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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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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카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시켜 보면 재미있다. "하나님이라고도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겉모습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p.9)"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하나님과 카인)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고, 더 할 말은 없을 것이다.(p.207)"

      

그러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다시 한 번 강조해두건대 '소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 하나님은 본인이 행한 이전의 일로 인해 마지막에 카인과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셈이다. '하나님이라고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다른 임시변통을 찾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신의 혀를 아담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담의 아들 카인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말을? 하나님의 혀가 할 수 있는 말을,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말들을.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명백한 본인의 실수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겉모습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창조한 이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족했어야 했다. 굳이 그 겉모습에 말까지 부여해 화를 자초할 이유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의 90% 이상이 입에서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 몰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카인에게 되지도 않은 대꾸를 따박따박 들어야 했을 이유도, 바벨탑을 쌓은 이들의 말들을 모두 뒤바꾸어야 할 이유도,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한 가지 소득 정도는 얻을 수 있는 법이니, 그로 인해 하나님이 얻게 된 소득은 있다. 그것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자, 그러니까 창조주 아비를 꼭 닮은 자식 카인을 얻게 되었다는 점인데(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이야말로, 자신과 꼭 닮은 자식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카인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곧 카인이 아닌가 하는 되먹지 않은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카인이 벌이는 논쟁의 양상을 보면, 이 논쟁은 너무나도 합이 잘 맞는다. 무릇 어떤 논쟁이든, 논쟁이 이어지려면 논쟁을 벌이는 이들 사이에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 하나님과 카인 사이의 논쟁은 잘짜인 연극 대본처럼 손발이 딱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들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위에서 혼자서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논쟁을 벌일 말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혀를 밀어넣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담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처음 만들어진 작품은 어딘지모르게 허술한 법이고, 종자는 개량되는 법이니. 둘째, 소설 속에서 하나 신기한 점은 카인이 하나님이 벌이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빼놓지 않고 관람한다는 점인데, 카인은 모세와 여호수아, 아브라함과 이삭, 욥, 노아 등등의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난다. 소설 속에서 카인이 이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상당히 모호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서술되어 있는데(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카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귀가 자신을 데리고 과거의 많은 길들 가운데 한 곳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미래의 어떤 좁은 길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그저, 아주 단순하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새로운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p.146)"),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놓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곧 카인 자신으로서 이 모든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이 이야기에서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조금 따로 외따로 떨어져있는 듯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카인이 릴리스에게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창세기의 세계를 신나게 돌아다니던 카인은 나귀에게 이끌려 릴리스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카인은 릴리스에게 어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하는데, 그것에는 카인의 흥미로운 고백이 들어있다.

      

나는 카인이에요, 기억하죠, 동생을 죽이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중략) 하지만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략) 아우를 죽이고 이 침대에서 당신과 잔 것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나온 결과들이에요. 어떤 원인.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말입니다. (중략) 글쎄요, 내가 다시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렇게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한 과거에서 다른 과거로 뛰어다니는 일이 멈춘다면, 나는 흔히들 정상 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 겁니다, (p.155~156)

      

즉 카인은 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혹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마리오네뜨라는 것. 또한 카인은 여기서 다른 고백도 한다. "아니요, 내가 거기에 가 있었어요. 아무도 미래에 가 있을 수는 없어. 그럼 그걸 미래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죠, 다른 현재, 아니면 여러 다른 현재라고 부르죠 뭐. (중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p.153~154)" 미래를 미리 보는 이, 혹은 다른 현재, 여러 다른 현재에 동시에 가 있을 수 있는 이, 그가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겠는가? 물론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하고도,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이 카인에게 표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누구나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알고 있고, 그에게 얼마든지 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왜 그에게 표식을 주고, 그를 죽음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일까. 카인이 그 자신이 아니라면, 혹은 조금 덜 불경하게 말해서, 그가 그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제 정신으로 조금 돌아오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인이고, 이야기의 주된 얼개는 카인이 하나님의 이중성, 또는 악행, 모순들을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카인이 그렇다고 해서 의롭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이며, 아벨이 죽을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뿐인가. 그는 이후에 노아의 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그의 영혼은 비었다.("네, 당신은 내 영혼을 삼킨 적이 있지요.(p.207)") 그는 하나님의 이중성과 악행과 모순을 고발하지만, 그 역시 악행으로 점철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묘한 데칼코마니이다. 악행과 모순으로 얼룩진 이들. 카인은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꼭 닮은 자, 바로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심지어는 표식을 내린 하나님 자신에게마저도. 여기에 이 소설의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참 무지하게 강조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살인자, 아니 연쇄살인마, 혹은 실은 자신을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을 죽였어야했던 자,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자, 카인의 후손이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보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과 꼭 닯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자들, 심각한 모순 속에 빠진 자들, 그래서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영혼을 내어맡긴 나약한 자들.

