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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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웃었다. 하하하.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의 인장들이 물씬 드러나는 영화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사용한 몇몇 장치들. 등장인물들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나, 다르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일종의 '반복과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밤과 낮>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등장인물이 과거를 회상하여 그것에 논평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렇다. 또 꿈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도 예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독특한 꿈 씬이 등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장면들은 예전 영화에서처럼 꿈인지 아닌지 약간 모호한 면도 있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홍상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소위 '홍상수 사단'임을 하나의 인장 요소로서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일 것이다. 즉 구조든 내용이든 간에 아무튼 이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 즉 '관객들의 웃음'을 여전히 유발한다는 점. 그런데 그 웃음이 예전과는 약간 다른 점도 있다. 예전의 웃음들이 관객들을 계면쩍게 만들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 영화의 웃음은 조금 더 귀여운 웃음이랄까, 상쾌한 웃음이랄까.

그리고 <하하하>는 여름의 이야기이다. 夏夏夏. 여름여름여름. 그 세 번의 여름이야기. 첫 번째 여름은 문경(김상경)의 회상. 어머니를 만나러 간 통영에서 관광 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나, 그녀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여름은 중식(유준상)의 회상. 통영에서 그의 애인 연주(예지원)와 밀회를 즐기며, 후배 정호(김강우)와도 어울리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여름은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로서 추론하여 만들어내는 이야기. 우리는 이 둘의 회상을 통해, 이들 각자가 알지 못하는 몇몇 중요한 사실을 안다. 예를 들어 가장 대표적인 사실. 문경은 성옥과 그녀의 애인에 대해 알지만, 그녀의 애인이 바로 중식이 말하는 후배 정호라는 사실은 모른다. 즉 우리는 두 사람이 하는 몇몇 얘기들을 통해서, 두 사람보다 이 이야기 전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 두 사람의 얘기를 본다('듣는다'가 아니라 '본다') 어쩌면 이 유머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들보다 많이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왠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전작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 21>에서 정한석이 말한 것처럼 좋은 것, 나쁜 것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한석은 말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도덕은 선악의 가치판단에 관계 되지만, 윤리는 좋음과 나쁨의 질적 차이에 관계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좋음과 나쁨! 좋은 것만 보아라! 그러면서 들뢰즈는 "슬픈 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에 속한다"고 하였으며 윤리학이 해야 하는 삼중의 실천 중 첫 번째로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을 설명해주는 장면으로 문경이 성웅 이순신과 만나는 장면을 들었다. 그 장면이 이 철학적 내용에 대한 홍상수 식의 설명이라고 말이다. 

그저 몇 가지 잡설을 여기에 덧붙여 보자면, 이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작의 제목을 연상시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전체를 온전하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분의 문제이며, 동시에 선악, 즉 도덕의 문제 또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전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건네기도 한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일 수 있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에게 동일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만의 윤리의 관점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에게 누군가가 '이 전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의 섣부른 도덕적 혹은 윤리적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마'와 거의 비슷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말고, (도덕이 아닌) 너 자신만의 윤리적 관점을 만들어갈 것,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도 그 사람의 윤리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들여다 볼 것. 그것을 실천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좋은 방법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방법은 간단하기는 하나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내가 전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만 보려 한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홍상수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를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순신에게 문경은 묻는다. '아 그러면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거...뭐 그런 겁니까?' 이순신은 답한다.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딨냐?')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쩍게 생각했던 부분은 이 영화의 구조였다. 즉 두 사람의 여행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형식이 아니라, 두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후, 술자리에서 만나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 그리고 그 형식도 좀 수상쩍은 것이, 굳이 현재의 술자리를 스틸사진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야기를 회상하는 형식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일기를 도입하거나, 씬의 번호를 매겨서 장면을 나누는 형식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스틸사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를 '좋은 것만 보라'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것이 이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던 것. 즉,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로, 실제 그들이 그곳에서 행한 행동과 그 후의 논평과의 불일치 - 예를 들어, 문경이 정호에게 맞았을 때도 문경은 그것을 '의연하게 대처해서 좋았다'고 회상한다. 사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맞은 것에 불과했으면서도 말이다 - 에서 생겨나는 솔직함이자, 예의 그 홍상수 식의 유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보다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이 술자리의 대화의 주제는 몇 번 반복되어 제시되듯이, '여름에 좋았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 논평들은 '응, 좋았겠구나' '어, 좋았어'로 마무리되고 있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인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성웅 이순신의 말로써 직접 전달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들의 아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틸사진들. 사진들이란 결국 무엇인가. 사진들은 결국 '좋았던 것'을 담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후,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과 사진으로 남기는 것, 그 차이. 동영상과 달리 사진은 철저하게 좋았던 내용만이 담겨있다. 물론 동영상 역시 일정 부분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은 거의 철저하게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우리에게 좋았던 것만 담기게 된다. 이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누면서 보여지는 스틸 컷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이 두 사람이 잔을 부딪히고, 웃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이 사진만을 놓고 이 술자리를 판단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 사진들을 놓고서는 이 술자리가 '화기애애하고 좋았다'라고 밖에 추측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이 스틸사진들을 통해서 이 술자리의 '좋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액자인 이 스틸사진이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틸 사진들과 회상 장면의 동영상들과의 대비, 그 놀라운 형식과 주제와의 결합.

