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은 일어나고,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세상 곳곳의 소식들을 전하는 뉴스들은 거의 '폭력의 메신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수많은, 아주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을 전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것을 '폭력의 세기'라 불렀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과 같은 악의 모습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부르며, 인간들의 폭력성은 개개인의 어떤 도덕적인 타락이나,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악으로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이 폭력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무자비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폭력사회>의 저자 볼프강 조프스키(Volfgang Sofsky)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은 왜 폭력을 행하게 되는가? 조프스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질서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질서로서 억압할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폭력이 되살아나는 것. 이 폭력은 물론 단순하게 반질서, 혹은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질서 그 자체 역시 폭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질서가 더욱 공고화되면 공고화될수록 응축된 폭력의 강도는 조금씩 세진다.  

   
  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지배했다. 폭력은 혼돈을 만들고, (혼돈을 어렵사리 극복하고 만들어낸) 질서는 폭력을 만든다. 이런 딜레마는 풀어낼 길이 없다. 질서는 폭력에 대한 불안에 기초하여 스스로 새로운 불안과 폭력을 만든다. (p.13)  
   

그러므로, 폭력의 근원은 단순히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다시 한 번 홉스로 돌아가 보자면,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것은 안전에 대한 갈망이었다. 즉 누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종의 규율을 가진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신체상의 안전을 희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사회를 만든 목적이다..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고, 조프스키도 여기에 동의한다. 신체의 고통에 대한 불안,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안전에 대한 희구이고, 그 안전에 대한 희구가 극대화된 것이 질서를 제일의 우선으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질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불안한 연결고리로서 이루어진, 그 안에 폭력적인 요소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가 고통을 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그 어떤 것, 즉 타인에게 먼저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처럼 내부를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자라난다. 질서는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에서 보듯 유한한 생명을 가진 신도 자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질서는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것에, 즉 적이건 친구이건 간에 모든 세상에 적용되어야 한다. 질서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려는 사명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제국주의는 단일 원칙의 보편주의에서 두드러진다. 다르다는 것, 타자는 공격을 유발한다. 타자야말로 상대화, 불확실성, 위험의 지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초토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p. 30)
 
   

 ................................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된 폭력의 여러 양상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들만 나열하여 보아도 분명할 것이다.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폭력의 양상과 그 작동방식을 이 책은 철저하게 해부하고 있다. 특히 1장 이후부터는 각각의 폭력적인 테마들을 하나하나 밀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의 치밀함으로 인해, 때로는 욕지기가 밀려올라올 정도이다. 폭력사회의 여러 양태들, 그리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역겨우면서도, 흥미로운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이란, 목차에서 드러나듯이, 육체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가 정신적인 폭력을 간과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저자는 정신적인 폭력은 결국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다 근원적인 의문으로서,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즉 이 사회에서 폭력의 요소는 이곳저곳에 너무 많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 그런 폭력의 요소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 그래, 그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물론 모든 책이 어떤 해답을 던져줄 필요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문학은 어떠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고, 굳이 그것에 대한 어떤 전망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 것인가라는 답을 내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왠지 저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알았던 어떠한 것들과 꽤나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문화적인 연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적인 충동의 힘 때문이 아니라 인간 특유의 잠재력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혹 행위는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문화적 형식들이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그것을 박살 내려고 한다.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갑자기 인간애나 도덕적 절제가 솟아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p.325-326)
 
   

인간의 폭력이란 그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 인간이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인간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 뿐, 문화라는 것 역시 그런 폭력에 일조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저자가 지향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의 폭력성을 말끔히 제거해 줄 사회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문화마저 그것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면-.

여기 역자 후기에 몇몇의 힌트가 있다. 조프스키의 전 저서 <안전의 원칙>의 큰 주제는 '자유냐 안전이냐'였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3대 구호 중 하나인 자유를 안전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이 책 <폭력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역자의 말마따나 논의의 폭이나 깊이는 <안전의 원칙>을 훨씬 능가한다.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한다...그리고 반문화, 다중(multitudo)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에 대한 알러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더 잘 조직된 폭력 뿐이라는 것...우리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몇몇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들도.

ps.

