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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평점 :
투명인간은 어떻게 생겼을까? H.G. 웰스의 오리지널 소설 [투명인간]을 보면 주인공은 그가 매맞아 죽을 때 딱 한 번 그 모습이 드러난다. 어떻게 생겼을까? 힌트가 있다. 비록 본인 입을 통해 나온 묘사지만 대학 동창 켐프 박사에게 자신을 밝히는 대목이 있다.
"그래, 그리핀이야." 목소리가 대답했다. "저학년이었고, 색소결핍증 환자와 다름없던, 키가 180센티미터에 어깨가 넓던 그 그리핀 말이다. 얼굴이 분홍빛에 하얗고 눈동자가 새빨갛던 그 그리핀 말이다. 화학상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지" 126쪽
촉망받는 화학자 그리핀은 왜 스스로를 대상으로 위험한 실험을 했을까? (하긴 자신을 흰 쥐 취급한 선구자가 또 있긴 하다. 지킬 역시 스스로 묘약을 마시지 않았던가.) 순수한 과학적 발견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심저에서 꿈틀 대는 검은 욕망, 그것 때문일 공산이 크다. 겉으로야 아니라고 하겠지.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갑자기 부여된 초인적인 능력을 어떻게 주체할 수 있을까. 우선 장난기부터 발동할 테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어.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으면서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옷을 입은, 시력을 가진 사람이 장님의 도시에 들어온 기분이었어. 나는 내가 가진 비상한 이점을 이용해 저 사람들을 우롱하고 겁주고, 뒤통수를 갈기고, 모자를 빼았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 그리고 보통은 한껏 즐기고 싶었어.~" 163쪽
그런 다음엔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목록'을 작성하지 않을까. 그 리스트의 대부분은 '범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일확천금을 노릴 절호에 기회라고 여길 것이고, 이참에 원한진 적이나 경쟁자를 혼내주려 할 것이며, 성적 욕망을 채우는 따위의 더러운 짓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띠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이란 대략 그렇다. 혹자는 선행을 베푸는 일부 고결한 사람들도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 사람도 많이 봤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사람도 자신이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익명을 요구하는 것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못할 것이 없을 거라 여겼다. 자신의 과학적 진보에 쾌재를 불렀다. 그는 이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그때 난 혼자였지. 연구실은 키 큰 등불만이 환하고 조용하게 타오를 뿐 쥐 쥐 죽은 듯이 조용했어. 내게 찾아온 위대한 순간에는 언제나 나는 혼자였어. '동물, 동물의 조직도 투명하게 만들 수 있어! 동물도 안 보이게 할 수 있어! 색소 이외의 모든 것을. 나도 투명해질 수 있어! ~" 145쪽
결국 나는 투명해진 두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도 투명해졌기에, 눈을 감고도 방 안의 너저분한 광경을 볼 수 있었어. 내 사지는 유리처럼 투명해졌고, 뼈와 동맥은 시야에서 희미해지더니 사라져버렸으며 마지막엔 작고 하얀 신경들이 사라지더군. 나는 이를 갈면서 끝까지 참았어. 마침내, 감각을 잃은, 창백하고 하얀 손톱 끝과, 손가락 끝에 가무스름한 산성 얼룩만이 남았어. ~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다만 두 눈의 망막 뒤에 있는 희미한 색소, 안개보다도 희미한 것만이 보였어. 테이블을 붙잡고 이마를 거울에 들이밀어 볼 수밖에 없었지. 158~159쪽
그러나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미리 고려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그 여파는 컸다. '보이지 않는다'는 '권력'을 쥔 대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내 주어야 했다. 우선 추위에 약했다. 대번 감기에 걸려 훌쩍 거렸다. 옷을 입자니 그럼 이미 '투명인간'이 아니었고 오히려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린다. 가발과 안경에 장난감 코를 갖다 붙이고 얼굴엔 온통 붕대를 감아야 했다. 우습거나 별나거나 어느쪽이든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것 저것 스트레스 받느니 다 벗어던지고 다시 투명인간으로 돌아가면 다시 고통이 따른다. 신발을 신을 수 없으니 걷기도 불편하다. 눈, 비가 오거나 안개가 낀 날이면 윤곽이 드러나고 만다. 조금만 한 눈을 팔더라도 여기저기 부딪히기 일쑤다.
