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내용이 글에 전반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기덕의 새영화 <아멘>에 대해 악의적인 리뷰를 쓸 참이다. 물론 이 첫문장을 보고 당신이 머금었을 희미한 웃음을 짐작한다. 대체로 '악의적인 무엇인가를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일수록 그 악의라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쓰기의 새로운 전략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 리뷰가 결국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임을 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을 결국 '해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이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잘게 나누어, 각각의 것을 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립하겠다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가 겨우 얻게된 마음의 안식이나 감동을 때로는 고스란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앗아가버린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해석이 애정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석인데다가, 그것이 감독의 현재 주위를 둘러싼 어떤 일들에 기초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감독 김기덕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부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이다. 영화가 그 의도한 바와 다르게 스크린 외부의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되며, 그 자장 안에서만 해석될 때, 영화는 때로 저열한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이 된다. 물론 나는 이제와서, 지금 이런 시대에, 영화의 순수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한 영화가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분리된 채,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영화 외부의 어떤 것들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은 그 영화 자체의 내적인 존재목적을 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그 영화는 그런 형태의, 그런 내용일 이유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은 누군가는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리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리뷰 자체를 아예 안쓰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악의적인 리뷰라도 이 영화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뒤에서도 잠깐 이야기하겠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무관심이며, 가장 잔악한 행동 중의 하나는 그 무관심을 무기로 휘두르려고 할 때일 것이므로.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관심의 무기에 맞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간곡한 호소일 것이므로.

 

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폐인설도 있었고, 후배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고, 계약이나 영화의 진행과도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고, 그 영화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832호에) 그리고 그 <아리랑>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이 병적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라면, 그에 대한 종교적 치유물일 <아멘>이 연이어 공개되었다. <아멘>은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여자(김예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다. 이 여자는 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니스, 아비뇽 등 여러 곳곳에서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다니는데, 이 '이명수'는 여자가 찾아가는 곳마다,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후다. 이 영화는 그런 여자를 그저 건조하게 쫓아다닐 뿐인데,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그 여자를 몰래 관찰하고 따라다니는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이 남자는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 물론 계속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남자는 야간열차 안에서 이 여자가 자는 틈을 타서 이 여자를 강간하는데(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후에 선명한 두 줄의 임신선을 통해 자신의 임신 - 당신은 이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 것을 알게 되고, 이 방독면을 쓴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향(한국)에 돌아가 낳아달라고, 자신은 자수를 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쪽지(아기신발과 군복에 쓴)를 보낸다. 그리고 낙태를 할 것 같아 보이던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으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만 본 분들은 또 그런 (변태적인) 이야기인가..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그간 해왔던 이야기에 비하면 그렇게 발전한 것도 없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초중반까지는 <나쁜 남자>의 프랑스 버전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이 여자와 방독면을 쓴 남자를 김기덕의 여러 다른 분신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사실 <아리랑>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은 인간 김기덕과 감독 김기덕의 여러 분신들이 출몰(충돌)하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러나 <아리랑>을 건너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단순하게 읽히는 측면도 있다. 군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남자를 쓴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김기덕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군복은 그간 김기덕 영화세계에서 주요한 클리셰들 중에 하나였고, 방독면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간단하게 외부세계와의 차폐적 의미로, 현재 외부와 차단된 그의 자폐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보호적인 측면으로는 보는 것이다. 방독면이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장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오염된 것은 외부세계이고, 보호되어야 할 순수한 것은 그 방독면 안에 있는 것, 즉 김기덕의 영화세계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여성을 생각해 보면, 이 여성(김예나)은 한국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관객들이다. 남자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갈 때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여자는 왠지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김기덕의 비유로 읽힌다. 상징적으로 볼 때도, 후반부에 이 여자의 대한민국 여권을 클로즈업하는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이 방독면을 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작품)를 낳아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결국 감독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기괴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아줄 것을, 즉 한국의 스크린들에 자신의 영화가 성황리에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국 잠든 여자에 대한 강간의 형식, 즉 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려 애쓰면서, 자신의 물건 - 겉옷, 군복, 아기신발 - 들을 여자에게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찾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이명수'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 파리에도, 베니스에도, 아비뇽에도, 즉 유럽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 여자는 돈이 떨어져 동냥을 하면서까지 이 실체없는 실체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이명수~!'라는 공허해보이는 외침을 내지른다. 이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도 행동이지만, 이 때만큼은 유독 더 바보같은(즉 아주 단순해보이는) 컷들과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간에 남자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외침이 가닿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줌인컷을 번갈아 넣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즉 이 행동들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이 결국 김기덕의 말인 셈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즉 그것은 이 여자가 결국 한국의 관객들을 상징한다는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은, 동냥을 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실체 없는 실체만을 찾아다니는 여자가 상징하듯이 외부(국)의 영화적 권위와 영화적 자본에 길들여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말해주는 것처럼 결국 이 '이명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기차로 지속되는 지금까지의 이 여행은 방독면을 쓴 남자가 준 돈으로 지탱되었다.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동냥으로는 거의 돈이 모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거금을 전해준 사람은 방독면을 쓴 남자였다. 이를 조금 더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화계는 지금껏 베니스에서, 그리고 칸에서 통할 수 있는 '이명수'를 찾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지만, 역설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고, 지지를 받고, 우리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그 베니스와 칸에 가깝게 데리고 간 것은 여자(관객)에게 그토록 외면받는 방독면을 쓴 남자 - 김기덕 감독인 것.)

