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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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은 헤브루어의 베엘제버브(희랍어 Beelzebub)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직역하면 '곤충의 왕'이라는 뜻인데 흔히 '악마'를 암시적으로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윌리엄 골딩은 스스로 [파리 대왕, 1954]의 주제를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만 다섯 살에서 열 두살에 이르는 한 무리의 소년들(정확이 몇명인지 불분명하다)이 무인도에 불시착했다. 생존한 어른은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미 서두에서 이 소설의 제목에 함축된 의미를 밝힌 것처럼 뭔가 불길하다. 브룩 쉴즈가 출연했던 두 소년소녀의 무인도 생존기 [푸른 산호초, 1980]와는 달라도 많이 다를것 같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랠프, 잭, 피기(돼지), 사이먼, 쌍둥이 형제 에릭과 샘, 그리고 사냥부대로 변모해 버린 성가대 단원들과 어린 꼬마들이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랠프와 피기이다. 랠프는 균형잡힌 몸에 나름 선한 눈을 가진 소년임에 반해 피기는 호칭처럼 뚱뚱하고 지독한 근시로 안경을 꼈으며 천식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심한 기침을 해댄다. 그러나 지적 수준은 오히려 랠프보다 더 낳은 소년이다. 랠프와 피기는 자신들 이외 또다른 생존자를 불러모으기 위해 '소라'를 힘껏 불어 신호를 보내는데 소라를 분 것은 랠프지만 그것을 나팔로서 활용하자는 제안을 한 것은 피기다. 피기는 또 일찌감치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암시할 정도로 지적이다.

 

"~나도 짐승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발톱이나 그런 걸 가진 짐승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무섬 탈 만한 것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 돼지는 얘기를 멈췄다. "다만...." 랠프는 초조한 듯 몸을 움직였다. "다만, 무어란 말이야?" "다만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무섬을 탄다면 문제가 달라진단 말이야."  -123쪽

 

소라 소리를 듣고 소년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 중엔 랠프 또래의 잭의 이끄는 성가단원들도 포함되어 있다. 잭은 근육질에 호전적 성격이다. 처음부터 소년들의 '대장' 역할을 놓고 랠프와 대립하는 잭, 그는 이미 집단 내에 있는 또 다른 집단의 우두머리다. 결국 지도자(대장)를 뽑기 위한 선거에 돌입하는 소년들. 랠프나 잭이나 리더로서의 자질은 아직 아무것도 검증된 바 없지만 과반이 넘는 아이들은 '소라'로 상징되는 랠프를 지도자로 선출한다. 그렇지만 잭은 집단내에서 일정한 지분을 요구한다. 성가단원들을 사냥부대로 활용하겠다면서 스스로 사냥부대를 이끌겠다는 것인데 랠프는 이를 승인한다. 일종의 무력부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지만 지도자 랠프는 그 파장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 다음에 눈여겨 볼 소년은 사이먼이다. 사이먼은 과묵하고 다른 소년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사색을 좋아하는 이 소년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년 집단은 사이먼의 성찰의 메세지를 소화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어린 소년들일 뿐이다. 그가 파국을 예언하지만 귀담아 듣지 않는다.

 

랠프는 소리쳤다. "사이먼의 말을 들어! 그가 소라를 잡고 있으니까!"  "내 말은.... 짐승은 아마 우리들 자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에끼 바보!" 이렇게 말한 것은 돼지였다. 충격으로 점잔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사이먼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를테면...." 사이먼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고질을 표현해보려고 애썼으나 말이 잘 되지 않았다. 곧 영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조용해진 속에,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잭이 야하고도 힘 있는 하나의 실러블을 내뱉었다. 해방감은 오르가슴과 같다. ~사냥부대는 고함을 질렀다. 사이먼의 노력은 형편없게 실패하였다. 조소를 받고 참혹한 몰골이 된 그는 비실비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130~131쪽

 

쌍둥이 형제인 샘과 에릭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언제나 둘이 함께하고 명랑한 이들은 랠프와 잭이 갈라섰을 때 피기와 함께 랠프 편에 남는다. 마지막 순간에는 잭의 편에 가담하지만 그것은 무력과 폭력에 굴복한 결과였고 속으로는 여전히 랠프의 편에 선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랠프의 위치를 발설하면서 위험에 빠뜨린다. 성가대원들 개개인은 뚜렷한 개성이 없다. 행동대장인 로져 이외의 그들은 무리로서만 묘사된다. 그 외 꼬마들은 보호의 대상일 뿐이다. 성가대원이라든지 꼬마들은 각기 다른 편에 서 있는 군중 또는 무리이다. 적극적으로 동조하느냐 여부가 차이라면 차이랄까.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이 아이들이 무인도에 어른들 없이 남겨졌다. 이 곳에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하는 '서바이벌 게임'류의 전개는 잊어야 한다. 적은, 두려움의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이 소년들은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에 나오는 소년들(이들의 연령은 8살부터 14살에 이른다)과는 달리 좋은 결말을 향해 가지 않는다. '짐승'으로 대변되는 미확인의 공포와 언제 구조될지 알수없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각자 생존을 위한 다른 전략을 세운다. 구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랠프의 무리는 봉화연기, 생존을 위한 오두막, '소라'로 상징되는 질서를 신봉한다. 반면 권력에의 집착에 사로잡힌 잭은 더 직접적이고 말초적인 욕망의 덩어리다. 나무 열매로 연명하던 소년들에게 '고기' 맛을 선사한 그는 '연기'도 그것이 말하는 '구조'도 뒷전이다. '고기' 맛 뿐만 아니라 '피' 맛 까지 본 잭과 사냥부대는 점점 더 야만인에 가까와 진다. 집단 무의식 속에서, '살육'을 마치 '오락'처럼 즐긴다. 그들의 잔혹함은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먹이던 어미 멧돼지 사냥을 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여기서 더위에 녹초가 된 암퇘지는 쓰러졌다. 소년들은 마구 덤벼들었다. 이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무시무시한 습격에 암퇘지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비명을 지르고 뛰어오르고 했다. 온통 땀과 소음과 피와 공포의 난장판이었다. 로저는 쓰러진 암퇘지 주위를 달리면서 살이 드러나 보이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창으로 찔러댔다. 잭은 암퇘지를 올라타고 창칼로 내리찔렀다. 로저는 마땅한 곳을 찾아서 제 몸무게를 가누지 못해 짜빠질 정도로 창을 밀어넣기 시작하였다. 창은 조금씩 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겁에 질린 암퇘지의 비명은 귀가 따가운 절규로 변하였다. 이어 잭은 목을 땄다. 뜨거운 피가 두 손에 함빡 튀어올랐다. 밑에 깔린 암퇘지는 축 늘어지고 소년들은 나른해지며 이제 원을 풀었다. 나비들은 여전히 공지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202쪽

