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길>,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1999, 면회>에 대한 약간의 스포 있음)

 

 

최근에 본 영화들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수다성 잡담 혹은 잡담성 수다.

 

 

 

 

 

 

 

 

 

 

 

또 다른 길, 카롤리 마크, 야노스 크산투스, 1982

 

1957, 실질적으로 소련의 지배를 받는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배경으로 오직 자유를 꿈꿨던 한 레즈비언 기자의 이야기를 그린 카롤리 마크와 야노스 크산투스가 만든 헝가리 영화 <또 다른 길>은 두 가지의 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에바와 그 에바에게 이끌린 리비아의 사랑 이야기라는 감성적인 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종 검열과 거짓과 프로파간다와 억압이 존재하던 당시 헝가리의 분위기와 특히 언론인들의 진실된 보도를 향한 갈망이라는 이성적인 축. 헝가리 국민들은 스탈린의 충실한 개였던 지도자 라코시를 1956년의 봉기로 끌어내고, 잠깐 '부다페스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그해 11월 소련 지도부는 부다페스트로 전차를 진격시켰고, 새로 지도자가 된 임레 너지는 소련에 반기를 든 대가로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그런 1957년의 헝가리에서 자유로운 보도를 갈망하는 레즈비언 기자인 에바는 영화 속의 표현대로 허리 위에서나 허리 아래에서나 일종의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고, 그러므로 이 영화 속에서 이런 감성과 이성의 문제는 여기자 에바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을 일종의 정치적인 멜로라는 하나의 비유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이 에바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바이러스는,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군인 남편과 함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던 리비아, 그러니까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일반 국민들에게 침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에바와 함께 도피를 꿈꾸던 리비아는 결국 그 군인의 총탄을 받고 살아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이것은 다시 소련의 전차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의 상태를 하나의 비유로서 보여준다. 즉 헝가리의 국민들, 더 나아가 이 헝가리라는 하나의 나라는 존재하고 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련의 지배를 받는 일종의 괴뢰 국가와 마찬가지였던 대외적인 상태로서도 그렇고, 대내적으로도 당시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자유롭게 존재했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게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다. 그것을 영화 속 에바와 리비아가 취재하게 되는 협동농장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자발적인 농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고 선전된 협동 농장이 강요와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그들은 취재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듯이, 공산주의 사회는 혁명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혁명은 구호로서만 존재하였고, 혁명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되었다. 그러므로 그 혁명의 바이러스를 잔뜩 담고 있던 에바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냈던 많은 혁명가들이 그 공산주의 사회에 의해 제거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영화 속 후배 기자들의 갈망과 상부의 억압 속에서 고뇌하는 늙은 편집장과 관련된 일화. 이 편집장은 오래전 어떤 이유로, 아마도 뭔가 정부에 밉보일만한 기사들을 썼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사형 직전에 사형선고는 취소되었고, 그 사형집행인이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죽는 것보다는 농담이 낫잖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의 어떤 비인간성, 즉 아마 혹 그대로 죽었어도 그것은 그대로 농담으로만 치부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 다른 하나는 진실된 기사를 쓰지 말라고, 그 내용을 듣기 좋은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 실으라고 억압하는 상부의 사람에게 그 편집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 소년이 사소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갔다. 의사는 최면 요법을 통해 그 소년을 치료했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버릇은 놀랍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몇 달 후, 그 버릇은 사라졌지만 그 소년에게는 다른 증상이 생겼다. 바로 시도때도 없이 심한 경련을 하는 증상이. 그것은 비단 1957년의 헝가리의 경우만일까. (서울아트시네마)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존 무어, 2013

 

쇠락해가는 시리즈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전작들에게 엿을 먹이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 마지막 작품(그렇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조금 나았더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 상태로는 후사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강약, 중강약을 구사하던 전작들의 액션 리듬은 사라졌고(영화의 구조로서 가장 이상해보이는 점은 그나마 가장 매력적이고, 거대한 액션을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해놓고, 뒤에는 심심한 잔재주들로 채운다는 부분), 매력적인 악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아니, 알아서 자취를 감춰주신다. 존 맥클레인의 부루퉁한 유머는 약간은 살아있으나, 이제 그는 땀과 피에 절은 러닝셔츠를 입고 뛰기는 힘들어 보이고, 뜀박질은 그 대신 그의 차와 헬리콥터, 혹은 그의 아들이 대신해준다

 

