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동안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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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같은 퍼즐 미스테리 외에도 많은 작품을 썼다는 사실은 그리 새롭지도 않을 것이다. 미스테리 소설이라도 어떤 것은 전형적인 퍼즐미스테리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스파이물이거나 모험물이고, 어떤 것은 환상물, 게 중에는 심령호러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크리스티는 오래 살았고 또한 오래 활동했으며,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유난히 부침이 많았으니까. 한 때는 전통적인 엄숙주의가 지배했던 적도 있으며, 가짜 과학이 판칠만큼 사람들이 과학을 종교처럼 믿기도 했으며, 대공황이 있었고, 두번의 전쟁을 겪은 후엔 급속한 기술의 발전과 전통적 가치의 전복이 일어났다. 제국주의는 무너지고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등장했으며, 어느 곳에서는 공산주의혁명이 일어났다. 두 세력간의 냉전은 새로운 공포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런 일들이 없었다 해도, 사람의 창작 욕구가 한방향으로만 뻗어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는 '이런 것도 쓰셨나?'라고 생각되는 분위기의 작품들이 꽤 있다.

크리스티의 팬으로서, 개인적인 취향으로도, 나는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크리스티가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훌륭한 미스테리 소설가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지만, 사실 그녀는 그렇게 트릭 중심주의자도 아니었고 때로는 독자와 공정히 겨루지도 않았다. 기계처럼 정교하고 복잡하며 기발한 트릭이라면 엘러리 퀸이나 반 다인 같은 동시대의 작가들 혹은 그 후대 작가들이 더 나을 때가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에게는 지금도 '영국 여성 미스테리 작가'하면 떠오르는 특유한 분위기을 세상에 널린 알린사람이며, 가장 잘 다룬 사람이며 그렇기에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에 그것은 뛰어난 심리묘사, 드라마적 요소의 강조, 그리고 어딘지 모를 로맨틱한 분위기인 것 같다. 그리고 미스테리의 외피를 조금 벗어던진 크리스티의 작품은 역시나 심리묘사가 일품이고, 로맨틱하며 어딘지 모르게 드라마틱하다. 추리의 여왕이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또 다른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의 1권으로 나온 '빛이 있는 동안'은 국내에 출판된 적이 없을 법한(확신할 수는 없다) 단편 소설들을 묶은 것이다. 대부분이 습작들이며, 행사용 소설도 있으며, 로맨스 소설도 있다. 크리스티의 팬으로서도, 낯선 분위기의 작품들이 섞여 있어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크리스티의 대표작만을 접해본 사람이거나, 그녀의 또 다른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실망스러운 독서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트릭이나 서스펜스를 기대하고 읽을 작품들은 아니니까. 몇 편의 미스테리 작품들도 결코 크리스티 여사의 명작 단편이라 칭할 수는 없을 정도의 완성도이다.

하지만, 크리스티 여사의 팬으로 특히 그녀의 단편소설들이 익숙하거나 포와로의 커플매니저 역할을 내심 기대하게 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봄 직하다고 생각된다. 허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그저 크리스티 여사의 잘 안 알려진 작품들을 만난다, 그 정도의 의의만 가지고 있다면 제법 흥미롭게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별은 두 개 반. 나는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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