그리고 마지막 뱀다리를 하나 붙여두자면, 이 책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는 역자 역시 심상치 않다. '<폭력사회>를 엄밀하게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프스키는 우리 같은 좌나 우의 이분법으로 파악하기 힘든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중략) 진영화되고 내용은 고갈되어버린 한국 지식인 사회가 새로운 고민과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 조프스키의 문제 제기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저자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그저 쓴웃음만 날뿐이다. 진영화되고 내용은 고갈되어 버렸다...라. 그 진영화의 백척간두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기자인(더더구나 최장집 교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역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쓰는 집단의 일원인 역자가 '우리 같은 좌나 우의 이분법'이라니...이 무슨 뜬금없는 자기반성아닌 자기반성인지.  

글쎄. 어렵게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그냥 간단하게 말씀해주시길. 이 책을 굳이 번역하신 고매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 책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비 - Bobb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치 영화다. 글쎄.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노골적인 정치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여러 리뷰들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영화의 제작을 둘러싼 몇 가지 이야기들. 이 영화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마지막 날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에 출연한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 마틴 쉰, 안소니 홉킨스, 로렌스 피쉬번, 헬렌 헌트, 샤론 스톤, 데미 무어, 크리스찬 슬레이터, 샤이어 라보프, 린제이 로한, 애쉬튼 커처, 헤더 그레이엄, 프레디 로드리게스 등 -역시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로서 거의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제작되고 개봉한 시기는 2006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참고 견뎌야 했던 시기였던 부시의 시대였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영화 주변의 이야기들을 끌어모으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정치색은 거의 명백해진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는 모사되지 않는다는 점. 즉 이 영화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당시의 자료화면과 실제 연설목소리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로버트 케네디의 연기가 필요한 시점에서도 연기자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카메라는 교묘하게 그의 얼굴을 피해서 지나간다. 이 이유는 명백하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결국 관객들에게 이 사건이 가짜의 사건이 아님을, 즉 만들어내거나 모사한 어떠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건임을, 그가 행하는 모든 말들이나, 행동이 각색된 것이 아니라, 그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마지막에 이어지는 총격 사건에서 계속 울려퍼지는 그의 육성 연설문. 명 연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연설은 영화 속 마지막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마도 상업영화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정치인의 연설을 십여분 이상 직접적으로 들려주며 영화를 끝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 영화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영화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의 어떤 울림을 주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조금은 산만하고도,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영화의 타이틀 롤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던 그날, 앰배서더 호텔에 있던 여러 인간 군상들이다. 그 인간 군상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돈 드라이스데일의 6경기 연속 완봉 투구를 보러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멕시코인 호텔 직원, 호텔의 지배인으로서 다른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빠져 있는 남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나이든 여가수, 옛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호텔 직원, 마약에 빠져 할 일을 제쳐두고 마는 철없는 선거운동본부의 운동원들, 고압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호텔의 또다른 직원,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자, 항상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상류층 여자, 스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여자,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는 흑인 조리장, 베트남에 남자를 가지 않게 하려고 그다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여자, 로버트 케네디의 인터뷰를 어떻게든 따내려고 하는 체코인 여기자....이 모든 인간 군상들은 여러가지 관계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모두 별개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개로서 작동한다는 것은, 이런 얘기다. 즉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조금은 얽혀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말하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들 각각의 생활은 분명히 서로서로 그다지 직접적이고 큰 관계는 없고, 직업적 관계로 얽혀있는 않는 한 대부분 앞으로 특별히 만날 일이 없이 서로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식. 즉 마지막 총격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총격 세례를 받고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별개처럼 보였던 삶이 사실은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공동의 재난에 같이 빠져 있는 모습으로 이들 삶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많은 재난 영화들이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인 재난에 빠져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성의 회복을 묻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식. 그러나 이 방식은 엄밀히 따져 볼 때 여기에서는 가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총격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의, 즉 총격 이후의 그 재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총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여러 다양한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들은 그저 시각화된 상징에 불과한 것. 

그보다 궁극적인 것은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결국 정치란 우리 삶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의외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케네디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케네디의 연설을 오버랩시킨다. 그러나 하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그 연설의 주된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제 폭력을 중단시키자는 것, 미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적인 폭력, 베트남에서의 폭력,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이제는 중단시키고, 이제 평화의 메시지를 서로서로에게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그 연설에서의 주된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던 주체는 이제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사라진다.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킹 목사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일어난 또하나의 비슷한 죽음. 이 죽음은 어떤 절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이 절망은 분명히 당 시대의 인간 군상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굳이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일상은 이 이후에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인 듯 하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 삶들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불륜이니, 직장동료니 하는 관계로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당대의 시대분위기, 시대흐름이라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정치라는 것에 의해서 결국 얽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라고. 당신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자신이 양쪽에 있어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한 쪽 편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흐름을 긍정하는 것, 혹은 조금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구조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만약 그것이 당신 삶의 어떤 부분에서 심각한 불편함을 야기한다면, 그래도 당신은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사족)