    

 

덧.

그렇게 유쾌한 독서는 아니었다. 사실 <카인>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적인 것과 분리하여,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자체로만 보아도, 조금 이야기들의 얼개가 많이 헐거운 것이 아닌가, 그 비판이나 풍자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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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5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6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9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9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3-0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맥거핀님이 언제 리뷰 썼지? :)

맥거핀 2016-03-02 15:37   좋아요 0 | URL
쓰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쓴 리뷰라, 내용이 지금봐도 참 부실하군요..<그들>도 리뷰 써야 하는데..

아이리시스 2016-03-02 15:48   좋아요 0 | URL
재미없었죠? <그들>도 그렇고 둘다 리뷰를 부르는 스탈은 아닌거 같아요. 맥거핀님 리뷰는 역시 조목조목 참 좋아요^^

맥거핀 2016-03-03 12:22   좋아요 0 | URL
재미가 없다기 보다는 아이리시스님 말대로, 리뷰를 부르는 스탈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요새 책 진짜 잘 안 읽히네요..읽을 것 많은데..

아이리시스 2016-03-03 12:26   좋아요 0 | URL
저는 맘이 어수선해서 그래요. 저는 안그래도 대표님?이물러나서 맨날 마음이 무거웠는데.. 맥거핀님은 왜그래요? 저도 일주일째 읽은책이 거의 없어요..

맥거핀 2016-03-04 16:01   좋아요 0 | URL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위의 글로 대신합니다. :)

2016-03-04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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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160~161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 책 머리에서

      

헤닝 만켈의 <불안한 낙원>은 여러 결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같다. 한 여성 자아의 성장, 혹은 진정한 사랑찾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아프리카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더 여성적인 관점을 포함한, 다시 말해서 주인공 한나와 그의 어머니 엘린, 그리고 베르타, 백인 남성과 결혼한 흑인 여성 이사벨, 펠리시아를 비롯한 매음굴 여성들, 테레사 등등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혹시 더 나아가면 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는 어떤 비유와 은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읽으면서 계속 느낀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실체를 가진 무엇이라기보다는 단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어떤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 해닝 만켈은 책 뒤의 후기에서 이 이야기가 실제의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어쩌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즉 20세기 초반의 스웨덴과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즉 그만큼 나의 지식과 상상력이 협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은데, 위의 인용문에 나오듯, 한나가 어쩌다 머물게 된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로우렌소 마르케스(현재의 모잠비크)에서는 흑인과 백인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한다. 흑인들은 백인이 가진 공권력과 폭력을 두려워하며, 백인들은 흑인들 내부에 오랜 억압으로 응축되어 있는 분노를 두려워한다. (그것을 한나의 표현대로 '그들의 숫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안에 응축된 분노의 수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다만 (위의 인용문에도 있듯이) 백인들은 그것을 가면과 위선 속에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백인들이 '흑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나,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의술, 주술 등을 미개한 것이라고 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것에 대한 꺼림 속에는 사실 은밀한 두려움이 늘 내재해 있는 법이니 말이다.) 백인들은 백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소위 문명화된 공간이 있으며, 흑인들은 또 백인이 더럽고 위험하다며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나름의 공간이 있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백인들과 흑인들은 같은 벤치에 앉지 못한다. 백인들이 앉아있을 때는 흑인들은 서 있어야 한다.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도 이것이었다.) 그것이 그곳의 법칙이다.

 

