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 블랙 블랙 캣(Black Cat) 14
앤 클리브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고전 미스테리의 황금 시대는 끝났다. 정교한 트릭, 탐정과 범인간의 두뇌싸움, 범인 심리에 대한 다소 신비주의적인 느낌의(당시에는 최신의 과학적 이미지였겠지만) 통찰은 FBI와 CSI가 대표하는 '과학적 수사의 시대'가 당도하면서 거의 막을 내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현대에, 세계는 너무 복잡하며 너무 빨리 또 자주 변화하고 있으며, 세상은 너무 넓으면서도 또한 너무 좁다. 아쉽게도, 애거서 크리시티나 앨러리 퀸, 셜록 홈즈 같은 탐정들 식의 추리는 고색창연하며 비과학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고전 미스터리 작품들이 갖는 가치야 영원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뒤를 잇는 탐정들은 더 이상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탐정들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벽난로 앞에 앉아 머리를 굴리는 대신, 이리구르고 저리 구르며, 음모의 희생양이 되고, 총을 쏘거나 맞는다.   

고전 미스테리를 좋아하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무척 좋은 현대 작품들에 대해 찬탄할 때에도 약간의 아쉬움과 갈증을 느낀다. 고전 미스테리 특유의 정지되고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는 듯 하면서도 들여다보면 너무나 섬세하고 정교한 그 느낌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이븐 블랙'같은 작품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을 애타게 찾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닌 듯 싶다.

'레이븐 블랙'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던 고전 미스테리의 배경과 인물들을 현대에 가져온다. 고립된 사회, 그 속에서 살아가며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등장인물들, 평온 속에 가라앉아 있는 음모와 배신, 그리고 증거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들의 심리에 집중하는 탐정. '레이븐 블랙'은 고전 미스테리의 유산과 유독 섬세한 필치를 보여주기로 유명한 영국 여성 추리 작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인물들의 강렬한 개성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현대 영미권 스릴러물들이 놓치고 있는 이 소설만의 강점이며 매력이다.   

하지만 현대의 영국이라는 배경보다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전이 휩쓸고 지나가기 전의 영국에 이 소설을 가져다놓으면 좀 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히 나의 편협함일까. 비디오카메라와 현대적 경찰조직이 등장하지만 그런 현대적 요소들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조용하고 닫힌 소설의 배경에 조금 겉도는 듯한 느낌이다. 이 소설의 주제와 내용은 마치 눈속에 갇힌 마을처럼 고전 미스터리 시대에 갇혀 있고 그것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될 지언정 현대에 고전 미스터리를 되살려 놓기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독자에게 쉴틈을 허락하지 않는 흡인력, 섬세하고 안정적인 묘사, 잘 감춰둔 반전까지 괜찮음에는 틀림없는 소설이다. 크게 기발한 트릭은 없는 편이므로 작가와의 두뇌싸움보다는 주인공 탐정과의 보조에 중심을 맞추어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별은 세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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