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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은 일어나고,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세상 곳곳의 소식들을 전하는 뉴스들은 거의 '폭력의 메신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수많은, 아주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을 전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것을 '폭력의 세기'라 불렀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과 같은 악의 모습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부르며, 인간들의 폭력성은 개개인의 어떤 도덕적인 타락이나,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악으로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이 폭력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무자비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폭력사회>의 저자 볼프강 조프스키(Volfgang Sofsky)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은 왜 폭력을 행하게 되는가? 조프스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질서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질서로서 억압할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폭력이 되살아나는 것. 이 폭력은 물론 단순하게 반질서, 혹은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질서 그 자체 역시 폭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질서가 더욱 공고화되면 공고화될수록 응축된 폭력의 강도는 조금씩 세진다.  

   
  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지배했다. 폭력은 혼돈을 만들고, (혼돈을 어렵사리 극복하고 만들어낸) 질서는 폭력을 만든다. 이런 딜레마는 풀어낼 길이 없다. 질서는 폭력에 대한 불안에 기초하여 스스로 새로운 불안과 폭력을 만든다. (p.13)  
   

그러므로, 폭력의 근원은 단순히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다시 한 번 홉스로 돌아가 보자면,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것은 안전에 대한 갈망이었다. 즉 누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종의 규율을 가진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신체상의 안전을 희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사회를 만든 목적이다..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고, 조프스키도 여기에 동의한다. 신체의 고통에 대한 불안,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안전에 대한 희구이고, 그 안전에 대한 희구가 극대화된 것이 질서를 제일의 우선으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질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불안한 연결고리로서 이루어진, 그 안에 폭력적인 요소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가 고통을 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그 어떤 것, 즉 타인에게 먼저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처럼 내부를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자라난다. 질서는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에서 보듯 유한한 생명을 가진 신도 자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질서는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것에, 즉 적이건 친구이건 간에 모든 세상에 적용되어야 한다. 질서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려는 사명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제국주의는 단일 원칙의 보편주의에서 두드러진다. 다르다는 것, 타자는 공격을 유발한다. 타자야말로 상대화, 불확실성, 위험의 지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초토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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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렇게 시작된 폭력의 여러 양상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들만 나열하여 보아도 분명할 것이다.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폭력의 양상과 그 작동방식을 이 책은 철저하게 해부하고 있다. 특히 1장 이후부터는 각각의 폭력적인 테마들을 하나하나 밀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의 치밀함으로 인해, 때로는 욕지기가 밀려올라올 정도이다. 폭력사회의 여러 양태들, 그리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역겨우면서도, 흥미로운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이란, 목차에서 드러나듯이, 육체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가 정신적인 폭력을 간과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저자는 정신적인 폭력은 결국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다 근원적인 의문으로서,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즉 이 사회에서 폭력의 요소는 이곳저곳에 너무 많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 그런 폭력의 요소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 그래, 그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물론 모든 책이 어떤 해답을 던져줄 필요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문학은 어떠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고, 굳이 그것에 대한 어떤 전망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 것인가라는 답을 내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왠지 저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알았던 어떠한 것들과 꽤나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문화적인 연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적인 충동의 힘 때문이 아니라 인간 특유의 잠재력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혹 행위는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문화적 형식들이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그것을 박살 내려고 한다.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갑자기 인간애나 도덕적 절제가 솟아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p.325-326)
 
   

인간의 폭력이란 그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 인간이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인간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 뿐, 문화라는 것 역시 그런 폭력에 일조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저자가 지향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의 폭력성을 말끔히 제거해 줄 사회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문화마저 그것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면-.

여기 역자 후기에 몇몇의 힌트가 있다. 조프스키의 전 저서 <안전의 원칙>의 큰 주제는 '자유냐 안전이냐'였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3대 구호 중 하나인 자유를 안전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이 책 <폭력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역자의 말마따나 논의의 폭이나 깊이는 <안전의 원칙>을 훨씬 능가한다.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한다...그리고 반문화, 다중(multitudo)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에 대한 알러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더 잘 조직된 폭력 뿐이라는 것...우리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몇몇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들도.

ps.

그리고 마지막 뱀다리를 하나 붙여두자면, 이 책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는 역자 역시 심상치 않다. '<폭력사회>를 엄밀하게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프스키는 우리 같은 좌나 우의 이분법으로 파악하기 힘든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중략) 진영화되고 내용은 고갈되어버린 한국 지식인 사회가 새로운 고민과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 조프스키의 문제 제기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저자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그저 쓴웃음만 날뿐이다. 진영화되고 내용은 고갈되어 버렸다...라. 그 진영화의 백척간두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기자인(더더구나 최장집 교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역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쓰는 집단의 일원인 역자가 '우리 같은 좌나 우의 이분법'이라니...이 무슨 뜬금없는 자기반성아닌 자기반성인지.  

글쎄. 어렵게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그냥 간단하게 말씀해주시길. 이 책을 굳이 번역하신 고매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 책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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