그런 법칙이 예외가 되는 공간이 있다. 한나가 머물고 있는, 그리고 어느 틈에 한나의 것이 된 세뇨르 바즈의 매음굴. 그곳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같이 한 공간에 머물며, 같이 잠자리에 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에게 돈을 주고 그 댓가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물론 사실 이것은 '법칙의 예외'라고 보기 힘들며, 일종의 역설이다. 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매음굴이라는 어떤 아이러니. 그래서 어쩌면 한나는 그곳이 매음굴임을 알면서도 그 곳에서 떠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나가 처음 이곳에 투숙하게 된 것은 그곳이 단순한 호텔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한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이 곳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곳이 흑인 여성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혹은 위선적인 백인사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외부의 공간을 불편하게 생각하며, 매음굴에 가득한 흑인 여성들 사이에서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나는 그곳을 그렇게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불안한 낙원. 여자들이 자카란다 나무 아래 앉아있고, 제가 피아노로 돌아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율을 계속하며, 침팬지 카를루스가 붉은 소파에 앉아 입술을 요란하게 두드려가며 오렌지를 먹는 곳.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곳은 낙원은 낙원이되, '불안한' 낙원이라는 점. 그 곳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것은 그 뒤에 붙여진 이야기들이 말해준다. 매음굴 가운데에 있는 자카란다 나무 밑이 사실은 수많은 아기들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 매음굴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두 흑백혼혈일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아이들이 그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혔다. 아이들은 추악하지 않지만, 그 아이들을 그렇게 잉태시킨 수많은 백인들은 추악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위선과 기만과 폭력의 산물들이 그렇게 감히 '낙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매음굴 아래에 묻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 매음굴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은 수많은 식민지에 온갖 거짓과 폭력과 위선을 행했으며,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그들이 잉태한 추악한 부분들을 기꺼이 그 땅 속에 깊숙이 묻었다. 열대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그들이 처음에 '낙원'이라고 불렀던 그 땅에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매음굴은 일종의 식민지 아프리카라는 공간의 상징이며, 동시에 어떤 경계선이다. 많은 것들이 그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경계에 섰을 때만이 볼 수 있다. 한나가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백인 사회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면 그녀는 아마도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대신에 불안한 낙원, 흑백 혼혈아기들이 묻힌 이곳에 있는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서 다른 어떤 것들을 보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주신 이름, 한나 렌스트룀에서 선상요리사 한나 룬드마르크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매음굴을 운영하는 세뇨라 바즈에서 이제 다시 스스로 선택한 이름, 아나 브랑카로. 이 이름들의 변화는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에서 이제 스스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인공의 변화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이 여성이 계속 서 있던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위치의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타인에 의해서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든, 혹은 어떤 우연의 결과물이든 간에 그녀는 항상 경계에 서 있었다. 강력한 추위가 지배하던 땅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녀는 이제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아닌,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위의 플라톤의 말)이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흑과 백의 경계선에 서 있는 매음굴의 여주인에서 다시 더 나아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의 경계선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녀는 기만과 위선이 존재하는 백인 사회에서 매음굴의 백인 여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떨어져 나와있지만, 본인 스스로, 남편을 죽인 흑인여자를 구명하려 함으로써 그 사회와 더욱 확실하게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흑인 여성들 사이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와 매음굴의 흑인 여성들 사이에는 여전히 (침묵이라는) 경계가 남아있으며, 그녀는 그 경계선 위에 위태롭게, 혹은 불안하게 서 있다. 침팬지 원숭이 카를루스처럼. 어쩌면 그녀가 침팬지 카를루스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그것도 어떤 경계선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침팬지. 숲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사회에 너무 깊숙이 동화되어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침팬지. 그리고 하늘에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땅에 있을 수도 없는, 땅 위의 나무에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침팬지. 

 

하지만 땅에 닿는 순간 카를루스는 마치 발을 데기나 한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코를 킁킁대더니 잽싸게 문밖으로 나갔다.  

한나는 놀라 카를루스를 바라보았다. 왜 나무 아래 땅바닥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카를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 옆에 앉아 차창 밖의 해풍이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p.216

 

그러므로 이 책의 결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경계 근처에 온 사람, 혹은 경계에 서 있는 사람만이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고 그 경계를 넘어 탈주할 것을 소망할 수 있으니. 사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추운 겨울 나무벽 사이로 꿈틀거리던 냉기가 느껴졌던 그 때부터 그 경계 너머의 삶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행복했기를 빈다. 경계 너머의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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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1-2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불안한 낙원이다^^

맥거핀 2016-01-22 00:28   좋아요 0 | URL
썼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 읽고 나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잘 정리가 안되는 소설이었습니다. 느낌이 독특했어요. 그런데 아무튼 좋았습니다.^^

2016-01-27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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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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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책들(<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에서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대화체나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는 것, 그리고 그에 더 나아가 소설 전체를 누군가가 말하는 구어체의 진술로 구성하는 것(<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난 계나라는 인물의 편지형식이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자의 구어체 진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댓글부대>의 한 축은 찻탓캇과 기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그대로 수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혹은 되도록 내용을 짤막히 분절시키면서 동시에 전체 내용을 줄이는 것(<한국이 싫어서> 204쪽,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88쪽, <댓글부대> 247쪽) 등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 전략들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목표란 (작가 본인도 인터뷰 등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떻게든 읽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 전략은 실제로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나는 ('전략'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단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사실 다른 작가들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단지 이런 형식적인 면 때문에 장강명의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부당한 말이 될 것이다. 