즉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를 주인공들의 성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통영에서와 달리, 서울 근교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이 술자리는 주인공들의 '좋은 것만 보라'의 실천적 체험 현장이다. 좋은 것만 말하고, 좋은 것(사진)만 남기는 자리. 그리고 심지어는 이 술자리는 깔끔하게 끝나기조차 한다. '이제 마지막 잔하고 일어설까' 이런 류의 대사가 맨 마지막에 나오다니, 이게 홍상수 영화에서 가능했던가. 아무튼 망가져서야 끝장을 보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술자리가 아니던가. 아니, 그것은 어쩌면 통영에서부터 미리 예고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식은 비록 불륜이기는 하나, 연주에게 청혼을 하고, 문경도 성옥에게 같이 캐나다로 가자며, 청혼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다른 영화에서도 있었던가. 그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빨리 넘어뜨리고 보자는 쪽이었지, 청혼을 하자는 쪽은 아니었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남자들, 그 성장의 표식들은 상당히 놀랍기까지 하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이 표식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긍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부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전자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아무튼 긍정의 의미에서 하하하.

p.s. 이 영화의 문소리의 연기는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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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5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6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7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몽영화 - Enlightenment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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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아마 보통의 영화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 이런 제목이 붙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거의 사어(死語)에 가까울 뿐더러, 혹여 쓰인다고 해도 요즘에 들어서는 '계몽'이라는 말은 거의 조소나 모욕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말이다. 내가 너를 계몽해야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아마 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이거나 드시죠, 라고 말할 것이다. 계몽..아니, 굳이 계몽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즘에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니까 말이다. 인터넷 시대에 게시판에서 가장 분란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 중의 하나가 "어디 나에게 가르치려 들어?"인 것은 거의 주지의 사실. 그래서, 어쩌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감독의 시대에 대한 냉소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삼대(三代)는 조금씩, 조금씩 비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로 부와 지위를 쌓은 1대, 그리고 군부독재의 시대에 독재에 빌붙어 폭력적이고 기형적으로 성장한 2대, 개인주의의 시대에 이기적으로 성장한 3대. 그들이 보여주는 비틀어진 가족극의 굴레. 그러나 그들에게는 몇 번인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비틀어진 것들을 조금씩 바로잡아나갈 기회들이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들은 그 때마다 '자신을 위하는' 선택을 해나갔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신들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러한 선택들을 말이다. (이 영화의 팜플렛에는 이 영화는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 사실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일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선택들이 단순히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에는 한국 사회의 어떤 대물림에 대한 처절한 욕구가 담겨 있다. 때때로 수많은 선택들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자신들이 가진 부, 지위, 명예...등등을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하려는 욕구, 그것들은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의 반복되는 행위들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주류사회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초등학교 앨범 사진촬영에서조차 중심에 서야 한다는, 주류사회에 대한 그 처절한 발버둥질. 그러나 그 처절한 발버둥질은 주류사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하는 것과 동시에, 몇몇 대물림되지 말아야 할 것 - 폭력, 이기심, 탐욕 등등 - 까지 동시에 대물림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니, 아마도 그것들 역시 대물림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대물림되는 그것의 결과물들이 결국 무엇을 초래하는지 영화는 밀도 있는 서사 속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흥미롭게 읽힌다. 이 3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주류 사회의 모습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으로 말해서 한 두가지 장면들을 제외한다면, 이 가정의 모습은 60-70년대 '대한뉴우스'에 실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권장할 만한 가정의 모습이다. 