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3주


 

추석을 앞둔 9월의 극장가는 늘상 그랬듯이 라인업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국가대표>와 <해운대>가 여전히 여러 관들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자>나 <이태원 살인사건>, 혹은 팀 버튼 감독의 입김이 미친 신작 <9> 등이 눈에 띄지만, 왠지 '이거다' 싶은 작품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가을에는 좋은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극장에 앉아있지 않고, 모두들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이 개봉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속설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 있다가 추석 연휴 때 개봉을 하려는 생각 때문일까. 

<해운대>와 <이태원 살인사건>는 이미 보았고, <애자>나 <국가대표>는 괜히 눈물 뽑게 될 것 같아서 좀 그렇고, 팀 버튼 식의 애니메이션은 취향이 아니고, 그렇다고 깔려 있는 할리우드산 로맨틱 코미디들이 딱히 땡기지도 않는다. 이 와중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어제(18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80년대 일본뉴웨이브 특별전'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감독들의 작품들이 소개되지만,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건 이름이 낯익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나 최양일 감독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항상 하드보일드한 남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며,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혹은 꼭 일본 사회가 아니더라도 사회의 어떤 극악한 고리들을 능수능란하게 펼쳐보였던 최양일 감독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것은 1985년작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와 1989년작 <A사인 데이즈>인데, 영화에 대한 소개를 읽어보았을 때 좀 더 관심이 가는 쪽은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다. 영화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자세한 시간표는 http://www.cinematheque.seoul.kr/ 를 참고)

오키나와의 작은 항구마을. 40대 초반의 의사 신도는 옛 친구 사카구치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멀리서 찾아온다. 작은 호텔을 경영하던 사카구치는 마을을 재개발하려는 거대 건설회사의 매수에 응하지 않고 버티다가 함정에 빠져 수감된 것. 신도는 친구를 구해내기 위해 시모야마 건설의 일당과,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토쿠다 형사와 일전을 벌인다. 처절한 사투 끝에 마침내 사카구치가 석방되지만, 이들 앞에는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기타카타 겐조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최양일의 세 번째 영화. 거대자본에 매수된 경찰에 의해 체포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최대한으로 추구한 작품이다. 통념적인 도덕률로 정의되지 않는 고독한 인물 묘사와 비극적인 세계관에서는 필름누아르적인 영향 역시 엿보인다. 이후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영화들에 일종의 모델이 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80년대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 걸작.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아카이브 필름 데이터베이스) 

- 예습이 필요해 -  

 

최양일 감독의 한일합작영화이자, 어지러운 영화 <수>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최양일 감독의 영화들에 구미가 당기지 않겠지만, 꽤 많은 호평을 받았던 <개달리다>나 <피와 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장기가 복잡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서 어떤 캐릭터를 잡아내어, 그들에게 관객들이 자신의 감정을 쉽게 투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를 바라보던 색다른 시선을 제공하는 것임에 어느정도는 동의할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때로는 매우 마초적이고, 때로는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일종의 도덕적 관념으로만 그들을 판단할 수 없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삶 또한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 일그러지고 길들여졌음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의 영화들에는 때로 엄청난 '괴물'들이 나오지만, 그 '괴물'들은 어떤 돌연변이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들임을 감독은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아마도 최양일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그 캐릭터의 '흉포성'이 아니라 그 흉포한 캐릭터를 만든 이 사회의 '흉포성'일 것이다. 

<개달리다>: 신주쿠 경찰서의 생활 안전과에 근무하는 형사 나카야마는, 한국인 정보원 히데요시(수길)와 결탁하여 신주쿠를 근거로 활동하는 야쿠자 집단 '애호 조직'에 경찰 단속 정보를 흘려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지만, 범죄의 수사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 기묘한 정신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나카야마 연인이자 히데요시가 동경하는 상해 출신의 창녀 모모. 이들 세 사람은 신주쿠의 가부키쵸에서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구도 믿지 않고 돈에만 집착하는 모모는 나카야마 몰래 히데요시와 손잡고 암달러상, 매춘, 밀입국 알선, 비밀 도박장 운영하는 사실이 '애호 조직'의 두목 곤다에게 발각되어 곤궁에 처하게 된다. 한편, 마약 단속에 나선 나카야마는 외국인 마약상에게서 빼앗은 마약을 후배 경찰 사쿠마와 자신의 팔에 주사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술집 여자 삐끼를 강간, 가게를 엉망으로 파괴한다.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포주를 향해 나카야마는 냉정하게 대답한다. "강도, 사기, 공갈, 폭행, 상해죄로 전원 체포". (네이버 펌) 