 

<댓글부대>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재미는 소설의 한 축, 그러니까 팀-알렙의 멤버들이 '합포회'라는 어떤 비밀조직의 지시를 받고 벌이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이렇게 뭉뚱그려서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복잡하지만, 편의상)의 생생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벌이는 교란 작전들은 실제 우리가 온라인에서 보고 있는 여러 행태들과 시종일관 교차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있으리라는, 그 배후에는 권력과 결탁된(혹은 권력 그 자체인) 어떤 거대한 조직이 꾸미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익히 하게 만든다. 그것이 실제이건 아니건, 소설의 핵심 중에 하나는 우리 상상력의 지표를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교란 작전이 벌이는 상상력의 교란이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이 소설의 나머지 한축과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결합이 작가의 미숙이건, 혹은 고의이건, 나는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떤 이상함을 느꼈고, 그것을 여기에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팀-알렙의 멤버인 찻탓캇과 기자가 벌이는 인터뷰 녹취록이 보여주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의 전말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런 팀-알렙과 '합포회'라는 비밀 조직과의 오프라인 커넥션이다. 그리고 이 내용의 상당수는 그들이 각종 유흥업소에서 벌이는 향락에 대한 세밀한 묘사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예를 들어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들며 살아가는 시모니니(어쩌면 이것을 그 당시의 '온라인 교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탐욕스러운 행동이나 그의 식탐에 대한 묘사를 병행하며 그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소설 <댓글부대>는 온라인 교란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교란 작전을 벌이는 주체들이 벌이는 향락을 묘사하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물론 이 묘사가 적절한가, 즉 그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들은 시모니니나 팀-알렙이 구사하는 바로 그 전략을 역이용한다. 시모니니는 소설의 서두에서 위조문서를 만들 때 가장 좋은 전략 중의 하나는 그 문서를 읽게 되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혐오감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에코는 교묘하게 바로 그렇게 말하는 시모니니에 대한 혐오감을 읽는 이들이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댓글부대>에서 팀-알렙이 구사하는 주요한 전략 중의 하나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혐오와 분노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책 3장의 제목은 (작가가 괴벨스의 어록이라고 떠돌아 다니는 문서에서 따왔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이다.) 

 

나는 사실 이것이 조금 미심쩍다. 바로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그 전략을 다시 자신의 소설에서 비슷하게 구사하는 것 말이다. 에코의 소설과 이 소설이 다른 것은, 에코의 소설은 그것이 단지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위조 문서처럼 보이게 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에코는 시모니니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기술하며, 동시에 그것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여, 독자들 스스로 그럼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의 많은 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에코가 소설로 구사하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강명 작가의 이 소설은 다르다. 그들이 벌이는 향락이라는 나머지 한 축에는 그런 장치가 없으며, 이 축에는 결국 읽는 이의 어떤 혐오,(혹은 그것이 잘못 작동했다면 어떤 동경)만이 남는다. 이런 모순화법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거칠게 말한다면) 혐오가 잘못된 것이라 말하면서, 은연중에 누군가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 누군가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적으로 말하는 것, 또는 누군가의 거짓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리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건너 뛰시는 것이 좋겠다. 큰 스포가 들어있으니.) 다른 경우를 여기에서 같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다보니 영화 <내부자들>을 일반판과 감독판 모두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일반판이든 극장판이든 동일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안상구(이병헌)의 기자회견 장면을 영화의 시작부분에 배치하고, 다시 플래시백되어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점인데, 사실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굳이 이 장면이 앞에 나온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그것이 결국 이 장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을 뒤의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기자회견과 대비시켜 그 장면의 함의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대비는 결국 말하는 이의 차이에 있다.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풍경도 같고, 말하는 이가 주장하는 내용도 같지만, 여론은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나온 거대신문사 이강희 주간의 말대로 "누가 깡패새끼 말을 믿겠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동시에 "대중은 개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 혹은 그가 우장훈 검사 앞에서 벌이는 이상한 논리의 언변과도 통한다. 즉 같은 사건이고, 같은 팩트라도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어떠어떠하다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떠어떠하다고 보여진다" 혹은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대중이라는 존재가 매우 휘두르기 쉬운 존재라고, 혹은 개돼지라고 믿고 있는 그의 생각과 통한다. (감독판에서는 이것으로 모자랐는지 뒤에 이강희의 이런 논리를 다시 에필로그 식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는 대중,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들은 바보라고. 그러니 저런 인물들이 거대신문사 논설주간이 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바로 저런 인물이 대통령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안상구의 기자회견을 앞으로 빼서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과 대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에서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은 별장 성접대 동영상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지 않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해보인다. 그렇게 성접대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에게 뿌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사실 대중을 바보로 보는 것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거짓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은 거대언론의 어떤 여론몰이와 그렇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내용의 진실여부와 별개로 그 즉각적인 반응과 태세전환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기에 더 나간다면 그 영상에서 접대여성들의 얼굴도 모자이크하지 않는 무신경함과 조상무를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진 결말의 어떤 미심쩍음 같은 것도 말할 수 있겠지만, 뭐 이 글은 <내부자들> 리뷰가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의심들을 이런 질문으로 바꿔보자. <내부자들>은 바로 당신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대중들이 바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바보를 다시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한다. 과연 이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이렇게, 그러니까 나는 바보니까 앞으로는 여론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식으로 작동하게 될까. 그보다는 어쩌면 조금 다른 식으로, 그러니까 똑똑한 나는 그렇지 않지만, 바보 대중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떤 분노에 가닿아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당신들이 바로 그 대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똑똑한 대중들은 그들과 자신을 선을 긋는다. 아니, 나는 아냐, 그런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그들도 사실은 우리들이 선을 긋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네가 바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너는 아니지만 바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당연히 더 쉽게 먹힌다.)