 

영화 후반부, 여자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이명수'가 결국 방독면을 쓴 남자일지 모른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그리고 여자는 (낙태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고, 방독면을 쓴 남자는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여자는 열차 안에서 남자의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고, 한참 후 그것을 홀연히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스크린을 만들어 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남자가 입었던 군복과 방독면을 쓰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자신이 이제 앞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스크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와 주는 것. 여러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폐쇄된 자신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겨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국의 관객들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도 반성하고 새롭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경찰서로 걸어들어간 남자)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애타게 그의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다. 인간 김기덕과 현재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서 악의적인 리뷰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영화보다도,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 현재의 모든 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영화를 보고 싶다. (마치 그의 첫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첫 영화는 충격적이었고, 많은 관객들을 기꺼이 그의 안티로 만들거나,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이 <아멘>에서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아직도 어떤 성(聖)으로서 간단한 봉합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변성찬 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이 영화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성당 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덧.

 

<씨네21> 832호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한 반대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예술의 살인적인 또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의 비유라는 것 외에 김기덕의 영화팬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정식 개봉하지 않은 것은 김기덕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이기 전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아리랑>과 <아멘>에서 김기덕이라는 예술가가 에고를 과시하고 투정부리는 것을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매혈기>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준, 김영진 평론가의 평소 영화에 대한 견해들을 즐겨 읽고 때로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독자이나, 이러한 문장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평론가의, 한 영화에 대한 무관심의 선동을 나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영화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할 것을 이렇게 언론매체에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휘둘러져서는 안될 무기이다. 그가 말했듯 한사람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관객으로 읽는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그러니 이렇게 <씨네21>에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여기에 기고를 한 것인가). 물론 '반대'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와 '선동'은, 특히 '무관심에의 선동'은 단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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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다른 분들은 어찌 말씀하실지 모르나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일 처음 제시한 두가지 기준이라면,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주관적 경험에 주관적 해석 아닙니까. 아무리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확하고 객관적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김기덕 감독을 좋아합니다만, 그를 보면 이번에 임재범 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흔히 천재, 또는 재능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만.. 애정을 갈구하고 인정을 갈구하지만
자신이 있는 그대로, 무엇을 하든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은 타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네요.. 일산에서는 이런 영화들 개봉 자체를 하지 않아요. ㅎ

맥거핀 2011-12-12 21:40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바대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해석이 객관적이라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해석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할 해석이겠지요. 다만, 저는 요즘의 어떤 해석들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해석이 지식인이 가하는 복수가 되어, 누군가의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잡아먹을 때의 두려움이요. (김기덕의 영화도 그간 많은 해석가 - 특히 심리적 해석가 - 들에 의해 난도질되어, 거의 사이코들의 영화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구요.)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여사의 말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예술가들이 종종 에고가 지나쳐 주위를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자신마저 망가뜨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의 경우 여러가지 벌어진 일들과 겹쳐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구요. 그의 이 영화가 그런 지나친 에고가 가득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만, <아리랑>이나 <아멘>은 조금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야 할 듯 싶구요, 그의 다음 영화가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산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이 상영하길 바라며..)

