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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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될까, 응?"

15살의 잔혹한 악동, 알렉스와 그의 무리들인 딤, 피트, 조지 이렇게 넷은 밤의 거리를 지배하는 난폭한 폭군들이다. 약을 탄 우유를 마시고 한창 기분이 '업'되면 그들의 '작업'은 시작된다. 길가는 어른들을 습격해서 돈을 빼앗고 온갖 모욕을 준 후 쫒아 버린다. 알렉스의 비행은 급기야 무리들의 배신과 함께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고 범죄의 잔혹함때문에 소년범 수용소가 아닌 일반 교도소에 수감된다.

 

시대가 불분명한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이 배경이다. 남다른 과거를 경험한 악동, 알렉스의 거친 입담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원문 텍스트는 알렉스 일당이 사용하는 10대 비속어 '나스다트 어(nasdat)' 때문에 영어권 독자들을 다소 난감하게 했다지만 박시영 교수의 친절한 번역은 그런 불편함을 최소화했다.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시작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이제 갓 15살을 넘긴 불량소년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공격은 이유가 없고, 피를 볼 때까지 이른다. 폭행, 모욕, 강간 등 '폭력을 선동하는 감각적인 작품'이라는 세평에 더도 덜도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 작품을 영화화하면서 이 폭력적인 전반부를 꽤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아, 이제 어떻게 될까?"

그러나 눈살이 찌푸려질 무렵 소설은 전환점을 맞는다. 알렉스는 살인을 저지르고 일반 교도소에 수감된다. 나름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하다가 감옥안에서 두번째 살인을 저지른 알렉스. 당국은 구제불능인 그를 상대로 비인간적인 교화 프로그램인 '루도비코 요법'을 시술한다. 이것은 일종의 쇠뇌 기법으로 약물 투입과 함께 잔혹한 영상을 강제적으로 시청케 함으로써 폭력 장면을 보거나 그런 생각만 해도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비인간적 처방이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깊은 철학적 고민을 던진다.

"착하게 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6655321번. 착하게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이번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잠 못 들어 할 거야.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넌 지금 기도의 힘이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란다. 생각만 해도 아주 끔찍한  일이군.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 114-115쪽

개인의 폭력을 억압하기 위한 당국의 폭력은 '최소침해의 원칙' 하에서는 어느 정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예 '자유 의지'를 빼앗는 정도에 이른다면, 그 사회는 과연 아름다운 모습을 띌 수 있을까? 오래 전에 봤던 [데몰리션맨]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역시 미래사회가 배경. 액션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획일화된 옷차림에 성적 교류도 직접 접촉이 아닌 전자제품 같은 도구를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비인간적 미래 사회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던 영화다. 두 작품 뿐만 아니라 미래사회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획일화, 비인간화를 경고한다.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얻은 질서? 평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교정 프로그램 자체를 포기할 수 있을까? 

 

"자, 이제 어떻게 될까?"

3부로 접어들면서 작품은 성장소설의 구조를 보여준다. 치료를 마친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 거리로 나선 후 경찰관이 된 옛 동무들에게 두드려맞고 배회하다가 어느 집에 머물게 된 알렉스, 그 집주인이 과거 자신이 저지른 폭행과 강간의 피해자 가족임을 알게된다. 심지어 여주인은 충격으로 자살까지 했다. 집주인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되고 친절한 조력자에서 분노에 찬 복수의 화신으로 뒤바뀐다. 결국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함으로써 자살을 시도하는 알렉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원래의 알렉스, 즉 루도비코 요법 전의 알렉스로 되돌아온다. 다시 익숙한 무법천지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고 정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알렉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에 비유된다고 한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도 있다. 뿐만 이랴. 과거에도 있었고 세상 어디에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세상의 모든 젊음의 상징은 좌절과 방황, 상처 그리고 성장인 것을 누구나 안다. 알렉스조차 남다른 경험 끝에 아래와 같이 읊조리지 않았는가.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 하나와 같은 거야.

...222쪽 

문제는 기성 세대가 자신들의 젊은 시절 모습과는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른 이 불완전체들을 수용할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일 텐데... 우리는 윽박만 질러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본다. 작품 중에 나오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작가(아마 이 작품의 작가 앤서니 버지스 자신이 아닐까?)가 말한 것 처럼 "인간, 즉 성장하고 다정할 수 있는 피조물에게 기계나 만드는 것에 적합한 법과 조건들을 강요하려는 시도"만 한 것이 아니었는지 말이다.

 

한번 더 묻는다.

"자,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

 

 

 

 

 

<루도비코 요법 시술장면을 담은 [시계태엽 오렌지, 1972]의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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