1968년 로버트 케네디는 총격을 받았고, 그 해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글쎄. 그 때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예를 들어서 그 이후에 이라크전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튼 2006년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했고, 그 이후에 2009년에 오바마는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미국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2010년 한국에서 이 영화는 개봉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대통령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MB 정부는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글쎄.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되었으면 미국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다른 어떤 것은 몰라도 적어도 던지는 메시지 하나는 천지차이라는 점.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와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나라면 후자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당연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바타 - Avata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아바타>는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꽤나 재미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애써 <아바타>가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느니, 기대한 것보다 별로였다느니, 너무 볼거리에만 치중했다거니, 등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인지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그러니까 주인공의 성장, 가슴 아픈 멜로, 대규모의 전투씬, 약간의, 아주 약간의(절대 무거워서는 안되는) 메시지, 멋진 볼거리, 그리고 악당과의 최종의 일대일 결투까지...거의 모든 것이 이 영화에는 담겨져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추운 겨울 절절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주인공을 보러갔던 관객들도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스러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는 몇몇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점들이 있다. <주라기 공원>(괴수에게 쫓기는 주인공들), <브레이브 하트>(전투를 이끄는 영웅적인 주인공)나 <반지의 제왕>(대규모의 전투씬), 혹은 감독의 전작 <터미네이터>(더럽게 안죽는 악당)나 <타이타닉>(신분이 다른, 혹은 처해있는 위치가 다른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점들만을 가져온, 거의 그 모든 것들을 집대성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의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대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조금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위의 표현대로 이를 어떤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새 이정표'에 거의 가까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자꾸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 가상의 창조된 세계를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uncanny valley)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의 잊어버린다. 즉 관객은 이것이 마치 실제의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인식해버린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영화가 도달해냈다는 점, 그러한 점에서 이를 하나의 어떤 '새 이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영화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 혹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어떤 새로움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있던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간 존재해왔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새 이정표'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새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의 '총 완결편' 혹은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글쎄.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여러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인줄 아느냐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대단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집대성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야기의 전체 궤도 속에서 매끄럽게 연결해내는 것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이며,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씨네 21>의 평론가들의 쏟아지는 별점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등의 20자평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아바타>가 뭔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지 않았다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적인 안일함, 혹은 그 이야기의 어떤 19세기적인, 20세기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찬사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종교의 자유를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 옮긴이)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해 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디언의 땅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는 피쿼트족(Pequots)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을 원한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과 피쿼트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영국인들은 예전에 멕시코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투 방법을 사용했다.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오는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칼로 베었다. 

                                        -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살아있는 미국역사, p.28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바타>에서 보아온 그 이야기다. 원주민인 나비 족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신성한 나무를 공격하는 지구인들. 원주민들의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수많은 자원들을 획득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침략자들. 영화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다.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원주민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인 인디언은 거의 종족적인 멸종 상태에 이르렀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갖혀 살아야하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토루크 막토'로 거듭나고, 그의 지휘로 원주민은 최종의 승리를 거두고, 지구인들을 몰아낸다. 짝짝짝.

