처럼 인간과 인생에 대한 깊이있는 태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지만, 젊은 앨러리의 약간은 오만한 듯한 태도 또한 재미있다.
그러나 [로마 모자의 비밀]에서 내게 가장 재미있게 그리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앨러리가 아닌 그의 아버지인 리처드 퀸 경감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들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숨기지 않는 이 팔불출 아버지는 어떤 추리소설의 조수들 보다도 포근하며 믿음직하다. 특히 소설에서는아버지가 수사 책임자이고 앨러리는 부외자로서 활약하기 때문에, 다른 조수들처럼 탐정들의 말에 '아하, 그렇군'이라 맞장구쳐주고 멍청한 말로 단서를 제공하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그 자신도 무척 뛰어난 탐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아버지의 빈번하고 적극적인 등장은 굳이 말하자면 조수로 활약하는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경찰소설에서나 느낄 수 있는 어떤 현실감의 조각이라도 맛보게 해 준다. 그는 탐정에게 수사권한을 넘겨주고 범인에게 '탐정의 말을 들어보라!'고 윽박지르는 탐정의 배경 경찰을 넘어서 어떨 땐 거의 투톱처럼 보이는 것이다! 라이츠빌 시리즈를 먼저 접했던 나로서는, 아들 앨러리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리처드 퀸 경감이란 인물은 깜짝 선물이나 시리즈의 숨겨진 보물에 가까웠다.
별은 세개 반이다. 세개는 작품에, 그리고 반 개는 리처드 퀸 경감에. 추리소설에서 이 만큼 귀여운 노인장 만나기가 어디 쉽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