 

나는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상에 존재하는 혐오를 증폭시키는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장강명의 이 책은 책 말미의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평'대로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를 소망하게"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다른 방식의 다른 혐오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덧.  

정의를 말하는 영화들, 혹은 정의를 말하는 문학들이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의 반증일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나온 영화만 해도, 정의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수없이 많은 괴물들. 그 괴물들은 차례로 영화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괴물들은 점점 늘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이 쓰러지는 것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쩌면 괴물에 맞서기 위해서 점점 괴물에 가까이 가고 있지는 않을까. 괴물이 되기를 은연 중에 소망하면서.

 

혐오와 동경은 늘 가까이에 있으며, 그 대상은 종종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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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1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이 되기를 은연중에 소망하면서... ㅠㅠ
그러니 내가 괴물이 되고 있는건 아닌지 늘 잘 살펴야겠어요. 정확한 지적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11 17:59   좋아요 0 | URL
괴물이 되기를 처음부터 소망하던 이들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어느 틈엔가 괴물이 되었겠죠. 저 역시도 가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있게 얘기하기 힘들어요.

2016-01-10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1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1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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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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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소설의 화자 그러니까 '나',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이 살고 있는 헌드레즈홀을 처음 보았을 때의 회상. 엠파이어 데이 기념일에 헌드레즈홀에 가서 에어즈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대령에게 기념 메달을 받고, 예전 유모로 일하던 어머니가 몰래 챙겨준 케이크의 설탕과자 장식과 젤리를 에어즈가 전용 식기장에서 꺼낸 은스푼으로 먹던 기억, 그리고 벽에 붙은 회반죽으로 만든 도토리 모양 장식을 주머니칼로 몰래 떼내가지고 온 일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로 점프한다. 의사가 된 패러데이는 에어즈가에 단 한명 남은 하녀 베티가 아파서 왕진을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헌드레즈홀에 방문하게 된다. 화자, 혹은 작가의 관심은 이 사건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 같다. 균열되고 푹 꺼진 저택의 테라스, 관리하지 못해 엉망이 되어버린 정원, 막힌 배수관에서 나는 악취, 제멋대로 자란 꽃에 뒤덮인 난간, 덧창이 내려진 창문들, 휑뎅그렁하고 낡아버린 집안 곳곳의 풍경. 작가는 닥터 패러데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제된 화려한 헌드레즈홀과 이제는 낡아서 거의 형체만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쇠락해가는 헌드레즈홀을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로 효과적으로 대조시킨다. 집에 대한 묘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솜씨 좋게 무대를 부드럽게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다. 닥터 패러데이의 병원을 겸한 살림집, 일층에 상담실과 진료실, 대기실이 있고, 침실은 다락에 있는, 예전 그의 스승에게 물려받은 낡은 집. 누리끼리한 벽과 '빗살무늬' 페인트칠이 전부인 우중충한 인테리어가 전부인 혼자 사는 의사의 집. 열기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좁은 다락방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닥터 패러데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다락방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전등을 끄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침대 위에 흩어진 사진과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털썩 누웠다. 창문은 커튼이 걷힌 채 열려 있었다. 달 없는 밤에 여름의 껄끄러운 어둠이 내려앉았고, 미묘한 움직임과 소리가 웅성거렸다. 나는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날의 기이한 잔상이었는지 헌드레즈홀이 보였다. 그 서늘하고 향기로운 공간이, 잔에 든 와인 같던 빛이 보였다. 나는 그 공간에 있을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베티는 자기 방에 있을 테고, 에어즈 부인과 캐럴라인은 그들 방에, 로더릭은 그의 방에......  