<피와 뼈>: 오사카의 김.준.평. 1923년. 한 청년이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향하는 배 위에 오른다. 청년의 이름은 김준평.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새로운 삶이 그에게 풍요와 희망, 인간다운 삶을 가져다 주리란 것을... 하지만 주변 상황은 그를 ‘괴물’로 만들어 갔다. 무엇이 이 순진했던 청년을 모두가 두려워 하는 존재로 만들었는가?

 오사카에 정착해 공장에 취직한 준평은 그 앞에 나타난 여인 김영희에게 반해 그녀와 강제로 결혼하기에 이른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강인한 체력과 타고난 근성으로 어묵 공장을 성공시키는 준평. 그러나 마치 그의 왕국을 지배하는 것처럼 끝없는 착취와 폭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냉혹하기 그지없다. 이즈음 자신을 준평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난 청년, 다케시가 준평의 집안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겁도 없이 준평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다케시는 주변을 점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는데.. (네이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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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 The Case of Itaewon Hom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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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의 무거움이 영화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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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 The Case of Itaewon Hom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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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에 대한 여러 미리니름이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가지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나는 이 영화는 뭐가 어찌되었건, 그 내용에만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의 사건이 가진 주는 아이러니함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에 '영화적'인 다른 어떤 것에 주목할 틈이 없다. 이 영화가 사건을 어떻게 가공하고, 어떻게 전달하는가라는 방법론적인 측면을 떠나서 이 사건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 또는 무거움이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른다. 따라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영화인가, 혹은 나쁜 영화인가를 따질 틈이 없이, 사건이 가지는 본질적인 측면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 내용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은 실제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즉 ,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영화 시작부 자막에서 밝히고 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의 사건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튼 이 영화는 상당수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는 힘드리라는 생각이다. <씨네 21>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은 관객들은 어떤 명확한 결론을 선호한다. 이 영화처럼, 명확한 어떤 것도 내려주지 않은채, 관객에게 그 해답을 맡기는 결론은 아마도 어떤 좋은 소리를 듣기는 꽤나 어려울 것이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정해진 도덕률에 의해 명확한 결론이 나오는 결말을 선호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이치다. 오랜 예전부터 관객들이 선호하는 것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지, 모호한 결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다루는 이 사건이 실제로도 그렇게 결말이 났다는 사실이다. 1997년, 한 남자가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칼에 여러 군데를 찔려 죽었다. 사건 장소에는 친구 관계인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범행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은 다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러 증언 및 정황증거에 따라 알렉스는 범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피어슨은 증거은닉 및 무기소지로 1년여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짧은 징역살이 후 출국금지가 잠시 정지된 틈을 타서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다 되가는 오늘에 이르렀다. 죽은 사람이 있고, 범인도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은) 명확하나, 둘 다 풀려난 사건, 그 실제 일어난 사건이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의 사건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실제의 사건에서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의 혐의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는 채집되지 않았다. 즉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알렉스가 범인일 수도, 혹은 피어슨이 범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범인일 수도 있다. 즉 알렉스와 피어슨이 같이 범행을 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지만, 이 부분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맡은 영화 속 박대식 검사(정진영)은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라는 (즉, 누가 주범이든, 종범이든 간에) 의견을 묵살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100%의 진실을 버리고 50%의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둘 다 기소한다면, 무고한 한 사람을 범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그것이 박대식 검사가 가진 생각이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인 것일까. 두 사람이 같이 범행을 했을 가능성은 어떠한 이유에서 제거되었는가. 실제의 사건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즉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이다'라는 전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일까. 성립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

처음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영화가 미국과 우리나라 간의 수사권의 문제, 그의 어떤 부당한 측면을 강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러한 부분이 아니다. 물론 영화 중간에, 미국의 수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을 박대식 검사가 토로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당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으나 그 부분은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에서 포인트를 두고 있는 부분은, 이 사건의 어떤 아이러니한,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나, 둘 중 어느 누구도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혹은 범인이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상황. 영화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알렉스 쪽에 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했을 때 여전히 몇몇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은 남는다. 과연 그 둘 중에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답답함은 내내 박대식 검사를 짓누르며, 동시에 관객들도 짓누른다. 

