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류승완, 2013

 

 


(영화의 내용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액션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액션이 좋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액션'만' 좋아도 된다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액션 영화는 액션 영화이기 이전에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이 액션들은 액션이기는 하되 이야기로 이어지는 액션이어야만 하고, 2시간 동안 그것을 앉아서 볼 동력을 제공해주는 액션이어야 한다. 단절적인 액션만이 중요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2시간이라는 긴 시간으로 묶어서 영화로 볼 이유가 있는가. 상당수의 평들에서 지적하듯이 영화 <베를린>이 아쉬움을 주는 부분은 액션이 아니라, 액션 이외의 나머지 부분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많은 평들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는 북한 리학수 대사(이경영)의 대사가 잘 안들렸다, 발음이 좋지 않았다, 사투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발음이나 사투리가 아니라, 그것을 굳이 설명하는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설명을 특정전략으로 구사한다면 모를까, 대체로 이야기의 이러한 기본 구조를 한 인물의 대사로 풀어낸다는 것은 감독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낼 자신이 없거나(즉 이야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후적 처치이자 고백이거나), 혹은 사실은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류승완의 선택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려 할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잘 풀어내려 했지만, 그것에 실패한 것일까.

도리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좋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도리어 상당히 간결하다. 이 영화와 자주 비교되는 '본 씨리즈'의 핵심도 사실은 간단한, 그러니까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본 요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러니까 아이덴티티를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다. 그 주 플롯은 영화의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제시되며, 세부적인 다른 플롯은 본 요원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익스큐즈'된다. 즉 (영리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처음부터 관객은 본 요원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게 된다. 이 영화 <베를린>의 주 플롯은 뭘까. 처음에 얽혀 있는 여러 개의 플롯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 플롯은, 그러니까 일종의 주 플롯은 북한 내부의 권력 암투와 그것이 주독 북한 대사관의 요원들의 시효 만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 플롯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통상 액션 영화가 아니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가 쓰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베를린>은 액션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 같은데, 이상하게도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인 척 한다. 물론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에서 얻게 되는 쾌감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잃는 것은 캐릭터를 구체화할 시간이다. 영화의 중반부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과 남한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서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문제는 그게 서로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마저도 잘 모르게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이야기를 설명하느라 영화의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캐릭터를 구축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따라서 그럴 수록 캐릭터는 평면화된다. 한석규나 하정우가 좋은 배우들이고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하나, 그들에게 자주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관객 안에 구축시킬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다보니 관객은 그 캐릭터를 자기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들에게서 비슷한 과거의 캐릭터들을, 그러니까 한석규에게는 <쉬리>의 요원이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형사, 하정우에게는 <황해>의 조선족 남자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편으로 그 '중요하게 보이려는' 액션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액션 영화에서 액션의 합 못지 않게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액션을 행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액션을 하는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누가' 액션을 하는가이며 그 '누가'라는 캐릭터는 액션의 형태와 관객의 쾌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에게 바라는 액션과 <스카이 폴>의 '제임스 본드'에게 바라는 액션은 다르며, 그것은 그동안 충분히 구축된 캐릭터의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감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야기보다는 액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내내 비장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이 비장한 배경음악은 유독 액션씬이 등장할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에게 이 액션씬을 비장한 어떤 것으로, 예를 들어 오우삼 영화 속의 어떤 비장함처럼 보아주길 바라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캐릭터들이, 즉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는 그 쌍권총의 사나이들이 없으니 어쩌나. 즉 이상하게도 이 비장한 음악이 깔리는 액션씬들은 영화의 이야기들과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애써 설명하려던 이야기들은 이것이 사실 그저 소모품 버리기임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사실적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액션씬에서 이것은 갑자기 비장한 생존투쟁이 된다. 지금까지 이 생존투쟁이 비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애써 설명한 다음, 다시 그것이 비장하게 등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차피 많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브릿지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 된다. 그러므로 이 필요 이상의 많은 이야기가 붙은 이 이야기에서 남는 것은 잉여적인 몇 가지의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스파이 첩보 영화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베를린이라는 분단의 상징과 같은 도시를 배경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을까. 아니 어쩌면 (사실은 아니지만) 남북한이 얽힌 복잡한 스파이 영화인 척 하는 것, 바로 이것에 정성일의 말대로 무의식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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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3-02-0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당거래의 연속선상에서 이 영화를 봤어요. 권력 때문에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캐릭터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어요. 영화는 짧고 담을 이야기는 많기 때문에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지는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이야기를 간소화하자니 애초의 의도를 못살릴 것 같고.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저는 그게 과히 나쁘지 않았어요.

맥거핀 2013-02-07 01:0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부당거래>와 연관지어보면 조직과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생존투쟁 같은 측면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는 <부당거래>와 장르적인 위치가 좀 다르니까요. 장르가 다르면 어느정도 접근방식이 달라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류승완 감독이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다고 생각해요. 제작사나 투자사의 입김인지도 모르지만, 휘뚜루마뚜루 해치우려는 느낌이랄까. 저는 류승완 감독이 잘하는 걸 좀 더 살리면 좋을 것 같아요. 잘하는 게 커지면 못하는 건 자연히 줄어들어 보이게 마련이죠.

Arch 2013-02-07 09:36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봤는데요. 분명히 괜찮은 소재인데 너무 뻔하게 풀어낸게 안타까웠어요.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은 아쉬움이 막 남더라구요. 분명히 베를린도 그런 아쉬움이 남는데 저는 그냥 류승완 감독이라니까 그래도 괜찮다가 돼버렸어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감독은 잘 모르지만 베를린의 감독은 잘 안다, 이런거? 좋은 선입관은 아니죠.