즉 이 모습들은 한국의 나머지 비주류들이 그토록 원하는 부와 지위와 권력을 약간이나마 소유하고 있는 모습이며, 나머지 비주류들에게 이상적인 형태로서 '계몽의 표본이 될' 만한 가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렇게 계몽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화는 이 '계몽의 표본으로서 내세울만한 가정'이 실상 그 내부적으로 전혀 '계몽의 표본'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간 '이 정도 수준'이 계몽, 혹은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한국 사회의 수준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을 통해 물으며 조소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지난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3대의 각 인물들을 펼쳐보임으로써 이것이 단지 한 가정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나간 모습들과 그 때의 선택의 결과들이 초래한 현재의 모습임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그간 역사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왔는가? (예를 들자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던 '반민특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선택에 당신은 자유로운가? 아마도...아마도, 그것에 거의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류이건 아니건 간에, 어쨌든 그 주류 사회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매달려보고자 이들과 같이 발버둥을 쳐왔으니 말이다. 즉 이 영화의 3대는 타자화된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저 '우리 사회 그 자체'일 것이며, 그것이 이 영화가 묵직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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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2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한 가지 의문은 이 영화의 캐릭터 구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작은 기업체의 사장이자, 집안의 독재적인 가장이며, 카라얀을 사랑하는 예술 애호가이면서(이 카라얀 역시도 아내가 권해준 것) 동시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2대 정학송의 불안한 모습과 그와 대비되는 아내의 모습은 어떠한가. 뒤의 결정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라도 이 불안한 남성 캐릭터는 독재적인 군사정권에서 가정과 학교, 군대라는 폭압적인 체제 하에서의 뒤틀린 한국의 남성들을 묘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태선과 그의 남편, 김성호의 관계는 어떨까. 이를 단순하게 태선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성의 잔영으로만 이해하여야 할까. 이 영화의 주된 화자(話者)인 태선과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중심축인 태선의 어머니(학송의 아내)의 병실에서의 모습 등은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그리고 또다른 의문은 이 영화의 결론과 관련된 것이다. 문을 전부 뜯어고치겠다는 태선의 태도를 우리는 긍정의 예후로 읽어야 할까. 글쎄. 그러면서도 태선은 여전히 대물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예전의 세대가 직접적으로 부와 지위와 권력을 자식들에게 넘겨 주는 방식을 택했다면, 현재의 세대는 간접적으로 이수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자식을 비싼 돈을 들여서 과외를 시키고, 8학군에 보내고, 조기유학을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이 방식이 더욱 효과가 크다. 그러한 교육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사회구조가 이미 공고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남들 보란듯이 대물림하지 않아도 되는 이 세련된 방식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점점 주류사회는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선이 자식을 공항에서 홀로 보내는 이 마무리 장면은 꽤나 씁쓸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까.

이제 조금은 긍정적으로 이 제목 <계몽영화>를 되새겨보자. 현재의 변질된 의미와는 다르게 본래 계몽이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주체적 현실을 구축해 나감을 의미하였다. 즉 신의 거대한 치마폭에 둘러쌓여 있던 중세의 어두운 시기를 밝게 하는 것(enlightenment), 그것이 바로 계몽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이제 어쩌면 지금의 시기가 새로운 의미의 '계몽', 그리고 그에 바탕한 '계몽영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 인디포럼 4월 월례비행으로 본 영화인데, 게으름 덕택으로 이제야 어렵게 기억력을 되살려가며 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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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행복한책읽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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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는 인문학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아마도 자기계발서 쪽에 조금은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교양을 쌓게 해주는 책'들을 말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들어 다양한 교양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서는 교양을 갖추는 가장 쉽고도 편리한 방법이다. (중략) 책이 전달하는 지식이나 정보가 잊혀도 남는 무엇, 바로 그 무엇이야말로 생각의 소득이며 교양의 원천이다. 그 무엇이 우리가 존재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물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p.17)   
   

 