사실 이 이야기가 안이하다 못해, 20세기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사실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의 일원? 사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해진다. 살고 있던 보금자리가 무너진 후 나비 족은 거의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그저 모여앉아, 미스테리한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네이티리의 어머니), 용맹스러운 쯔테이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 설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의 상태로 이들에게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구인들을 배신하고, 이들을 이끌며 지구인들에 대항한다. 즉, 거의 무력한 나비 족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사실은 이들의 적인 제이크 설리라는 이 아이러니.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키트 카슨. ‘노래하는 풀’이라는 인디언 처녀에게 반해 그들의 언어도 배우고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디언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영화 속 제이크처럼 지형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부 정복의 주역이었던 프리몬트 원정대의 안내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을 초토화하는 작전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씨네 21> 부분 발췌) 그러나 영화의 제이크 설리는, 이 키트 카슨의 전혀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자신들의 역사에 제이크 설리라는 당의정을 입힌, 혹은 면죄부를 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아메리카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다. 원주민들과 가깝게, 혹은 거의 원주민들의 편이라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백인들은 사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였고, 그들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결국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 용맹한 여전사 네이티리도 아니다. '하늘에서 온'(물론 표면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대리자를 일컫는다. 원주민들이 지구인들을 이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이크 설리는 토루크를 타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사실 이 부분도 조금은 이상하다. 왠지 이 장면에서의 제이크는 원주민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게 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추장을 뛰어넘는 이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유유히 거의 쯔테이의 여자인 것처럼 보였던 네이티리를 차지하고, 이들을 이끈다. 이게 무슨 20세기적인, 아니 19세기적인 선민의식이고, 교화의식이란 말인가. 도대체 원주민들의 주체성이란, 그들의 위대한 힘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아바타'라는 것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나비족이지만, 정신은, 아니 영혼은 지구인의 것. 즉 원주민들의 육체란 처음부터 지구인에게 종속적인 것. 원주민들에게 주체적인 사고란, 아바타 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그 육체의 현시만이 가능한 것.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 작은 위안거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그 하나는, 최후의 전투에서 거의 궤멸할 것으로 보였던 원주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괴수들의 도움, 즉 기도에 응답한 신의 대답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악당과의 대결에서 악당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위안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미 제이크 설리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즉 전체 구조에서 원주민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21세기 신 블록버스터가 어딘지모르게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이 전쟁에서 나비 족은 승리하였는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어떤 극한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한 판타지이건, 혹은 공포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극찬과 무수히 쏟아진 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2시가 4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극한의 판타지 속으로, 그 행성 안 숲 속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판타지를 스스로 거부하는 중생은 자꾸만 이 석연치 않음이 마음에 걸린다. 이 판타지 불감증에 걸린 중생을 인도할 새로운 판타지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기적 식탁 - 사치와 평온과 쾌락의 부엌일기
이주희 글 사진 / 디자인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파스타계의 디저트, 카르보나라 레시피 

   
  01. 끓는 물에 (늘 말하듯)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면을 삶기 시작한다. 탈리아텔레의 경우 대강 6분 정도라고 패키지에 써 있으니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서부터 소스를 준비하면 대강 시간이 맞는다. (중략)
03. 생크림과 달걀노른자 하나(달걀노른자와 무염 버터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건 못하겠다), 파르미자노 간 것, 그리고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 잘 섞는다.
04. 판체타나 아주 스모키한 베이컨을 준비한다. 뭐 힘들면 그냥 마켓에서 파는 베이컨도 어쩔 수는 없지만 얇게 슬라이스한 스모키한 베이컨이 좋다. (나는 이태원의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쓴다.) 올리브 오일을 아주 조금 두른 팬에 베이컨을 2-3줄 익힌다. 갈색으로 노릇노릇 바삭하게 익을 때쯤 면이 완성될 거다. (후략) (205-207 p)
 
   

 

추측하건대, 요리라는 것은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어느 정도의) 사치(돈)의 산물이다. 나같이 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위의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요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면, 아주 실패할 확률이 높다. 먼저 어찌어찌해서 탈리아텔레라는 넙적한 모양의 파스타를 구해서 겨우 1번 단계를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3번 단계에 이르면 역시 주춤해지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무염 버터가 상당히 걸리기는 하지만, 저자도 안 넣는다고 했으니,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근데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라니. 통 후추를 어떻게 갈아 넣지요? (지식인 검색 후) 아..갈아 넣는 도구가 있다구요? 페퍼밀이라나, 페퍼그라인더라나..뭐라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X마켓에서 팔기는 파는구나. 근데, 이걸 오늘 사면 어차피 오늘 배송이 안되니 오늘은 못 해먹잖아. 마트에 나가면 팔까. 큰 마트로 나가자면 꽤 시간이 걸릴텐데..아냐, 그래도 배송이 걸리더라도 X마켓으로 사면 카드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이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아니, 그래도 어차피 통 후추를 사야하잖아. 그럼 마트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결국 생각이 이르는 지점은 한 곳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라는 자괴감. 그냥 가까운 스파게티점에 들러서 까르보나라 한 그릇 주문해서 먹으면 될 것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책에 가끔 보면 나오는 구절들과 우리집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를 이용하여..' '야채칸을 열어서 남아 있는 아무 야채나 넣어도 맛있다'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을 열면 남아 굴러다니는 야채라고는 매우 오래되어 끝이 누렇게 변색된 양파 반 쪼가리밖에 없는데, 설마 이걸 넣어도 맛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이런 집에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 같은 것이 있을 턱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리라는 것은 결국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충분한 돈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요리가 맛있을 것이다라는 보장은 없다. 당신은 분명히 레시피를 따라하는 도중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그 사소한 부분들은 당신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다 만든 요리를 개수대에 부어버려야 하는 그런 댓가 말이다. 

