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을유세계문학전집 1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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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 사르트르 이전의 선구적인 실존주의 작가 카프카의 난해한 작품, [소송]. 을유문화사(이재황 옮김) 판으로 읽었다. 장장 석달이나 걸렸다. 첫장을 넘긴 후로 아주 빈번히 다른 책 들에 손이 갔다. 그 사이에 읽은 소설로는 H.G. 웰즈의 [모로박사의 섬]과 [투명인간],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백주의 악마],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톨스토이의 [부활]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S.S. 밴다인의 [비숍 살인사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앤소니 버제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등에 이른다.

 

그만큼 집중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깃털만큼 이라도 잡념이 끼어들면 어김 없이 작품의 흐름이 샛길로 빠져들어 다시 몇 쪽 앞으로 책장을 되돌리곤 했다. 어찌되었든 진심으로,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문제적 작가 프란츠 카프카 님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포기하지 않고 완독한 것으로 일정부분 만회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K는 30세의 잘 나가는 은행원이다. 그는 어느날(그의 생일이었다) 갑자기 침실에서 의문의 두 남자에게 체포를 당한다. 누군지도, 까닭도 모르겠지만 어떤 이가 무슨무슨 이유로 K를 고발한 것이다. 엉겁결에 소송 절차에 들어선 K는 이제부터 '법원'이라는 국가기관과 그 주변에 기생하는(예컨데 변호사, 판사, 브로커 따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인다. 1년에 걸친 지리한 공방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낯선 두 사람의 방문, 그리고 이어지는 K의 사형집행으로 막을 내린다.

 

<소설의 시작 부분>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했음이 틀림없다. 무슨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도 어느 날 아침 그는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루바흐 부인을 좀 만나 봐야겠소...." K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남자로부터 몸을 홱 빼내려는 듯한 동작을 했는데, 그러나 두 남자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안 됩니다." 창가의 남자가 말했다. 이말과 함께 그는 작은 탁자 위에 책을 던지며 일어섰다. "여길 떠날 수 없소. 당신은 체포되었소." "그런 것 같긴 한데...." K는 그 말에 이어 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당신에게 그런 걸 말해 줄 처지가 못 되오. 당신 방에 돌아가 기다려요. 소송은 일단 시작되었고, 당신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요.~"    9~12쪽

 

<마지막 부분>

~ K의 목에 한쪽 남자의 두 손이 놓이는 동시에 다른 쪽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흐려져 가는 눈으로 K는 아직 자기 코앞에서 두 남자가 뺨을 서로 맞댄 채 결말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개 같은 결말이로군!" 그가 말했다. 그는 죽어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309쪽

 

시작 부분의 체포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의 사형 집행 장면이나 지금 생각하면 대륙법계 법체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방식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 오히려 상상에 가깝다. 법학도였던 카프카의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극단적인 예이다. 하지만 1914년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음을 상기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가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폭력인 전쟁 앞에서 평범한 개인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다. 전체주의, 관료주의의 폭력에 대한 개인의 거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면 당시의 현실은 소설속 상상보다 더 허무맹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작품 중 K는 소송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며 피해 보려고도 하고, 연기해 보려고도 하고, 연줄을 만들어 보려고도 하지만, 진척이 없다. 주변엔 온통 부조리한 상황들과 사람들 뿐이다. 자신을 뺀 모두가 법원과 관계되어 자신을 감시하거나 압박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K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불평하면서도 여자에게 한 눈을 판다든지 은행에서의 위치를 두고 부지점장과의 라이벌 관계를 의식한다든지 변호사를 해임한다든지 갈팡질팡한다. 존재 자체에 대한 모호성도 이 작품의 가독성을 저해시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법정이 가정집과 연결되어 있다든지, 건물 다락층이 법원사무처 라는 설정은 어린이 고객을 위한 '동화' 속 상황처럼도 보인다.

 

지루한 전개가 이어지는 가운데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자 비교적 정신을 집중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대성당에서' 장에 나오는 K가 어떤 신부님과 나누는 '법 앞의 문지기'에 관한 대화이다. 이 우화가 소설 [소송]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여겨져서 옮겨 본다.

 

"당신은 법원에 관해 자기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법 서문에는 그런 기만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법 앞에 문지기가 한 사람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남자가 찾아와 법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남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러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럴 수 있지>라고 문지기가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섰기 때문에 남자는 문 너머로 그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구부린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고는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 어디 들어가 보게. 그러나 내가 힘이 세다는 걸 알아 둬. 그리고 나는 제일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홀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지키고 서 있지. 세 뻔째 문지기만 돼도 나는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다구.> 시골 남자는 그런 어려움이 있으리라곤 미처 예기치 못했다. 법이란 누구나 언제라도 다가갈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는 문지기, 그의 커다란 뾰족코, 길고 숱이 적은 타타르풍의 새까만 수염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를 얻을 때까지 차라리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문지기는 그에게 걸상을 하나 주며 문 옆쪽에 있게 한다. 그 자리에 그는 몇 날 몇 해를 그렇게 앚아 있었다. 그는 입장 허가를 얻으려고 갖은 시도를 다 해 보고 자꾸 부탁을 함으로써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심심치 않게 그를 상대로 간단한 심문을 하며, 그의 고향에 대한 것이라든가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캐묻는다. 그러나 그건 모두 높은 양반들이 별 관심도 없으면서 공연히 던지곤 하는 그런 질문들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번번이 아직은 그를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것이다.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장만해 온 남자는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값나가는 것이라도 무엇이든 아낌없이 써 버린다. 문지기는 주는 대로 다 받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걸 받는 것은 자네가 뭔가를 소흘히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네.> 여러 해가 지나고 또 지나도 남자는 거의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문지기를 지켜본다. 그는 이제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번째 문제만 남게 된다. 처음 몇 년간은 우연치곤 너무도 기막힌 이 불행한 신세를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나중에 늙어 가면서는 그저 혼잣말로 궁시렁거릴 뿐이다. ~죽기 전에 그의 머리속에는 일생 동안의 모든 경험이 겹겹이 쌓이며 그가 여태껏 문지기에게 한 번도 던져 보지 못한 하나의 질문으로 뭉쳐진다. 이제는 점점 굳어 가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일으킬 수도 없어서 문지기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문지기는 그에게 몸을 깊이 구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 쪽 체구가 현저히 줄어들어 키 차이가 크게 벌여졌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얼 더 알고 싶은 거지?> 문지기가 묻는다. <끝질긴 사람이로군.> < 누구나 다 법에 도달하고자 애를 쓰고 있눈데....> 남자가 말한다. <그 긴 세월동안 나 말고는 아무도 그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없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문지기는 남자가 이미 임종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꺼져 가는 그의 청력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게 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여기는 자네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 왜냐하면 이 문은 자네한테만 지정된 문이기 때문이지. 이제 나는 가서 그만 문을 닫아야겠네.>'"

 

* 작품에서는 이 대목 다음에 신부와 K사이의 이 우화에 대한 논쟁이 이어진다. 카프카의 해설판이나 다름 없다.

 

읽기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작가에 대한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었다. 카프카에 대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해졌다. [변신] 등 여러 단편들과 그의 또다른 미완성 대표작 [성] 이 좋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p. s. 그러나 K는 도대체 왜 무엇때문에 체포되었던 것일까? 어떤 일로 소송이라는 수렁에 빠져 사형까지 당한 것일까? 하긴 세상일에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것도 같다.

 

오손 웰스가 감독하고 안소니 퍼킨스가 출연한 영화 [소송(카프카의 심판),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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