2011-12-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진짜 김기덕 영화는 너무 드러내 놓거나 너무 절제하거나 였던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좋아한 영화는 주로 절제한 쪽... (파란 대문이야말로 내가 젤 좋아할 듯도 한데, 안 봤으니까 패스~) 제가 좋아했던 것은 <빈 집>, <사마리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실 마지막 영화는 봤을 당시엔 앞의 것과 다름없이 좋았지만, 그 뒤에 기억에 남기론 앞의 두 영화가 더 좋아요.) <나쁜 영화>은 좀 힘든 설정들만 빼면 좋았고. <비몽>과 <파란대문>은 안 봐서 후회했고, <수취인불명>과 <섬>은 절대 못 볼 것 같고... <활>은 잘 모르겠고. <아멘>과 <아리랑>은 볼래야 볼 수가 없네요. 여튼 그가 맥거핀님 말씀대로 상처받기보단 좀 더 펼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여러 모로 굉장히 연구대상, 흥미로운 분입니다.
그나저나 영화광인 맥거핀님께 자랑 하나 지르자면, 저 18일 (일)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클로즈 업> + 관객과의 대화, 간답니다...으하하하ㅎ 맥거핀님이 젤 부러워해주실 듯 하여, 여기에다 자랑질...ㅋㅋㅋ

맥거핀 2011-12-13 22:12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김기덕 감독에게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약간 주저되지만, 항상 최고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지요(절대 빈정대는 말이 아니구요). 그만큼 스타성도 있는 감독이구요.
섬님의 댓글을 보고, 네이버가서 김기덕의 필모를 보면서 예전에 본 영화들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이나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같은 초기작이 좋았고 (나름)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미지들도 그러했지만(진짜 몇 장면은 큰 스크린으로 보며 다리가 후들후들했던 기억이..), 그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될대로되라 식의 주인공 설정 등이 그랬었지요(그래서 아직도 조재현 씨 보면 지금 이미지들에 몰입되지가 않아요). 그 후에 <시간>이나 <빈 집> 같은 중간의 작품들을 봐도 처음만큼 새롭지는 않더라구요. 아무튼 김기덕 감독의 경우 보여줄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인데, 뭔가 괴물같은 충격적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압바 감독이 한국에 왔군요. 몰랐어요. 하이...섬님께 미션 하나드리지요. 이란어로(한국어나 영어 안됨) 정곡을 찌르는 질문 하나 하시고 그 결과를 블로그에 알려주세요. 심통나서 드리는 말씀임!

2011-12-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야생동물보호구역, 씨네21에서 20자평이나 리뷰를 보며, 진짜 설정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제목 격 안난 영화가 <실제상황>이군요. 이 영화는 좀 보고 싶어요..ㅎ)
전, 선점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그니까 예를 들어 드라마도, 소문난 뒤에 5,6회부터 보는 스타일?! 그렇군요. 맥거핀님이 말한 초기작이 더 좋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당대에 해야, 특히 영화는 개봉관에서 봐야 제 맛이니 이미 놓친 거지요.^^

여튼 한국의 다른 먹물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말그대로의 독특함이 있는 감독 맞아요. 다만 그것을 낳은 그의 `비범한` 인생이 그에게 남긴 상처도 있는 듯 합니다. 여배우들에 대한 소문(좀 비하인드로 들은 거라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 생각되는 소문..)도 그렇고, 그 외에도 관객이나 평론가, 아니 한국 사람들 전체에 대한 그의 거칠고도 솔직한 + 양가적인 모습에서도 그렇구요. 어쨌든, 다른 무엇보다 `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말을 하는 사람이니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사람은 맞지요...
(그는 진짜 `궁금해지는` 인물인지라, 정성일이 엮은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이란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읽은 결과는, 역시나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구나.였지요.)

맥거핀 님의 미션에서 힌트 하나 얻었네요. 이란어 인사 하나 공부하고 + 뇌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질문 하나 던져서, 압바 감독님께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남겨드릴까요? 결과 인증은 압바감독님과 제가 함께 있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용. 으흐흐흐흐흐 (사실 적극성 결핍증이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둘 다.)

맥거핀 2011-12-14 23:24   좋아요 0 | URL
저는 키노였던가, 씨네21이었던가에서 계속 문제적 감독이니 어쩌니 논쟁들이 붙어서, 도대체 영화가 어떻길래..하고 처음에 김기덕을 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상황>의 경우 옛 여친님이 주진모 씨 광팬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취인불명> 같은 경우는 정말 극장도 황량했는데, 영화는 그보다 훨씬 황량했었구요.

사실 김기덕에 대한 가십들은 별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엄청 순수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얘기도 있는 걸로 아는데, 글쎄요. 사람을 가까이서 접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뭐 아무튼 감독은 작품으로 말하면 되니까요. 아주 큰 흠결이 있기 전에는 대체로 그의 작품이 좋으면 그를 지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밑에 제가 글을 쓴 로버트 알트만 감독 같은 경우에도, 사생활 측면에 있어서는 많은 소문을 가지고 다녔지만, 뭐 영화가 저렇게나 좋다면야...)

그리고, 뭐 그럼 이젠 압바 님과 섬 님의 인증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뭐 인증은 안하시더라도, 압바 님이 해주신 좋은 얘기 있으면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