그러면서 저자는 30권의 책을 통한 30가지의 독서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한 권의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통해 그 책을 읽으면서 갖추어야 할 독서법을 제시하는 것. 그러면서, 저자는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각 책들을 연결지으며, 논의를 이끌어간다. 예를 들어 첫번째 독서전략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책을 읽는다'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지성인을 위한 교양브런치>를 읽을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 책으로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는다'라는 테마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행복코드>를 읽도록 하는 것, 그리고 또 그 다음 책으로는 '같은 테마의 책을 읽는다'를 화두로 내세우며,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제시하는 식이다. 즉 저자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꽤나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적이란 30권의 책을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교양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조금은 더 적합한 제목은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라기 보다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조금은 덜 행복한 책읽기'가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싶다. ('조금은 덜'이 붙은 이유는 어떤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수단이 될 경우에는 '완전히'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다 -.)

내가 굳이 이런 딴지 아닌 딴지를 거는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을 혹여 오독하여, 이미 일정 정도의 독서 이력을 갖춘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되면 살짝 실망하지 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즉 이 책은 독서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한 책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별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 특히 인문학 부문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책들을 읽도록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기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들의 선정에서도 보면, 작가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식이 아니라,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거의 새롭게 책들을 읽고, 새롭게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소개된 책들의 면면을 보면 간간이 인문학의 고전들도 끼어 있지만, 최근에 발간된 책들이 상당수이다. 즉 이 책의 주 목적은 소개된 책들을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소개된 예시의 책들을 통해서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를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꼭 '그 책'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작가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서법에 관한 책이면서 이렇듯 책을 구체적으로 선정해 일독을 권하는 것은, 독서법만 알고 실제로 그 독서법에 맞춰 독서는 할 줄 모르는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다. 훌륭한 독서법은 독서 행위 밖에서 관념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독서 행위 내부에서 우리에게 현시될 뿐이다. (p. 17-18)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서평 모음집으로 보기에는 약간 함량미달이다. 소개된 책들의 내용이나, 그 책들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책들인지, 그 책들이 어떤 측면에서 훌륭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소개하기 보다는 거의 그 책과 그 작가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찬사로 일관하며, 상당수의 내용이 소개된 책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당연하게도 이를 가지고 이 책의 글쓴이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목적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책에 어떤 평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책의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제시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책들을 단지 몇 구절에 반하여 구입했던가.

.........................................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문학 책을 읽도록 한다'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효과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책들의 연결된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아마도, 저자가 말한 대로 제시된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인문한 책을 평소에 잘 읽지 않던 사람들도 인문학의 재미를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따라 30권의 책을 덮은 순간에는 어느 틈에 교양인이 되어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그 다음에는 저자가 제시한 마지막 독서법 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선택한 책을 읽'으면 될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 때쯤이면 어떤 기준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음 가는 대로 읽는 것' 그것이야 말로, 독서가가 갖추어야 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어떤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책이 읽고 싶어서,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한 책들이 나를 더 살찌우고, 삶을 풍족하게 이끈다면 그보다 좋은 독서법이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가장 최고의 독서법이란 '어떤 필요가 있어서 읽는 책(바로 이 책?)을 집어치우고, 마음 가는 책을 읽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아..참고로, 이 방법은 고수 이상의 독자들만 시연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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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제목 <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치의 경景, 경계의 경境, 거울의 경鏡,... 그리고 세상이란 창을 통해, 타인이란 거울을 통해, 마침내 자신을 찾게 되는 우리, 주인공의 이름이다'라고. 영화 <경>의 영문 제목인 'Viewfinder'는 카메라를 통해서 피사체를 내다보는 작은 창을 말한다. 용어 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상 이 Viewfinder라는 말은 위의 세 가지 한자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카메라의 작은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경치,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경치는 한정되고 가공된, 즉 경계를 가진 경치다. 어떤 성능좋은 카메라라도 모든 경치를 다 담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프레임 안의 경치와 프레임 밖의 경치로 나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치에 대한 가공 및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카메라를 든 주체의 의지가 그 한정된 Viewfinder에  반드시 반영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주체의 거울상이다. 즉 이 작은 네모창은 동시에 경치가 되고, 어떤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경은 주인공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집을 나가버린 동생 후경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그 '검색'은 남강휴게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그 와중에 남자 혹은 인간 검색엔진인 창을 만나기도 하고, 온아라는 휴게소에서 일하는 직원이자, 유명 파워블로거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아니 더 이상의 스토리를 쓰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씨네 21> 리뷰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어느 순간, 그저 죽 따라서 보게된다. 어떤 전체적인 줄거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한장면 한장면 조용하고 차분하게 관조하게 된다. 어떤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나, 작가의 이력, 또는 미술 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작품의 순수한 미美에 빠져들어 보게 되는 순간, 그것이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온다. 영상의 형식으로 된, 디지털 시대의 미술작품을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본다. 그러고보니 이 스크린 역시 어떤 하나의 Viewfinder. 