징징 대는 것은 그만하고, 몇 가지 긍정적인 시선들을 던져보기로 하자. 아마도 3번에 이르러, 내가 귀찮음을 무릎쓰고, 대형마트에 나가 통 후추와 페퍼밀을 사왔다면(그리고 기꺼이 이태원에 들러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사왔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레시피에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 편이므로, 이번 요리에 성공해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어 치웠을 것이고, 우리집 부엌에는 페퍼밀이 갖추어졌을 것이고, 남는 판체타는 냉장고에 넣어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번의' 요리에서도 페퍼밀을 적당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집 냉장고 안에는 드디어 '남는 판체타'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시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 '냉장고의 남는 판체타..'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면 승자의 미소를 날리며, 유유히 냉장고로 달려가 '남는 판체타'를 꺼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나, 피시 파피요트나 누텔라 너츠 토스트나 이태리식 오믈렛 프리타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 떡볶이나 오뎅국이 나오기도 하고, 달걀비빔라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도대체 요리책들이란, 당최 해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손이 많이가는 요리들만 소개하고 있군'이라는 불평은 때때로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재료들이 가끔 나와서 그렇지, 레시피는 꽤나 세심한 편이라, 재료들과 기구들만 잘 구비해 놓는다면, 살짝 복잡해보이는 요리라고 해먹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아침 10시, 오후 3시, 오후 8시, 새벽 1시로 나누어, 그 시간에 해먹으면 좋을 요리들을 소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단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말랑말랑한' 레시피는 사양하고 싶다. 즉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는다'라고 이야기하면 나같은 류의 인간들은 도대체 어느정도 소금을 넣으란 말이야라고 불평부터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저 '물 몇 ml에 소금을 2티스푼을 넣으세요'라고 하는게 속편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몇 가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를만한 재료들에 대해서는 그 내용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즉 '판체타'가 '이탈리아식 베이컨'이라는 것 정도는 말해주어도 좋지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아...그건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고요?)  
................................

사실 이 책의 매력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각 요리의 레시피를 소개하기 전에 각 요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일종의 에세이 부분이다. 작가는 여러 소재들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요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맛깔스런 어조로 전달해주고 있다. 글쎄..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친구를 가진, 요리에 취미가 있는, 고양이를 기르는, 그리고 가끔 낮술도 즐기는 이 저자의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전형적인 부분도 있고, 내가 아는 몇몇 여인네들의 삶과는 조금은 괴리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맛깔스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던지는 그녀의 몇몇 이야기들은 살짝 미소를 짓게 할 정도는 충분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주로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면서 잠 자고 있는 인간들에게 상대적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어대는 나같은 인간들은 이 그녀의 에세이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읽을 것. 그 뒤의 소개된 요리들의 레시피는 부디 그냥 넘겨버릴 것.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시피 옆에 첨부된 사진들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다면 더욱 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당신은 오늘 하루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죄? 난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시봉과 나(진만)는 나타나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옆의 사람을 살짝 밀고 빨리 올라탄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점심 시간에 동료와 밥을 먹으며, 남아있던 마지막 계란말이를 집어 먹은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엘리베이터에서 앞의 남자에게 살짝 한숨을 내쉰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회사 상사가 가끔 안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가 아까 바퀴벌레를 잡아 죽인 것도 죄가 되겠군..흥." 그러면, 아마도 시봉과 진만은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는 사과를 할 수 없기(사과를 해야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바퀴벌레에게 사과할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즉, 시봉과 진만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그것이 사과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에 있다.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봉과 나(진만)는 어느 '시설'에 있었다. 그 시설의 남자보육사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늘 강요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고백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사과를 하면, 덜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이후로 늘 죄를 짓고, 사과를 했고, 맞았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은 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그런 날에는 꺼림칙해서, 맞은 이후에 꼭 해당하는 죄를 짓고는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들은 원생들의 반장이 되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고백하고, 대신 사과하고, 대신 맞아주었다. 시설이 문을 닫게 되고, 그곳에서 나온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 그것은 '사과'를 하는 것, 즉 남들이 지은 죄를 대신 사과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급기야는 이른바 '사과 전문가'가 된 셈이었다.
..................................