그것이 관객들을 짓누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는 철저히 박대식 검사(정진영)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영화 중간중간 다른 시점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예를 들어 피어슨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 혹은 알렉스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과 같은 내용들이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박대식 검사의 시점에서 들은 재구성된 이야기이다. 즉 박대식 검사가 피어슨이나 알렉스를 심문하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해서 나열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둘 중 어느 것에 진실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박대식 검사가 가지는 이 답답함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박대식 검사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코믹해보이는 장면마저도 마냥 웃을 수 없는 장면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보기는 조금 특이해 보이는 면이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지만, 전체적으로 여러 시점을 중간에 삽입하며 관객의 이해와 영화에의 몰입을 높인다. 그러나 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박대식 검사의 시선으로만 관객을 이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어떤 정황을 마치 우리가 수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가 느낀 절망과 한계를 우리에게도 같이 느끼도록 이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이 영화가 사건의 어떤 충실한 재현에만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듣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이로써 얻는 소득도 있다. 그것은 관객을 어리둥절케 하고, 분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사실 정작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부분에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범인이 피어슨인가, 혹은 알렉스인가 라는 부분이지, 그 둘 모두가 풀려나게 된 그 결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정황에 대해서는 애써 입을 다문다. 즉 이 둘 모두 거의 무죄와 다름없는 상태에서 풀려나게 된 이 법의 허점, 혹은 커다란 구멍에 관해서는 간단한 설명으로("이길 수는 없으나, 지지는 않게 해드리죠.") 지나가고 만다. 이것은 불친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을 분노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죠?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죠? 그것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불친절해 보이는 마지막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그리고 동시에 가슴 속 어딘가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러나, 찝찝한 한 마디를 더 덧붙이자면, 이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알렉스를 향해? 혹은, 피어슨은 향해? 아니면 법원을 향해? 이 영화의 가장 무거운 점은 어쩌면 이것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제시된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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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 - Show me the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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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색다른 맛. 처음에는 쓰고 때로는 시큼하나, 나중에는 달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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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 - Show me the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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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이한 영화를 보았다. 10명의 감독들이 10개의 이야기를 하는, 10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황금시대>. 그리고 그 10명의 감독들에는 꽤나 만만치 않은 이름들이 포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 이송희일 감독, <은하해방전선>으로 귀엽고 유쾌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윤성호 감독,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가난한 청춘의 감수성을 보여줬던(그러나 그 이후로 <보트>로 약간은 말아먹은) 김영남 감독,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로 꽤나 스트레이트한 묵직함을 보여준 양해훈 감독, 그리고 <여고괴담4>의 최익환 감독, <거울속으로>의 김성호 감독, <새드 무비>의 권종관 감독 등등..지난 몇 년간 큰 대박은 터뜨리지 못하였으나, 어느 정도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 감독들 10명이 각각 10여분 내외의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 <황금시대>의 가장 큰 장점은 10개의 단편들이 어느 정도 고른 결과물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매우 놀랍다 정도의 작품들은 없지만, 꽤나 인상깊은 결과물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여럿 있으며,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그렇게 또 아주 떨어진다 싶은 작품들도 없다.