이야기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 같다. 어쩌면, 자매를 둔 여성이라면, 조금은 더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경과 후경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 사이버 추도 페이지에서 경이 되뇌는 독백같은 것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중간중간에 놓인 영화들의 상징에 더욱 마음이 갔다. 물론 이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들이 있다. 중간중간에 살짝 삽입되는 에니메이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정경, 후경, 창, 온아....그러나 그 중에서도 디지털 시대의 어떤 은유들에 대해서 관심 간다. 단지 그것은 작품 곳곳에서 카메라, 네비게이션, 노트북, 휴대폰, PMP 등 디지털 기기들이 출몰하고, 그들이 그것을 켜고, 동영상을 띄우고, 찍고, 바라보고, 충전하고, 로드하고, 끄고 하는 장면들이 반복되어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전체는 어떤 사이버 세계, 디지털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영화들이 가지는 음울한 디스토피아들은 묘하게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묘하게 제거된 디스토피아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불안을 야기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기이한 장면은 사진기자 김박이 창을 카메라로 찍는 장면일 것이다. 현실에 창은 존재하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서 보면 창은 보이지 않는다. 김박은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이럴 때 무엇을 믿어야 할까. 옛날 사람들은 카메라를 믿는 대신, 자신의 눈을 믿었을 것이고, 카메라를 가리키며 귀신들린 기계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보다는 카메라를 믿는다. 예를 들어, TV나 영화에서 활용하는 몇 가지 장면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해 놓는 것, 또는 귀신의 형체가 찍혔다고 하는 몇몇의 사진들. 그러므로 현대적인 디지털 시대의 눈으로 보면, 사진기자 김박은 카메라를 들고 날쌔게 도망가거나,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보여요...' 그러나 사진기자 김박은 약간 갸우뚱거리다가 태연하게 창에게 다가간다. 왜냐하면 그는 검색엔진이니까. 검색엔진은 귀신 따위가 아니니까. 자신의 눈보다 디지털 기기를 더 믿는 거의 디지털화된 인간이 검색엔진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남자 창은 검색엔진일수도, 아닐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군대를 통해서 남자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디지털과 하나가 된, 그저 현재의 젊은 세대들을 상징하는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장면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내뱉는 여러 독백들은 마치 어떤 연관성이 없는, 혹은 논리가 없는 검색결과들을 줄줄이 내뱉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상한 모양의 파형들. 그것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물론 창(window)이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어쩌면 이 남강휴게소는 거대한 어떤 포털사이트와 같은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상주하는 검색엔진 창. 경은 말한다. 이 남강휴게소는 하나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이라고. 후경이라는 정보를 찾아 고속도로를 끊임없이 내달리는, 아니 검색하는 여자 경도 휴식을 취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을 끊임없이 검색하며 내달리는 많은 디지털 유목민들에게도 휴식을 취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른바 블로그 혹은 홈페이지 혹은 트위터 같은 것들. 현실 세계에서 인간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평생을 헤메이는 것처럼, 현실의 반영인 사이버 세계에서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를 끊임없이 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수많은 블로그와 홈페이지와 트위터들은 모여서 다시 어떤 거대한 네트워크, 혹은 포털사이트를 구축한다. 영화에는 그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가 또 하나 나온다. 여자 온아(On-我).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은 이름이 알려진 블로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디지털 분신 새아와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일하는 곳은 휴게소 정보센터. 고속도로의 지도들을 가지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정보의 중심이자 검색엔진이 충전을 하는 곳. 사이버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고, 동시에 현실은 사이버 세계를 반영한다.
................................