가장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 영화가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4탄에서 맥클레인은 왜 이렇게 거대한 적에 맞서는지 그냥 도망가자는 제안에 대답한다. 이거는 귀찮고, 힘들고, 한 마디로 할 거 못되는 짜증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되는 거라고. 그게 바로 NYPD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었다. 아이, 정말 하기 싫어 죽겠네,가 얼굴에 가득 쓰여져 있지만(그는 항상 술이 약간 덜 깬듯한 얼굴이다), 그래도 그거 안하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니까 해야한다는 뭐 그런 닭살돋는 거.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이 <다이하드> 시리즈의 매력이기도 했다. 아니 고작 너 따위가 내 적수가 되냐는 식의 악당들의 태도, 그리고 그에 맞서는 마누라에게 구박당하고, 상관에게 욕먹는 존 맥클레인,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뛰고, 때로는 권총 한 자루로 맞서는 다른 경찰들. (좀 다른 얘기지만, 드라마 <24>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잭을 도와주던 스쳐 지나가던 어떤 여경찰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존 맥클레인은 그래도 그나마 최대한 시민의 피해를 줄이려 한다. 그것이 경찰의 임무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존 맥클레인은 3탄에서 어쩌다가 같이 임무에 뛰어든 제우스(사무엘 잭슨)가 공중전화를 오래 쓰는 여자에게 강제로 전화를 끊게 하자, 그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루퉁한 뉴욕경찰 존 맥클레인의 예의있는 매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맥클레인 씨, 이번에는 안면 하나 없는 러시아로 날아가고, 그 덕분에 이제 그는 뉴욕경찰이 아니라 자식새끼 건사하려 애쓰는 휴가나온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의 말마따나 잘 돌아갈 수 있는 작전을 이상하게 망가뜨리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달아나는 나쁜놈을 쫓기 위해 시민의 차를 빼앗으면서 그 시민에게 주먹질을 날리는 존 맥클레인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영화 속에서 볼 만한 순간들은 존 맥클레인이 나는 단지 휴가왔을 뿐이라며 징징댈 때와 루시 맥클레인이 특별출연할 때 뿐. 나는 루시 맥클레인으로 나오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이 배우 좋아한다우.

 

아무튼 맥클레인 씨, 지금까지 수고하셨고, 이제 그만 세 가족 함께 휴가 즐기세요. (CGV 대학로)

 

 

 

 

 

 

 

 

 

 

 

 

1999, 면회, 김태곤, 2013

 

그러니까 1999년에 두 친구가 한 친구의 군대 면회를 가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1999년이라는 시간과 '면회'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그 독특한 공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재수를 하고 있는 친구가 수능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아마도 98학번 세대이고, 이때는 1999년 초인 듯하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 당시 대학에 다녔던, 혹은 대학을 준비했던 젊은이들을 생각해 볼 때, 1997년은 전년의 통칭 '연대사태'와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으로 지도부 구속 및 잠적 등으로 이념이 위태로운 시기였고, 1998년은 1997년말 벌어진 소위 'IMF 사태'로 경제가 위태로운 시기였으며, 1999년은 9라는 숫자가 꽉찬, 그야말로 한 세기가 끝나는 혼돈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세기가 위태로운 시기였다. 우리는 그 이전에는 술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공동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으나, 1998년 이후로는 모두들 1차를 '간단히' 처리한 후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개별의 가상의 적을 맞이하였다. 모두들 2차를 가자고 할 용기는 없었고, 용기는 각자의 PC방 값과 집에 돌아갈 차비만큼만 주머니 속에 남아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오래된 적들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IMF라는 경제적 적은 뉴스에만 존재할 뿐 어디에서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테란이니, 저그니 하는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은 어떨까.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는 군인이 외박을 나와서 맞이하는 군대 주변의 공간들(위수 지역이 있으므로 먼 곳으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으니)은 참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곳은 군대의 울타리 밖에 있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군대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 곳에서는 백골부대 마크가 선명히 붙어있는 식당에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오바로크'를 칠 수도 있으며, 여전히 선임에게 조인트를 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군인들이 먹여살리는 그곳은 군대가 아님을 애써 항변하고 있지만(예를 들어 '서울다방' 혹은 '부산마트'라는 그 곳의 미스테리한 명칭의 간판들을 보라), 마치 군대의 거대한 일부처럼 보이고, 때로는 강원도 전체가 군대의 거대한 주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군대에 간 친구를 만나기 위해 향하는 두 (남자) 친구의 여정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부 미국영화에서 보이는 중서부의 드넓은 평원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그물처럼 보일 때처럼 말이다. 하룻밤의 여정을 다루는 이 <1999, 면회>는 그러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여정이 계속되는, 낯선 마을에서 일이 점점 꼬여가는 것처럼 보였던 <유턴>과 같은 영화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친구는 친구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철조망안에 되돌려놓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결국 세 친구는 그 곳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 가지씩을 잃어버린다. 대학생 친구는 동정을 잃었고, 재수생 친구는 카메라를 잃었고, 군인 친구는 사랑을 잃었다. 그 때는 그렇게 무엇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이건 허세고, 무엇인가를 잃어야 조금이라도 덜 찌질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잃었고, 때로는 기꺼이 버렸다. 그리고 그대신 기꺼이 우정을 얻었다, 라고 쓰고도 싶지만, 대신 그들은 그 이후에 이상한 것들을 얻었다. 그 이상한 것들을 얻게된 2013년의 남자들은 이제 떼를 쓴다. 차라리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까, 이 이상한 것들을 버릴테니, 제발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려달라고 애타게 울부짖는다. 그것이 어쩌면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1997>, 혹은 <1999, 면회> 등에 남아있는 밑바닥의 정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실제의 적이 보이지 않으니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들과의 싸움을 했었던 찌질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지금은 그런 찌질함마저 없어져버렸으니까, 찌질한 자는 콩알만큼이라도 염치가 있으니 찌질해지는 것이니까. 적어도 몰염치, 혹은 파렴치하지는 않으니까.