 

결국 랠프의 무리와 잭의 무리는 적이 되어 갈라선다. 이제 숲의 '짐승'이 아니라 얼마전까지 동료였던 잭과 그 일당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야 한다. '소라'의 권위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더이상 '연기'로 상징되는 구조는 모두의 목표가 되지 못한다. 구도자이자 예언가인 사이먼은 정신분열인 듯 아닌 듯 몽환적인 체험을 통해 위험을 감지한다. 

 

짐승을 위한 선물, 짐승이 선물을 받으로 오지 않을까? 그 머리도 자기 생각에 동조하는 듯이 그에게는 생각되었다. 도망쳐, 딴 소년들에게로 돌아가, 하고 머리는 조용히 말하였다. 그저 농담이었어. 정신을 쓸 게 뭐야? 넌 그저 잘못 생각했던 거야. 그뿐이야. 가벼운 두통이거나 무언가를 잘못 먹은 탓일거야. 돌아가, 착하지-머리는 소리 내지 않고 말하였다. ~창자더미 위에는 파리가 새까맣게 모여들어서 톱질을 하는 소리같이 윙윙거렸다. 얼마 후에 이 파리떼는 사이먼을 알아챘다. 잔뜩 배를 채웠기 때문에 파리떼는 사이먼이 흘리는 땀을 찾아와 마셨다. 파리떼는 사이먼의 콧구멍 아래를 간지럽히고 넓적다리 위에서 등넘기 장난을 하였다. 파리떼는 쌔까마니 다채로운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사이먼의 전면에는 <파리대왕>이 막대기에 매달려 씽끗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먼은 눈을 뜨고 다시 쳐다보았다. 흰 이빨과 몽롱한 눈과 피가 보였다. - 그리고 태고적부터 있어 온 피할 길 없는 인식이 그의 응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사이먼의 오른편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205~206쪽

 

"너는 참 바보야" 하고 <파리대왕>은 말하였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녀석이야" ~ "넌 여길 벗어나서 딴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게 좋아. 그들은 너의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랠프가 네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길 바라지는 않겠지? 너는 랠프를 퍽 좋아하지? 그리고 돼지와 잭도?" 사이먼은 고개를 약간 뒤로 쳐들었다. 눈은 아무리 해도 딴데로 돌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파리대왕>이 매달려 이 쪽을 보고 있었다.  "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넌 내가 무섭지 않으냐?"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직 내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짐승>이야." 사이먼의 입이 한참 애를 쓰더니 똑똑한 말소리가 새어나갔다. "막대 위에 꽂힌 암퇘지머리야" "나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 ~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 사이먼은 자기가 거대한 아가리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속은 새까맸다. 점점 퍼져가는 암흑이었다. ~ <파리대왕>이 말하였다. "우리는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을 거야. 알겠어? 잭도 조지도 모리스도 로버트도 빌도 돼지도 랠프도. 너희들 모두. 알겠어?" 사이먼은 그 아가리 속으로 삼켜져 들어갔다. 그는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다.  213~215쪽

 

무리로 돌아온 사이먼은 결국 잭 일당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그들은 '짐승'으로 여겼다고 하지만 그건 '구차한 변명'이란 걸 모두가 안다. 이미 잭이라는 말 주위에는 '터부'가 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잭 일당은 익은고기를 위해 피기의 안경을 약탈하고 그 안경을 돌려받으려고 찾아온 피기마져 죽인다. 이제 살인은 특별하지도 않게 되었다. 마지막 사냥감이 된 랠프, 그는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순수하고 순진해야 할 12살(우리나이로 해도 많아봐야 14살) 이하의 소년들은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상황에 직면한 것일까?  

 

서두에 말한 것 처럼 작가는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아무래도 골딩은 순자의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극한의 조건에서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타심을 발휘하기 보다는 그보다 더 쉬운(?) 야만으로의 퇴행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이 무서운 우화는 독자로 하여금 경각심을 일으키게 한다. 소년들만 나오는 이 소설이 성장소설의 범주가 아니라 묵시록적 계시로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지만 아직 인류가 파국으로 끝나지 않은 이유는 분명히 있을터. 우리 안에는 야만성이나 악마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선이 악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 그것이 옳다는 확신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비록 날마다 그런 사실을 의심케 하는 끔찍한 뉴스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지만 말이다.(7살 원영이가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수사로 밝혀진 계모의 아동학대는 눈과 귀를 의심케할 정도로 끔찍하다.) 공동체 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귀퉁이 무너진다고 지켜만 볼 수 없지 않은가. 심연의 악이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더 큰 목소리로 공동선으로 이겨내야 한다.

 

p.s. 비교해서 읽으면 좋은 소설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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