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 61-1
크누트 함순 지음, 김남석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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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사람의 바닥까지 드러난 처절한 삶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묘사한 글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배고픔을 이기려고 톱밥을 씹고, 손가락을 빨다가 차라리 '손가락을 씹어 먹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지경이라니. 그런데 주인공은 이런 궁핍한 속에서도,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것, 폐를 끼치는 것, 비굴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어쩌다 생긴 수입이 있어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툭 주어버리기 일쑤고, 점원이 착오로 거슬러 준 잔돈을 받았다가 죄책감에 시달리며 역시 불쌍한 사람에게 적선하고서는 안도한다. 내성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 아니, 그는 미쳤다. 되도 않는 글을 쓴답시고 현실과 단절을 선택하면서 고결성만 추구하는, 읽는 내내 갑갑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도가 지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인상적인 소설이다. 1920년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말년에 히틀러와 나치에 동조하는 말과 글을 남겨 그 명성을 다 날려버린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초기 대표작인 [굶주림(1890)]은 어느정도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다고 한다. 배운 것도 없이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한 젊은 작가는 자신의 무명시절의 처절함을 당시로서는 아주 낯선 서술기법으로 묘사해 단박에 세계문학에 주목을 받았다. '고통스럽게 불안해 하는, 소외된 현대의 인간이 최초로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크리스티아나(오슬로의 옛 이름)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비정상의 주인공이 서술하는 일관성 없는 전개는 아주 철저하게 화자 중심이다. 이런 방식은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푸르스트, 버지니아 울프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프로이트와 융 같은 심리학자들도 그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하니 대단하다. 

 

함순의 정치적 견해는 일단 뒤로 하고, 그의 또다른 대표작 [대지의 축복]이나 [목신 판]을 가급적 빨리 구해 읽어 보고 싶다.

 

 

- 접어둔 페이지

 

과자를 파는 여자 하나가 내 곁에 앉아서 상품 위에 갈색으로 된 코를 쳐박고 있었다. 그 여자의 앞에 있는 자그마한 탁자 위에는 먹을 것이 화가 날 정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100쪽

 

갑자기 조심해! 하는 싸늘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나는 이 고함소리를 똑똑히 듣자, 부자유스러운 다리로 한껏 빨리 움직여 허둥지둥 몸을 비켰다. 괴물과도 같은 빵차가 나의 곁을 바싹 지나가며, 바퀴로 나의 윗저고리를 스쳤다. 좀 더 날쌨던들 나는 무사히 비켜설 수가 있었을 것이다. 발가락 두서너 개가 갈리고 말았던 것이다. 구두 속에서 발가락이 우지직 납작해진 것같이 느껴졌다. 164쪽

 

나는 넘어지지 않고 죽어도 서서 죽고 싶었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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