 

영화적으로 볼 때는 너무 도식적인, 있음직한 사건의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를 리얼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험에서 비추어진 리얼함인지, 혹은 들은 리얼함, 만들어진 리얼함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것이 리얼한 것이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리얼함이 아닐까.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불일치할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맞춰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조작되지 않은 과거의 나의 어떤 부분을 절실하게 끄집어내는 순간, 그것은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어려워보인다.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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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죽는 것보다는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하는 게 낫다는 얘기. 인상적이네요. 현실사회주의는 그 찬란한 이상과 현실 재현의 간극이 너무도 커서 진짜 차라리 농담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굿바이 레닌>이 왠지 생각나네요. 물론 다르지만..) 물론 얼굴에 철판을 깐 자본주의는 그런 간극은 없지만, 파국적 비극이지요.

2. 다이하드4 관람기 읽으니, 전작들의 매력이 도리어 확 다가오네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 피천득의 <인연>, 마지막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흐흐 근데 이 글 무척 재밌어요!

3. 1999, 면회 관람기. 무척 설득력 있는 글이에요.
무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고, 무언가를 기꺼이 잃으면서 대신 이상한 것을 얻었고, 그런 어른이 된 현재 차라리 무언가를 잃기 전의 찌질이가 되고 싶어한다. -맞는 말 같은데,, 이걸 영화 속에서 도식화하면 또 상투적이다, 이 또한 설득력 있어요. 사람들이 건축학개론과 응답하라1997의 회고주의를 비난했던 게 이런 부분 아닌가 싶네요. 상투적인 구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 과거를 포착할 때,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 그런데 이건 어려워 보인다." 이런 '인식'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이전의 김종관 글 인용과 통하는 면이 있구요.

맥거핀 2013-02-21 14:36   좋아요 0 | URL
장문의 댓글을 보니 좋군요.^^

공산주의 국가에서 어린시절부터 자라난 사람과 또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산권 국가의 작가들의 글이나, 그곳에서 만들어진 영화 등을 보면 어떤 인식 자체가 뼛속깊이 자본주의인 우리와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상을 꿈꿨던 사람들이 현실 공산주의 사회를 보고 또 한편으로 절망했던 부분들을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제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인 듯 합니다.

<1999, 면회>를 비롯한 예전으로의 타임머신을 보내는 작품들을 보면, 결국 중요한 질문은 '왜' 지금 90년대를 돌아보는가,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를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살펴봐야겠지요. 그저 좋았던 옛일..로 끝나는 것은 현재의 나를 기만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소위 '운동권 회고담'을 보는 불편한 시선 같은 것 말이죠.)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교묘하게 분리시키려는 시도들은 위험하죠.

<다이하드>는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존 맥클레인을 보고 싶지 맥클레인의 탈을 쓴 다른 인물이 나와서 하는 것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거든요. 아니면 루시 맥클레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하면...

최근에 1-2 사이에 관심있는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이더군요.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 박찬욱의 <스토커>, 박훈정의 <신세계>,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분노의 윤리학>이나 임순례 감독 영화도 관심이 있기는 한데..몇 편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일단 박찬욱의 <스토커>는 어떻게든 보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2013-02-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장문의 댓글'을 부르는 글을 쓰시니까. + 흠. '또 댓글'을 부르는 긴 답글이군요.

음. 그렇겠군요.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란 사람과 뼛속 깊이 다른 인간, 다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겠어요. (생각 못해 봤네요.) 그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전 동구권 감독 영화 본 거 두 편 정도 생각나는데(철의 사나이, 붉은 시편), 둘 다 그 적당한 예는 아닌 것 같고...