이것이 이 소설의 중반까지의 이야기이다. 중반까지의 이야기를 적어 놓고, 읽어보니, 왠지 이 이야기는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시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계속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사건들을 서술해주는 나, 진만은 어린아이, 혹은 거의 안이 텅빈 기계와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절친, 시봉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사실 모호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들의 이러한 지체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제시되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이 '시설'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설이 이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몸에 좋은 것'으로 알고 있고, 급기야는 그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알약.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자 보육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죄의 추궁과 사과,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린치. 아무튼, 이런 이유로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주인공이 전하는 이야기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겉의 의미와는 달리, 계속 그 이면에는 다른 의미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모호하고도 독특한 분위기와 짧은 문장들로 이어지는(어린아이, 혹은 기계는 긴 문장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듬이 생겨난다.  

 

   
  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종 연극을 하자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항상 엄마 역할이었고, 원장선생님은 매 맞는 아들 역할이었다. 대사 또한 매번 같았는데, 우리는 지휘봉으로 원장선생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그렇게밖에 못 하겠어! 그렇게밖에 못하겠냐고"라고 소리쳐야 했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은 "엄마, 엄마, 더요, 더 때려주세요!"라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엉덩이를 우리 얼굴을 향해 높이 들어 올린 채,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이 모두 다 끝나고 난 후엔, 우리에게 초코 우유나 요구르트를 건네 주었다. (p.51)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우화(寓話)로 볼 수 있다. 본시 우화에서 즐겨 써먹는 수법 중의 하나는 겉으로는, 어리석은 주인공이 등장하여 벌이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전달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교훈을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몇몇 설정들은 상징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두 명의 남자 복지사의 외양을 묘사하며, 키가 작은 쪽은 늘 의사들이 입는 흰 가운을 걸치고 다녔고, 키가 큰 쪽은 청바지에 군화를 신고 다녔다고 묘사하는 장면들 같은 부분 말이다(게다가 키가 큰 쪽은 머리숱마저 적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흰 가운이 근대적인 문명,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군화가 군대, 질서,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근대적인 문명과 체제적 질서는 결국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없는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남자복지사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존재는 원장이다. 진만이 구치소에 있는 원장 선생님을 찾아간 이 장면을 잠깐 보자.  

 

   
  나는 재빨리 물어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원장선생님은 말을 하곤 씨익, 짧게 웃었다. 그러곤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꾸벅,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p.215)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다...요즘에 이 말처럼 맞는 말도 없지 않을까. 자신의 죄를 모른 척하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죄는 더 이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누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의 죄임을 고백하고 나선 사람은, 그 죄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거나, 사회에서 추방되기도 한다. 히틀러가 말했던가.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쉽게 속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그에게 짧은 미소를 날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어리석거나, 혹은 변하지 않는다. 진만은 '시설'에서 늘상 했던 대로, 등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할 뿐이다. 그(원장 선생님)의 앞의 모습이 어떤지 전혀 모른채로 말이다.
......................................

이러한 세상 속에서, 나(진만)와 시봉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고, 맞는 것으로 그 죄를 사하려 한다. 자신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현대판 예수와 같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죄를 떠안아, 기꺼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던 예수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찬란한 부활로 마무리되는 성경과 달리, 이 이야기는 석연치 않은 비극성을 남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들의 이런 사과는 결국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파국은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파국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그것은 복지사들로부터 시작된 폭력의 방식이 다른 더 거대한 폭력으로 확대되어 마무리되는 양상이지만(어쩌면 여기에 작가의 진실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 진실이란 '죄'라는 것은 결국 근원적으로는 '사과'할 수 없다는 것) 실상은 그 폭력의 시작은 그들에게 복지사들이 폭력을 가하던 것보다 더 오래전, 아버지가 진만을 시설에 버려두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마무리.  

 

   
  나는 잠깐 뒤돌아, 병원의 파란색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p.220)
 
   


밝게 전달되는 가벼운 이야기인 듯 했던 여기에 이 소설의 비극이 숨어있다. 여전히 병원의 십자가는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시봉과 진만이 나 대신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죄를 끊임없이 묻는 사회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봉과 진만이 말한대로, 죄는 셀 수 없이 많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급기야는 죄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신은, 아니 나는,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