휘뚜루마뚜루는 처음 들어본 말인데 막 활용하고 싶어요. 이 말의 연관검색어는 하춘화이던데요.


맥거핀 2013-02-07 14:30   좋아요 0 | URL
아..저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어요. 뭐 거의 내용을 다 보여줘서 안 봐도 될 정도.

하춘화씨 최근 발표곡이죠, 아마? 하춘화 씨 얘기하니까 갑자기 한가지 일이 떠오르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냥 적어볼께요. 제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를 했거든요. 장교들은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데, 하루는 한 병사가 오더니, 오늘 하루만 밤에 TV볼 게 있는데 여기 당직사관실에서 보면 안되겠냐고 간청하는거예요.(원래 병들은 10시 이후에는 취침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게 도대체 뭔데?,그랬더니 하춘화 디너쇼라고 자기는 하춘화 팬이라는거예요. 한 21살이나 22살 정도 되었을까 한 친구가, 소녀시대도 아니고 하춘화라니..이게 뭔가 싶어서 벙쪘죠. 벙쪄서 그래 뭐 봐라, 하고 틀어줬더니 신나서 열심히 보더군요. 막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그 친구와 그 밤에 하춘화 디너쇼를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로 구라 아니고, 그냥 하춘화 얘기하시니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어요. 하춘화 좋아하던 그 친구는 잘 살고 있는지...

Mephistopheles 2013-02-07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짝패 이후에는 본것이 없다보니 (아 다찌마와 리 빼고) 뭐라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간간히 그냥 아무생각없이 봐도 무방한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가 가장 류승완다운 영화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맥거핀 2013-02-07 14:33   좋아요 0 | URL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야 말로 아이러니하게도 류승완의 어떤 작가적 자의식이랄까, 같은 게 잘 드러난 작품이었죠. 이 영화 <베를린>은 어떤 공산품 같은 느낌 같은 게 있어요. 최근 CJ표 영화들에서 어떤 공산품들 냄새가 좀 나는데, 위험해 보여요.

Mephistopheles 2013-02-07 20:53   좋아요 0 | URL
조만간 한계가 분명 오겠죠.

맥거핀 2013-02-08 13:11   좋아요 0 | URL
영화와 자본을 분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CJ가 꼭 자본주의적으로 굴러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예를 들어 저는 이번에 <타워>의 감독이 김지훈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지훈 감독의 밥줄을 끊어야 된다, 그런게 아니라 <7광구>같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영화에서 완전한 실패를 보여줬는데, 또 그런 큰 돈을 덥썩 맡기다니..일반 회사에서도 좀 큰 프로젝트 실패하면 맡게되는 프로젝트 크기가 줄어들고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말이죠. CJ에 다른 감독이 없는 것도 아니고...

2013-02-07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본' 시리즈의 원작소설인 로버트 러들럼,<잃어버린 얼굴>은 국제물 첩보물 소설 특유의 분위기가 있죠.이 분야가 국제분쟁이나 외교 등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다루잖아요.두툼한 소설이니까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만 영화화하려니 그걸 빼고 액션 위주로 만들었죠.그래서 스파이물이라기 보다는 재밌는 활극영화가 되었고요.
맥거핀 님의 평을 읽으니 '베를린'은 액션물에 스파이물 특유의 고뇌를 다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맥거핀 2013-02-08 13:19   좋아요 0 | URL
네..본 시리즈의 영리한 부분이 아마도 그런 부분이겠죠. 그리고 많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부분도 이야기보다는 액션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촬영 스타일 같은 부분이 더 컷구요. 이 <베를린>에서도 예를 들어 유리천장으로 추락하는 씬 같은 부분에서 본 씨리즈를 상당히 벤치마킹한 듯이 보이더군요.

근데 사실 <베를린>은 첩보물인 척 하지만, 저는 첩보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배경만 따고, 그저 액션물로 스트레이트하게 밀어붙이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그리고 이 영화가 최근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44>와 이야기가 너무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더군요. 혹시 그 소설은 보셨는지..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7:53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도 <차일드 44>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3-02-0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군요.
엄청난 예산을 받고도 자유롭게 자기 스타일을 살리면서 그 예산을 감당해내는 감독은 잘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치면 엄청난 예산 자체가 족쇄 혹은 걸림돌...

맥거핀 2013-02-11 22:07   좋아요 0 | URL
섬님, 설은 잘 보내셨어요? 제가 댓글이 좀 늦었네요.

그렇죠. 영화에서 자본과의 결합은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까, 아무튼 많은 예산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이지만, 그만큼 감독에게는 큰 위험부담이 되기는 하죠. 그런 면에서 큰 예산으로 아주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좋은 영화를 뽑는 스필버그 감독 같은 사람이 대단해보이기는 하죠.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춘화 씨는 젊은 연예인 많이 나오는 오락프로그램에서도 잘 하더라고요.함께 어울리는 느낌...이번에 엠넷 채널의 <비틀즈 코드>에 소녀시대와 함께 나오는데 주거니 받거니 잘해요.예순이 내일 모레인데도...한 번 다시보기로 보세요.웃음 폭발입니다.

맥거핀 2013-02-11 22:08   좋아요 0 | URL
네..노이에자이트님도 좋은 설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저도 예전에 다른 오락프로그램에서 하춘화 씨가 나오는 것 보고, 젊은 감각에 비교적 잘 맞춘다 싶었어요. 말씀해주신 것 못봤는데 챙겨보겠습니다. 소녀시대도 볼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