"지난 1월, 나를 둘러싼 허공에서 눈보라가 쳤어. 내 몸에 눈이 쌓이기라도 하면, 내 모습이 드러나지 않겠어! 나는 지치고 춥고 고통스럽고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처지였어. 내 몸이 투명해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처럼 무턱대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거였어. 이 세상엔 내가 피할 도피처도, 내가 쓸 기구도, 내가 비밀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어. 내 비밀을 털어놓는 짓은 스스로 나 자신을 저버리는 일이지. 그야말로 나 자신을 구경거리나 골동품으로 내세우는 꼴이라고.~나의 유일한 목적은 눈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구하고 내 몸을 가려 추위를 면하는 것뿐이었어.~" 171쪽
"너도 이제 내 처지가 얼마나 불리한가를 좀 알았겠지." "내겐 몸을 피할 은신처도 몸을 가릴 옷도 없었어. 옷을 입으면, 나만이 가진 장점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나는 이상하고 소름끼치는 괴물이 되어 버리지. 그리고 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 음식물을 먹는 것이, 그러니까 내 몸과 동화되지 않는 물질을 배 속에 채우는 짓이 다시 나를 괴상하게 보이게 만들거든." 181쪽
이제 투명인간이 된 그리핀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원래대로 자신의 몸을 되돌리는 것이 됐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번번히 좌절된다. 보이지 않은 존재로서 무엇을(실험 따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섣부른 과욕이, 망상이 그에겐 돌이킬 수 없는 멍에가 된 것이다. 그다음 수순은 후회하거나 절망하거나 그것도 부질없는 짓이라면 완전한 괴물이 되는 것 뿐이다.
"이 미친 실험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투명인간이 지닌 수많은 능력만을 꿈꾸었지. 그날 오후 접어들자, 극도의 절망감이 엄습하더군. 나는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거야. 물론 투명성으로 인해 인간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들을 얻는 순간 그것들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없게 되었어. 열망.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집이 있다 한들 그곳에 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아무리 여인의 사랑을 받는다 한들, 그녀가 델릴라와 같은 여자가 되려 한다면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나는 정치에도, 지저분한 명성 따위에도, 자선 행위에도, 스포츠에도 흥미를 못 느껴. 무엇을 해야 했을까?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베일에 싸인 불가사의한 존재, 인간의 몸뚱이, 나 자신을 붕대로 감싸 가둔 괴물이 되고 만거야!" 194쪽
"~그렇다고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냐. 정당한 살인이라고 할 수 있지. 요점을 말하면, 우리처럼 세상 사람들도 이제는 투명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켐프, 이제부터 투명인간은 공포 정치를 펼쳐야 할 거야. 그래. 말할 것도 없이 무시무시한 일이지. 그렇지만 나는 공포정치를 실행해야 겠어. 공포정치. 투명인간이 네가 사는 버독 같은 도시를 거머쥐고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 지배하는 거야. 투명인간은 칙령을 공표해야만 할 거야. ~ 칙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겠지. 또한 그런 자들을 보호하는 자들도 죽여야 하고." 200쪽
자 이제 결론은 뻔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처절한 파멸이다. 결국 그리핀은 그 초인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집단으로 매를 맞고 죽음을 맞는다. 생명의 불이 꺼지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전혀 초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것 봐요!" 경관이 소리쳤다. "다리가 보이기 시작해요!"
그렇게 천천히, 손과 발을 시작으로 사지에서 몸통으로 신기한 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맨 먼저 작고 하얀 신경이 드러나면서 연한 잿빛을 띤 사지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러곤 유리와도 같은 뼈와 복잡하게 얽힌 동맥이 드러났고, 곧이어 살과 피부가 처음에 희미한 안개처럼 나타나더니, 점차 빠르게 그 빛깔이 짙어지면서 불투명해 졌다. 곧 사람들은 뭉개진 가슴과 어깨, 그리고 상처투성이에 반죽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골절상을 입은 몸뚱이는 서른 살가량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얀색이었다. 나이 탓에 샌 것이 아니라 색소 결핍증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마치 석류석처럼 보였다. 양손을 꽉 쥔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표정에는 분노와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237쪽
[투명인간]은 100년도 훨씬 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요즘 스크린에서 종횡무진 활약중인 마블이나 DC코믹스사의 수퍼히어로물에서는 볼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의 현실적 장애물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능한 화학자이자 야망에 찬 젊은이었던 그리핀은 '큰 힘'을 어떻게 쓸 것인지 충분한 고민이 결여된 상태에서 큰 힘을 얻었다.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인 그 힘은 결국 자신을 집어삼켜 버렸고, 평범한 군중에 의해 '큰 힘'은 제거당하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비범함이 다수의 사람을 압도하고 보호한다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류의 히어로물과 얼마나 다른가.
유사한 사례가 언론을 통해 심심찮게 보인다. 국방 로비로 한때 세간에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린다 김'이라는 노쇄한 로비스트의 최근의 갑질 논란 역시, 자신이 가진(또는 누렸던) 힘에 스스로를 저당잡힌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얼마전에 한참 시끄러웠던 지방의 유력 토착기업 회장들의 막말논란이나 고위직 지도층 인사들의 추락 역시 스스로 자기의 권력을 통제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부처님은 손오공에게 괜히 관을 씌운 것이 아니다. 3권 분립이라는 오랜 전통이 괜히 형성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절제할 수 없다면 구속당할 수 밖에 없다. 견제되지 않은 힘은 필히 부패하고 부패한 권력은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이다.

제임스 웨일 감독의 [투명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