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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사냥하는 자들 ㅣ 그리폰 북스 4
바버라 햄블리 지음, 이지선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원체 귀족적이다. 단적인 예로, 뱀파이어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드라큘라도 그 직위가 '백작'아닌가. 또한 뱀파이어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아름다운 여인의 창백한 목을 깨무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무얼 암시하는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귀족적'과 '퇴폐적'이라. 두 수식어의 만남은 내게 절대왕정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 이 작품의 무대가 프랑스였다면 분명 제 손녀 뻘되는 애첩들에 둘러싸여 국고를 탕진했던 루이 15세의 궁정 귀족이 등장했으리라. 하지만, 지은이는 영국을 택했고, 앙시엥 레짐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귀족적'이고 '퇴폐적'인 시대였던 제국주의 시대가 배경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거다.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제국주의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즈음의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란 어떤 존재였던가. 그 때, 세습귀족들의 화려한 삶을 그대로 이어 받은 자본귀족들의 매일은 가스등으로 낮처럼 환히 밝혀진 밤거리처럼 찬란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빛이 밝은 곳엔 그림자도 짙은 법. 시대의 혜택으로부터 제외된 다수의 사람들의 삶은 프랑스 혁명기의 민중의 삶처럼 처참했다. 걸음마를 띄기도 전에 기계 아래서 실을 잇는 노동을 해야 했던 아이들, 지옥과도 같은 그 곳을 피해 더 지옥 같은 매춘의 길에 나선 여성들... 살인, 폭력, 방화. 알콜 중독과 온갖 질병이 난무했으며, 거리엔 악취가 가득했다. 강에는 구정물이 흘렀으며, 하늘은 매연 때문에 낮에도 어두웠다. 비단 런던 뒷골목뿐만의 일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 역시 개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고, 저들과는 상관없는 전쟁에 휘말려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귀족적인 뱀파이어 이시도르가 지적인 첩보원인 애셔를 만났던 시대는 바로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좀 더 흥미로워 질 수 있었다. 과거의 우아함을 그리워하는 귀족적인 뱀파이어 이시도르와, 그 때 닫힌 세상과의 투쟁을 막 시작했던 지식인 여성인 리디아와, 첩보원이었던 자신의 경력에 다소의 후회감과 아픔을 가지고 이는 애셔가 더럽고 어두운 런던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는 이 이야기는 좀 더 시니컬해 질 수도 있었다. 단순히 유혹과 질투의 이야기가 아닌,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뒷골목을 쏘다니며 뱀파이어가 더 인간적인 시대를 목격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꼭 그런 어두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비단 그것이 밤거리를 쏘다니는 뱀파이어와 뱀파이어 살인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얼굴에 철판 깔고 '이건 화려한 이야기에요. 잔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지요'라고 나갔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화려한 거죽만 탐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아쉬움은 남았겠지만 변죽만 잔뜩 울려놓은 지금에 비하면야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던가, 담으려면 조금만 담던가, 아니면 아예 마음먹고 담았어야 했을 것이다. 심각한 이야기들을 두서도 없이 제 좋을대로만 잔뜩 늘어놓다 대충 덮어놓고 내빼면 어쩌란 말인가. 사기도 잘 치면 예술일진대, 이렇게 허망하게 쳐 놓으면 독자는 허탈감에 몸을 떨고만 싶어지는 법이다.
소재들 간의 연결고리가 부실하다 보니 줄거리 또한 그 장대한 시작과는 달리 삐꺽거리며 점점 평범해져 간다. 이 소설의 시작은 꽤나 심각하고 우아해서 읽는 이의 입맛을 돋운다. 그러나 곧 작가의 욕심에 방향을 이탈하고 만다. 소설은 과학의 딸 리디아의 아름다운 탐구심과 다소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늘어놓다가, 대륙으로 팔짝 뛰어서 구원과 죄책감에 대해 슬쩍 건드려놓기만 하고, 질투심과 허영심에 대한 경고인가 보다 하고 읽을라치면, 헐리우드 괴수영화 식의 액션신을 집어넣고, 결국은 '미션'투의 희생으로 결말을 내어 버린다. 그리하여 도달한 클라이막스에서 밝혀지는 문제의 뱀파이어 사냥꾼의 정체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고, 그저 황당해 하던가, 아님 '이 녀석이 왜 여기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데?'라고 중얼거리며 앞장을 들춰 보아야만 하는 존재다. 반전이라고 하기엔 영 시원찮다. 게다가 밝혀지는 범행의 동기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대마저 산산히 날려버린다. 그리고 초반에 열심히 불어넣어졌던 조금의 기대도 채워주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만다.
‘밤을 사냥하는 자들’은 소문만 요란하고 때깔만 근사한 헐리우드 영화를 닮았다. 화려한 드레스에 꼼꼼한 고증에 능히 홀로도 분위기를 잡아낼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각종 효과를 다 동원하고도 줄거리와 캐릭터의 부실을 드러내며 관습적이라고 말하기조차 아까운 ‘어디서 많이 본 스토리’로 흐지부지 하게 끝맺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다른 작품들에서 쌓아놓은 이미지를 불로소득 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느낌과 분위기는 조금도 창조해내지 못하고 욕심내어 잔뜩 빌려온 이미지의 무게에 깔려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덧 ; 출판사에 대해 평하자면... 그나마, 표지는 제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