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5일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사하고 7개월이 소리도 없이 흘렀다. 서울로 마지못해 짐을 꾸려 옮긴 것은 직장 때문이었지만 경제적 이유때문에 그나마 전세가가 저렴한 변두리로 자리잡았는데 우리 동네, 마음에 든다. 공기도 나쁘지 않고 가 볼 곳도 많고, 이 곳에 얼마나 살게될지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만이라도 정 붙이고 살아야 겠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조선의 10대 통치자 연산군(1476~1506) 묘가 있다. 지번으로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77번지, 연면적 14,301평방미터 니까 대략  4,326평 정도 되는 셈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연산군의 사위 능성 구씨의 선산이라는데, 이 묘역에 연산군의 딸과 사위도 묻혀 있으며, 1537년 폐비 신씨도 연산군 묘 옆에 묻혀 쌍분을 이루고 되었다고 한다. 입구에서 제일 안쪽으로 연산군과 부인 신씨 묘가 있고 그 앞 중앙이 세종의 후궁 조씨 묘, 맨 앞쪽이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가 을씨년스럽게 늘어서 있다.

 

처음부터 연산군 묘가 이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서 병사했는데, 그 곳에 묻혔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줄 것을 청하여 1513년에 지금의 위치에 이장되었다. 이때 중종은 이장을 윤허하면서 왕자군의 예에 따를 것을 명했다고 한다.

 

광해군과 더불어 군으로 남아 역사의 부끄러움으로 기억되는 연산군, 간단한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자. 그는 조선의 10대 왕으로서 1494년, 18세의 나이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초기 4년 정도는 선왕의 유풍이 남아 있어 문치를 비교적 잘 이루었으나 그 뒤로 무오사화, 갑자사화와 같은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성종의 두 후궁과 그 아들들을 죽였으며, 병상에 누워 손자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돌아가시게 했다. 또한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홍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꿔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저질렀으니 그야말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스산한 계절, 연산군의 묘를 돌아나오면서 발길은  서점으로 향했다. 구입한 책은 [사화와 반정의 시대]. 지금 만큼이나 혼란스러웠을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난국을 뚫고 나왔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