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고

 

(아마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선배들의 충고란 별 가치가 없을 경우가 많다. 물론 충고도 충고 나름이어서, 실제적인 방법들 - 예를 들어 부장이 시킨 무가치한 일과 과장이 시킨 가치있어 보이는 일 중 어떠한 것을 먼저 해야하는가 - 같은 것은 꽤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실제적인 충고들은 점점 몸 안의 수분 농도처럼 옅어지고, 뜬구름잡는 이야기들, 두루뭉술한 인생의 비결들은 가득 쌓인 담배 연기만큼 짙어지고 만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00만명의 인생에는 100만개의 개똥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개똥(철학)을 내 인생에 발라 약으로 만들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반면 후배들의 충고는 대체로 가치가 있다. 물론 후배들의 충고란 평소에는 거의 듣기 힘들다. 그들에게 충고를 듣기 위해서는 밥을 사준다고 꼬셔서 싼 술집으로 데려간 다음, 그들에게 각종 폭탄주 레시피를 1번에서 마지막 번호까지 차례로 실험해보아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들에게 이런 충고가 튀어 나온다. "형은 왜 그렇게 살아?!" (물론 이 말은 절대 이렇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 말은 대체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본인의 혀에 대한 타박처럼도 들린다. "혀는 왜에 구러케 솨라?!") 그리고 그런 충고를 듣고 나면 정중히, 그러나 꽤나 난폭하게 후배를 화장실 변기와 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던져둔 다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아, 뭔가 문제가 있긴 있구나.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어. 그리고 그 '문제'라는 녀석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충고가 어찌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2. 다크나이트 라이즈

 

그 문제 중에 하나는 물론 게으름에 관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본 후 바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결국 쓸 수 없는 글들에 대한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약간 경외감이 든다.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고, 눈 뒤에 숨어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이렇게 미적거리게 되는데,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글 속에 새겨 남겨놓다니. 아무튼 늘 메모들은 키워드들로만 남아 있고, 그 키워드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도대체 그 처음의 형태들을 복구해낼 수가 없다.

 

복구해낼 수가 없는 메모 중의 하나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것이다. (뭐 사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메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거리와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거리가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좀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거리에는 베인과 조커의 공통점 같은 것들이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악의 중심인 베인과 <다크나이트>의 악의 중심인 조커는 악당들이란 점 이외에도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모두 망가진 입의 소유자라는 것인데, 조커는 잘 알려져있듯이 웃는 얼굴이 극도로 강조된,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의 소유자이고, 베인의 입은 영화 내내 마스크에 의해 가려져 있다. 하여튼 간에 두 사람 모두 불구의 입, 뭔가 비정상적인 입의 소유자이다. 물론 이는 별 것 아닌 공통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숙적인 '다크나이트' 배트맨과 연결지으면 조금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배트맨의 신체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직접 마주하게 되는 부위는 그의 입이기 때문이다. 즉 배트맨의 모든 신체는 최신의 슈트로 가려져 있는 반면에 거의 유일하게 그 입만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을 가진 자와 입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

 

이야기가 막 나가는 김에 조금 더 생각을 연장해 본다면 아마 이 입과 연관지어 두 가지 정도를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입이라는 것은 우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담당하는가,라는 부분이다. 신체상으로 볼 때는 입은 물론 먹는 일을 담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밀접하게 표정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간단하게 사람의 웃는 얼굴을 표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렇게 하면 된다. :-) 반면, 그 사람의 화난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한다. :-( 즉 입은 그의 겉으로 드러난 표정을 읽게 하는 지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커나 베인을 보며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이 표정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베인은 실제의 마스크를, 그리고 조커는 웃는 얼굴이라는(그러나 사실은 웃지 않는- 이 부분과 관련지어서 조커가 자신이 웃는 표정을 가지게 된 이유를 술회하는 믿을 수 없는 진술을 떠올려보라)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물론 도둑이나 강도들도 대체로 입을 가린 마스크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입 그리고 표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어떤 묘한 부분들과 연관이 되는데, 그것은 이 영화에 떠돌고 있는 무산혁명의 이미지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벌이는 공포스러운 혁명의 모습들,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사형과 추방, 미친 혁명가의 선동, 그리고 그 선동에 호응을 보내는 사람들. 무산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입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 입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아무 것도 말할 수도 없었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떠한 표정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입을 가지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입을 드러낸 어둠의 기사, 배트맨과 복구된 경찰력에 의해 퇴치되고, 고담 시에는 평화가, 그러나 어쩌면 그들만의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겨야하는 것은 다크나이트고, 미치광이에 의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베인의 망가진 입을 보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 꽤나 비싸보이는 찻집에서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고담 시의 수호자이자, (한때) 억만장자 기업인 브루스 웨인을 보며 약간 입맛이 썼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어둠의 기사의 마스크는 입은 드러내 보이되, 반대로 그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자들, 이 현실을 수호(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런 자들이다.)