그러나, 검색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검색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이버 세계에서는 동시에 누군가의 존재를 알기(찾아내기) 위해서는 아이디가 필요하다. 아이디를 모르고서는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다. 경은 그녀의 동생 후경을 찾기 위해 아이디를 말한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이버 세계 어디에서도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그녀는 실종된 것일까. 창은 말한다. '실종자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그들을 실종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가버린 것이지 실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단지 가버린 것이지 실종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말은, 왠지 사이버 상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사이버 상에서 친절하게 댓글을 달고, 방명록을 남기고,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좋은 사람들은 다 실종된 것일까. 아니 단지 그들은 가버린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뿐이다. 아이디를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혹여 아이디를 안다해도, 그들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수 있다. 경과 후경의 경우를 창이 검색했을 때처럼, 어떤 검색결과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검색 결과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네티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네티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검색 결과도 찾지 못한 경 역시 사이버 추모 페이지에 엄마를 그리며 쓴다. 엄마가 죽은 후, 정말 모르겠다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도 아마도 자신들의 블로그에 이런 말들을 적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어떤 것을 검색하여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유영하는 인간들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 서정적인 디스토피아.

어떤 검색결과도 찾아내지 못하고,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망연하게 서 있는 경의 반대편에 후경이 있다. 그녀는 이제 온아가 있던 그 자리, 즉 남강휴게소의 정보센터 혹은 포털사이트의 정보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정보의 중심에서, 온아와 비슷하게 어디론가로 떠날 꿈을 꾸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나는 마지막에 궁금해질 뿐이다. 지금 후경이 있는 그곳에 있던, 꿈을 찾아 어디론가로 떠나기를 원하던, 온아와 그녀의 아바타 새아는 어디로갔을까. 그녀는 정말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갔을까. 그녀는 갑자기 어디로 실종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 시사회의 좋은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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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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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짦은 문구이긴 하지만, 책 표지의 소개는 꽤나 강렬하다.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닌다. 사람들은 나를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  
   

그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 우리의 몸,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되는가. (p.7)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책은 보통의 에세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골형성부전증에 걸려, 휠체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저자. 그가 갇혀 있던 조그만 세상에서 벗어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모습. 이 몇 가지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의 가슴아픈, 그러나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생승리의 이야기로구나. 장애인도 저렇게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어. 우리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라는 긍정적이지만, 조금은 지루한 추측.

그러나 저자는 선언한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고. 그리고 저자의 그 도발적인 선언답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저자가 시작하게 된 것은 분명, 자신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가 어떤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지면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할애한다. 그것은 저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떤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토로도 아니고, 어떤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아니며, 그 성취가 '희망의 증거'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는 도리어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책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그것도 아주 불투명한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보통의 장애인들의 인간승리 에세이나 혹은 젊은 친구들이 수능 만점을 받고, 혹은 미국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쓰는 에세이와는 거의 반대의 지점에 와 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내었다는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뜨거운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야한 장애인'이 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적인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장애인을 일단 사회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장애인들은 사회에 의해, 애써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시설을 통해서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호'라고 부르지만, 보호는 결국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을 사회와 분리시켜 가두는 것이다. 즉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장애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서 줄곧 주장하는 것은 장애의 사회적 관점,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자립 생활 운동(Independence Living Movement)'이다. 즉 더 이상 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나 학교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장애인을 위한 보조인력을 두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단순한 예를 들어 장애인이 지하철에 타려고 할 때, 아무리 보조 인력이 있다해도, 여전히 주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장애인에 대한 시혜없이, 이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연대'이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연대라니, 여기서 연대라는 용어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연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서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와 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장애인과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마찬가지로 연대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낮은 사람들과는 연대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하고만 못 하겠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사람과도 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우리와 연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대에는 여전히 어떤 벽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장애인으로서 결코,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자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있는 다른 장애인들(저자는 지적장애가 없는 것, 그리고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비교적 나은' 몸,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행운 등등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가 다른 장애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과 비장애인들과의 사회적 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들(장애인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사회의 물질적 계급과의 어떤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잘 사는 장애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일 수도 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저 그 벽은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자각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위에서도 잠깐 썼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생각이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았다는 점, 즉 그는 여전히 길 앞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일 뿐이라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결국 이 책은 해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 대답이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이 책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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