나는 그렇게 눈을 멀거니 뜨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누워 있었고, 담배는 서서히 타들어가며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었다.   

- p.65~66, 1장의 마지막 문단.  

      

이 공간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공간 그 자체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인물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것은 2차대전 직후의 영국이다. 전쟁이 가져온 여러 영향들로 모든 물자들은 모자랐고, 지주와 귀족들은 몰락해가고 있었으며, 전쟁 직후에 집권한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로 그 몰락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헌드레즈홀이 몰락한 것처럼 이제 에어즈 가문도 거의 몰락했다. 패러데이가 처음 방문하던 날, 에어즈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장남 로더릭은 쇠락해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건사하려 애쓰지만,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이고, 그의 누나 캐럴라인은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는 동시에 하녀처럼 집안일을 하며, 에어즈 부인은 애써 그런 모습을 감추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모습은 '마님'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패러데이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하여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되어 에어즈가에 거의 주치의처럼 드나드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의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다. 에어즈 가문 사람들과 패러데이의 첫만남, 그리고 그가 에어즈가에서 주최한 파티에 다른 초대받은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을 때의 묘사를 보면 그가 처한 위치가 잘 드러난다. 그는 에어즈 가문과 동등한 위치는 커녕, 젠트리(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유민)와도 그 위치가 다르다. 파티에 참석한 베이커하이드 부부나, 데즈먼드 부부, 로시터 부부 등의 인둘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서 그를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에서 자라난 단지 '의사 선생'이었고, 파티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좁은 집에서 그보다 좁은 다락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화려한 저택과 이제 쇠락해가는 저택, 그리고 닥터 패러데이의 초라한 병원 겸용 살림집에 대한 대비적인 묘사는 그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비하며 말해준다. 헌드레즈홀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쇠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초라한 패러데이의 집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이제는 같은 티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위치라고는 해도, 그것은 겉보기의 모습일 뿐 그 차이는 여전히 크게 남아있다.

 

그래서 어쩌면 패러데이는 그 집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서두에서 인상적인 것은 묘사의 대비이기도 하지만,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 집에서 회반죽으로 된 도토리장식을 처음 떼어내 오던 날부터. 그리고 그의 욕망은 헌드레즈홀이 완전히 쇠락했음을 확인한 지금에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헌드레즈홀의 화려함이 아니라, 헌드레즈홀 그 자체, 그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계급성이니까 말이다. 그런 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의사 선생'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포가 아닐까. 늘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녀석, 그러니까 우리를 사로잡는 그 익숙한 공포 말이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다른 것을 욕망하다가 죽는다.)

 

서두 외에 두 가지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나는 몰락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에어즈가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판 헌드레즈홀 주변의 땅에 들어서는 대규모의 주택 단지를 바라보는 패러데이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에는 쇠락한 헌드레즈홀을 돌아볼 때의 연민과 달리 어떤 경멸들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 여기에서 그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자 학창시절의 동무, 그러나 이제는 공사장 인부와 '의사 선생'으로 차이가 벌어진 이를 만난다. 그는 어색하게 '의사 선생님'이라고 칭하며 목례를 하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른 하나는 그 마지막 밤에 사건들이 벌어지기 전, 그에게 닥친 또하나의 다른 사건이다. 그가 찾아간 맹장이 터진 '무단거주자' 가난한 남자의 이야기. "순간 나는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거절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힐끔 안을 들여다봤는데, 바닥이 매트리스와 잠자는 몸뚱이로 난장판이었다. 어른, 아이, 개, 그리고 아직 눈도 안 뜬 강아지까지 꼼지락댔다.(p.669)" 그는 여기에서 무엇을 봤을까, 아니 왜 이 이야기는 하필이면 여기 이 시점, 그러니까 그가 저택 근처로 가기 직전에 들어가 있을까. 그는 여기에서 어떤 공포를 봤을까. 그 자신이 '무단거주자'가 되어 그 한복판에서 몸을 뉘이고 있는 환상을 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환상이 가져다 준 공포가 그에게 무엇을 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엇을 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어쩌면 그는 쇠락해져가는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라 워터스의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가 보여주는 이상한 방식의 동일시이다. 화자인 패러데이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마치 우리가 실제로 헌드레즈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곳곳에 대해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묘사가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는 특별한 사건이 없거나, 기분이 좋을 때에는 이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마치 그를 반기는 듯했다,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반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같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을 의혹과 공포가 가득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묘사한다. "아무리 조그만 소리나 움직임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가 정원 안에 우리와 함께 있는 듯한, 뭔가가 뽀득뽀득 새하얀 눈을 밟고 서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고약한 것은 그것이, 그게 무엇이든 어쩐지 낯익은 듯한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p.560)" 그는 단지 그의 감정을 헌드레즈홀이라는 저택에 투사한 것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 집 자체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이미 그 집 자체는 아니었을까. 그 집은 물론 귀신들린 집이니까.