 

3. 상상

 

아무래도 여기서 조금 더 길어지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리뷰가 될 것 같고, 이 글은 그저 잠이 안와서 쓰는 글일 뿐이니 이쯤에서 끊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다크나이트>와 다른 부분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이 이야기는 전작과 다르게 어딘지모르게 헐거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곳이 꽉 짜여져 있어 거의 물샐틈 없는 공간처럼 느껴졌던 그 전작과 달리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빈 공간이 있고, 그 빈 공간을 우리의 어떤 상상으로 채워넣어야만 완전한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워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지난 연휴에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넝굴당' 재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 중에 시어머니인 윤여정이 예전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주위의 반응을 회상하며 울부짖으면서 억울해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흥미롭고 윤여정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 장면에서 어떠한 실제의 회상씬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가슴을 쥐어 뜯는 연기를 보는 우리들은 그녀가 받았을 예전의 상처의 정도를 상상하고, 그 크기를 짐작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그 크기는 그 답답한 흑백의 회상씬에 갇혀 있지 않다. 그 크기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보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부풀어 올라, 각자의 머리 속에서 커다란 흑백의 회상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 상상만으로 우리는 그녀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보게 되며, 그 억울함에 공감하고, 그 상처의 크기를 되레 짐작하게 된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예전에 왕가위의 <타락천사> DVD에 실려있는 정성일의 코멘터리 중에 그가 지나가며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내는 아버지 자신을 찍은 화면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금성무가 보고 있는 장면에 흐르는 금성무의 독백. 이 독백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그 장면에서 이 독백이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그 아버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 회상하는 것,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에 동반되는 그리움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가지 알 수 없는 것 속에서도 하나 유일하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신에게 아무 것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혹은 다른 어떤 것이라도)는 (적어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고급의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쓰레기더미 속에 자신을 방치해두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

 

4. 위험

 

가끔 뭔가를 끄적거리다 보면 저절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다. 줄줄이 손 끝에서 튀어나오는 문장들, 어느 틈에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쓰여져 있는 긴 문단, 이미 내려져 있는 스크롤바. 솔직히 그런 때가 항상 오기를 바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손 끝에 있지 않으니까. 손 끝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를(그러니까 예전의 그 '문제'라는 녀석같은 것) 튀어나오지 못하게 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참으로 웃긴 것이어서 그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할 때마다 달콤한 무엇인가를 내보내 잠을 자라고 한다. 졸립다. 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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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0-0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제가 좋아하는(또는 기다리는?) 맥거핀님의 잠이 안와 쓰는 글, 새 페이퍼군요(그렇다면 저는 맥거핀님의 불면을 좋아하는.. 기다리는?_-). 충고, 에 대한 이야기 저도 비슷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어요. 대체 왜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가 하는 이야기_-(명절의 여파인가봐요)

날씨가 좋군요, 자전거 타고 달려야할 날씨에요. 명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

맥거핀 2012-10-05 02:22   좋아요 0 | URL
명절은 사실 전혀 특별한 게 없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충고를 가장한) 앞담화를 듣지도 않았구요.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렇게 몸이 편해지니까 정신이 확 이완이 되어서 책들도 눈에 잘 안들어오더라구요. 예전에는 연휴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래야지..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아주 무계획적으로 보냈습니다.

예전에 다운 받아 놓고 못 본 영화들도 몇 개를 봤어요. 옛날 일본영화들 몇 개를 봤는데 좋았어요.

그래서 자전거는 좀 타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