흠. 그러네효. 왜 지금 90년대인가,라는 질문이 더 핵심이겠어요. 근데 모든 복고주의는 뻔한 것 같아요. 현재에 대한 손쉬운 도피, 그때가 좋았어.. 라는 것. 그나저나 저야말로 엄청 회고적인 인간인데요. 복고와 회고는 다르지만, 여하튼 상투적인 건 모두 나빠요.ㅎ

루시 맥클레인 떔에 <다이하드4>를 보고 싶을 정도로 찬양하시는군요~. 하지만 그외 요소의 데미지가 너무 클 것 같아, 포기.ㅋㅋ

흠. 저도 당연히 라스트 스탠드, 스토커! 그리고 홍상수 신작은 아마 접근 불가로 못 볼 것이고. 분노의 윤리학은 시간 되면 보려고요... (되게 볼 것 같이 썼는데, 사실 요즘 영화 진짜 안 봐요. <베를린> 이전 본 게 한 달 전의 <파이 이야기>?!) 그리고 '남쪽~튀어'는 내일 예매해놨어요.

맥거핀 2013-02-22 14:37   좋아요 0 | URL
글쎄요..그런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저도 막상 물어보시니 뭐가 있을지..(말씀하신 두 영화는 모두 제목만 알아요.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뭐 꼭 어떤 영화의 내용같은 것 보다도, 러시아 문학, 러시아 영화,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나 최근의 알렉산더 소쿠로프 등에서 보이는 인간 본연의 탐구, 어떤 거대한 질문 같은 것을 보면,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러시아정교나 어떤 대륙적인 기질 외에도 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같은 것이 어떤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 영화나 지아장커의 다큐 등에서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볼 때의 어떤 이질적인 감정 같은 것도 말이죠.

저는 그 배우,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영화는 거의 챙겨봤거든요. 으하..너무 매력적이예요. 작년에 내한했었을 때 한 번 가볼까, 심각하게 고민을..루시 맥클레인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경찰이 되어 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네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예고편만 봐서는 그냥 예전 영화들의 재반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또 그안에서 무엇을 변주해낼지 궁금하구요. <스토커>나 <라스트 스탠드>는 감독 본연의 스타일을 헐리우드와 어떻게 혼합해냈을지..걱정반 기대반이고..<남쪽으로 튀어>는 제가 좋아할 스타일의 영화인 것 같은데, 일단 보고나서 감상 전해주세요. 평은 나쁘지 않던데..(근데 저도 생각보다 별로 못봐요.)

2013-02-2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미클로시 얀초의 <붉은 시편> 좋았어요.
흠 저는 모르는 배우네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남쪽으로 튀어>는 별로였어요. 모든 요소가 삐걱대는 느낌. 재미없어서 졸았어요. 임순례 감독은 영화를 못 만드는구나, 하고 혼자의 결론을 내렸어요. (데뷔작 <세 친구>도 호평에 비해 영화가 재미없었던 기억이..)

맥거핀 2013-02-25 21:17   좋아요 0 | URL
이런 답글이 늦었네요. 아마 얼굴 보시면 아..이 사람,하고 기억이 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기는 그렇게 탑스타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연기파라고 하기에도 뭣하죠.

아..그런가요. 저는 임순례 감독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인데. 감독으로서의 특유의 정서가 있어요, 임순례 감독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어떤 독특한 지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랄까요. 좀 덜 대중적인 면이 있기는 하죠. 특히 이번 영화는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삐걱거림도 있었으니 그런 면도 조금은 감안을 해야할 겁니다. 아무튼 그래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만한 게 그 이후로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3-03-1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위에 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맥거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앞선 다이하드 시리즈가 그랬구나.
존 맥클레인이 그런 캐릭터였구나 하고 되새겨 보았습니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가 누군지 검색해봤더니,
데쓰 푸르프에 나왔던 미녀로군요.
제가 본 건 그 영화 뿐인데 그 미모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로 시작해서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로 끝나는 부분,
정말 인상적이네요!
늘 느끼지만 맥거핀님 글 솜씨가 거의 예술입니다.
이렇게 잘 쓴 글을 얼마만에 읽어보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그 부분만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재밌는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3-13 16:38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여담입니다만, 글에는 그렇게 쓰기는 했지만, 그때 한창 '스타' 열풍이 불었는데, 사실 저는 '스타'를 잘 하지도 못하고, '스타'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늘 '피파'를 했었어요. 저는 당시에나 지금에나 늘 간단한 걸 좋아합니다. 골을 넣고 이긴다, 뭐 그런거요. 암튼 당시에 또하나 기억나는 건 그 수많았던 학교앞 비디오방들이 상당수 PC방들로 명함을 바꿔 달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 또 그 수많은 PC방들은 또다른 무엇이 되었습니다. 그 사라진 수많은 PC들과 그 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궁금하기는 합니다.

아..'데쓰 프루프'를 보셨군요. 네. 그 영화에 나와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최근의 '다이하드'에서 보니 그 때보다 몸이 좀 불었더군요. '데쓰 프루프'는 영화보다도 그 OST를 참 좋아합니다. 영화 개봉 후 몇 년인데, 아직까지 그 OST는 제 기계 안에 들어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