 

(이 부분부터는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읽지 마시길.)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 사실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닳고 닳은 소재이다. 당장 기억나는 영화들만 해도 <샤이닝>, <컨저링>, <디 아더스>, <헌티드 힐>, <아미티빌 호러>, <폴터가이스트>, <파라노말 액티비티> 등등 한 두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귀신들린 집'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어떤 반전을 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믿기지 않는 현상'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른한 익숙함을 안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에는 그 익숙함을 뒤집는 한 방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때로는 그 한 방이 얼마나 묵직한가에 따라서 이 이야기는 걸작이 되거나, 범작이 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디 아더스>가 줬던 그 묵직한 충격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를 그런 방면에서 보자면 반복되는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와 그것에 가미된 한방은 사실 꽤 밋밋하다. 한방은 커녕 시드시들한 잽도 못된다. (옮긴이는 이 소설을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비유했던데, 사실 이 소설은 애크로이드 씨의 이야기와는 꽤 다른 것 같다. 적어도 크리스티의 '닥터 세퍼드'가 그 안에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사이에 밑줄을 그어보라며 충고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패러데이의 말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이 반전(아닌 반전)은 의미가 없어지며,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소설 속의 모든 것 중에 사실 믿을 만한 것은 없어진다. - 그래서 그의 이름이 패러독스, 아니 패러데이인가? 사실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패러데이의 법칙'에 나오는 패러데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그런데 말이다. 혹시 모든 것이 거짓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면 도대체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시들시들한 잽으로 실망하는 대신에 다른 것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패러데이, 그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공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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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11-1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드린 날보다도 조금 더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이리시스 2015-11-18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어요. 계속 디아더스처럼 끝날까 우려했던 것 같은데, 결말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진 않고요. 아..자다께서.. 담부터 늦지마요 맥거핀님 리뷰 기다리다 목빠지는줄 알았네😌😌😌 사도 리뷰도 좋구요 파묻힌 거인도... 엄청 좋아요. 여러모로 해석이 필요한 작품인데 그 해석이 독창적이기도 어려울 듯한..데 맥거핀님 리뷰읽으며 다시 정리하는 느낌이 들어요. 안녕. 굳나잇.

맥거핀 2015-11-20 21:52   좋아요 0 | URL
글도 늦었는데, 답글도 늦었네요.ㅠㅠ 저는 그 반전(?)을 빼놓고는 괜찮게 봤어요. 그런데 그 반전이, 혹은 어떤 장치가 너무 생각보다 밋밋해서 어떤 중후반부 까지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느낌이었습니다. 차라리 폴터가이스트 자체의 공포를 더 극단까지 밀어붙여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파묻힌 거인,도 괜찮았구요. 그 마지막은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리시스님 주말이 이제 눈앞에 있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2015-11-18 0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거인은 거기 파묻혀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언덕 위, 쐐기풀과 잡목림을 헤치고 올라야 하는 곳.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난데없이 나타난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올린 돌 무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낮은 지대에 있었다면 우리의 조상이 전쟁의 승리나 왕을 기념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397)

    