이 10개의 작품의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는 '돈'이다. 그러나 흐름을 관통한다고 해서, 이야기들이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10개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의 흐름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단 이 10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장르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짧은 순간 집약되는 공포를 보여주는 김은경 감독의 <톱>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 <담뱃값>(남다정 감독), 음악을 이용해 감수성을 잘 이끌어내는 김성호 감독의 멜로 <페니러버>, 현재 사회 이슈들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라도 미친듯이 웃어제낄 수 있는 사회 패러디물 <신자유청년>(윤성호 감독), 묘한 분위기로 관객의 마음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각 10개의 이야기들은 코믹반전, 생활스릴러, 공포특급, 슬로우액션 등 비슷한 소재를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장르 속에서 각 감독들의 전작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색다르게 이 이야기들을 즐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김성호 감독의 독특한 공포 스릴러 <거울 속으로>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약간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감성 멜로 <페니러버>가 흥미로울 것이고,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고 의도적으로 어설픔을 강조하고있지만, 전작에서 보여줬던 독특한 직구를 이번작 <시트콤>에서도 살짝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이라는 소재를 내세웠다는 것은 연막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돈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소재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돈 빠지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 있던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돈을 소재로 한 10편의 단편을 보는 것은, 젊은 영화인들이 현재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임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간은 불행하게도, 이들이 보는 우리 사회는 뭔가 망가져가는 상당히 어둡고 불안한 사회다. 그 사회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자살하기 위해 유언을 작성하며(<유언>), 부부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고(<불안>), 소녀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서는 안될 일들을 저지르며(<동전 모으는 소년>), 노숙자는 지금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달린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을 보지도 않는다(<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농담을 표방하고 있는데도, 별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청년> 같은 것들. 이 이야기는 임경업(임원희)이라는 청년이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패러디로 계속 농담을 던지는 영화이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건드리고 있으며, 거의 모든 것들이 농담으로 희화화되고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중권 씨도 진중권 씨 본인에 의해 희화화된다. 그쯤 되다 보니,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묘한 물음이 생긴다. 이게 농담일까. 어쩌면, 실제로 혹시 만약 그런 일이, 즉 누군가가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 이렇게 되지 않을까. 계속 웃게 만들긴 하지만, 이 웃음은 언젠가 영화 속 어떤 사건과 꽤나 비슷한 신문기사를 보고 웃었던 웃음과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 떠오르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아..50주가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구요? 무슨 소리. 이 사회가 항상 상상하던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트콤>에서 끊임없이 깔리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 시트콤은 전혀 웃기지 않기(혹은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의 방청객의 녹음된 가짜 웃음소리만큼 기이하게 들리는 것이 있던가. 그리고 하나 더. 어떤 시트콤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중간중간 꽤나 코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떤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렇게 힘들고 고달프고 버텨나가기 어려운 일만 있을까.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버텨낼 수 있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백 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지나간 후에야, 마지막 웃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찾아온다. 김영남 감독의 <백개의 못, 사슴의 뿔>. 모질지 못한 공장노동자 미숙(조은지)과 빈틈이 많아 보이는 사장(오달수)과의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한판 대담은 유쾌한 속에서, 꽤나 명징한 해답을 남긴다. 결국 돈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돈 없다는 것. 인간이 살기 위해서 돈이 만들어졌지, 돈이 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명징하고도 당연한 대답을 하기 위해 영화는 꽤나 긴 시간을 달려온다. 달려온 긴 시간만큼 이 마지막은 꽤나 안도하게 만든다. 사슴의 뿔을 싣고 어디론가로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비추는 이 엔딩은 그래서 안도의 엔딩이다.

덧.

시사회에서 본 영화인데, 중간에 일어나는 관객이 조금 보였다. 아마 단편들의 옴니버스라는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몰랐던 관객들이 아니었나 싶다. 단편들은 시간의 제약상 아무래도, 완결된 이야기나 잘 얼개가 짜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닐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보면, 역으로 이 단편들의 재미가 그런데서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얼개를 스스로 짜맞추고, 어떤 상상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은경 감독의 <톱> 같은 작품. 톱을 사간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어쩌면 진짜 공포는 그가 꾼 악몽이 아니라, 그녀가 톱을 사가고, 그 후에 다시 찾아온 그 아침 사이에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이 아니었을지. 그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단편도 단편 나름. 잘 짜인 얼개와 짧은 이야기에서 기막힌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전 영화들에 지나치게 호의적인 평가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들의 배열을 좀 달리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있다. 작품들의 수준은 고른 편이지만,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영화도 있고, 한편으로는 조금 실험적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초반과 마지막에 조금 친절한 작품, 중간에 조금 덜 친절한 작품들을 배열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영화들을 번갈아 배치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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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금요일쯤 볼 예정인데.. 시사회에서 보셨군요.^^
덧말까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09-11 02:19   좋아요 0 | URL
네..저는 시사회에서 봤지만,
영화관에서 봐도, 그리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10개의 단편의 수준이 상당히 고르거든요.
10개의 다양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누릴 수 있지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