그곳은 용이 즐겨 먹이를 먹고 쉬는 곳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소설 <파묻힌 거인>의 주인공(이자 실질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화자라고 볼 수 있는) 늙은 액슬과 그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들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을 잃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니까.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습지 주변, 삐죽삐죽한 언덕 그림자가 드리워진 산비탈 굴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금새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며칠 지나지 않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더 기억을 잃기 전에 먼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런데 길을 떠나 다른 마을에 들러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도중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그들이 기억을 잃고 있는 이유가 높은 산에 있는 암용 케리그 때문임을 알게 된다. 마법에 걸린 용 케리그가 내뿜는 입김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기억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늙은 기사 가웨인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잃어 자신들을 버린 부모가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아이들이 키운, 독초를 먹은 염소를 힘겹게 끌고 거인의 돌무덤이 있는 언덕에 오른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용이, 독을 품은 염소를 먹고 쓰러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가지의 질문. 먼저 하나는 다시 처음 질문의 반복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망각의 입김을 내뿜도록 용에게 마법을 건 이는 위대한 아서 왕의 대마법사 멀린이었다. 전쟁을 끝낸 아서 왕이 우려한 것은 전쟁 기간 중에 일어난 학살과 살육,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오는 연쇄적인 복수의 칼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원했다.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아무 죄없는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에게까지 이루어진 살육과 약탈, 강간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필시 불러올 피의 복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암용 케리그는 망각을 수호하는 괴물이자, 망각 그 자체였고, 그 용이 편히 쉬고 있는 바닥에는 거대한 거인이 파묻혀 있었다. 거대한 거인,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거대한 기억 말이다. 

 

이것은 두 번째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은 늙은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에 대한 것이다. 왜 그들은 처음 마을을 떠날 때의 생각과는 달리 먼 곳에 사는 아들을 바로 만나러 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용을 처치하는 일에 끼어드는가? 가는 도중 이러저러한 일에 연루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용을 없애기로 마음 먹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선택, 혹은 단호한 결단처럼 보인다. 그것은 결국 작품에 가로질러 놓여 있는 이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기억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망각의 늪에 빠져 살면서도 그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떻게든 기억의 줄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망각이 불러오는 어떤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작품 안에 비유처럼 제시된 이야기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나게 된 뱃사공에게서 노부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 뱃사공은 바다를 건너 섬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 이때 (그들이 부부나 연인일지라도) 함께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이 함께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뱃사공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확인이란, 그들의 소중한 기억이 무엇인지 각자 따로따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기억에서 그들의 참된 관계가 드러나야만 그들은 함께 섬으로 건너갈 수 있으며, 그 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 물론 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여러 상징물들(<신곡>에서 죽음의 강 스틱스를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카론이라는 늙은 뱃사공)이 의미하는 대로 죽음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죽음 뒤에 있을 무(無)를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여러 종교에서 제시하는 내세를 믿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은 뒤에 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다시 만날 것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p.71)

 

다른 하나는 이 죽음 이후에도 이곳에 남겨질 이후의 세대와 관련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소설 <파묻힌 거인>에는 다양한 세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액슬과 비어트리스, 또는 기사 가웨인과 같이 나이 들어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세대, 혹은 전사 위스턴,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같은 중간 세대, 아니면 노부부와 윈스턴이 구해내는 에드윈과 같은 어린 세대 말이다. 에드윈을 제외하고, 이들 나이든 세대와 중간 세대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편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망각을 걷어내고 기억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이 두 갈래의 길은 다르다. 망각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무 속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를 두려움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살육과 폭력, 학살과 그것이 불러오는 복수를 잊게 만든다. 기억은 사랑하는 사람, 따스함을 안겨준 소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기억, 그들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기억을 떠올게 해 강력한 복수심에 불타게 만든다. 기사 가웨인과 전사 위스턴은 그 양 극단을 상징한다. 그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좋을 것이다. 이후의 세대, 그러니까 에드윈이나 혹은 (소설 속에 실체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그토록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혹은 아들과 같은 세대의 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전해줄 것인가.

 

물론 소설이 제시하는 길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결단대로 용 케리그를 죽이고 파묻힌 거인을 깨우는 것이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불러올지도 모를 복수의 거대한 피바람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에게 전사로서의 증오심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위스턴과 달리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처음 그들이 그랬던 대로) 마지막까지 그에게 사랑을 전해주려 애쓴다. "에드윈! 우리 둘 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줘. 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이 우정과 우리를 기억해줘." (p.450)

 

그렇게 그들은 이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간다. 소설의 마지막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어떤 아름다운 기억이나, 그들의 사랑을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그것에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들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마지막에서 이것을 묻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세대가 퇴장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과거에 대한 달콤함으로 포장된 망각이라는 흐리멍텅함인가, 복수나 증오의 대물림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때 필요한 또다른 무엇을 담은 것인가. 겹쳐서 보지 않으려 해도 현재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과 이 소설의 묵직한 질문이 자꾸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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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2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3 18: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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