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매년 이맘때면 어디서나 한해를 정리하고 공과를 평가하기 마련이다. 어제는 영평상 시상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도 있었다. 상이란 받는 사람에겐 영광이고, 주변 사람들은 축하와 격려로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태는 매개체가 되어야 할텐데 어찌 대종상 영화제는 늘 잡음만 들끓는 것 같다. 이번에는 아예 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이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니 이쯤되면 영화제의 권위는 제로다.
상이란 것은 돌려먹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공감하는 공정성은 축제 자체를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시키는 낭떠러지다. 무슨 개근상도 아니고 이른 바 '참가상'이란 것은 있을 수도 없는 발상이다. 이렇게 막가파식 시상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도 영광의 흔적도 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받은 종잇장과 트로피들은 액자나 진열장 말고 쓰레기통에나 어울린다.
오늘 소개할 포스터들은 '어워드 스타일(award style)'의 범주안에 묶었다. 이렇게 자랑거리가 되는 전통을 만든 해외 영화제에 부러움을 느끼면서 포스팅을 시작한다.

[플래툰, 1986]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노골적인 어워드 스타일이다. 1987년 열린 제5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렇게 오스카만 전면에 내세우다니, 그만큼 권위와 신뢰가 느껴지는 포스터다.

[디어 헌터, 1978]
1979년에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음향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디어 헌터]는 영화속 러시안 룰렛 게임 논란으로 한때 홍역을 치렀지만 영화 자체의 감동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베트남 전쟁 후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연기로 오스카를 거머쥔 크리스토퍼 월켄의 초점 잃은 눈동자 연기는 압권이었다.

[귀향, 1978]
[디어 헌터]와 같은 해 경합을 벌였던 또 하나의 베트남전 소재 영화 [귀향]은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할 애쉬비 감독은 [디어 헌터]와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베트남전을 바라봤는데, 상이군인과 남겨진 가족의 비극 극복 과정을 잔잔하게 다루어 큰 호평을 받았다.

[헨리 2세와 엘리노 여왕, 1968]
1969년 아카데미상과 뉴욕비평가협회 상 수상 경력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의 원제는 [겨울의 사자]이다. 잠깐 스토리를 보고 가자.
전 유럽이 영토를 노린 정략결혼과 정치적 음모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1183년, 스코틀랜드에서 피레네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말년에 접어들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왕위 계승자를 정하기 위해 모든 관계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인다. 두 왕자를
앞세워 아버지에 대한 반역을 주도한 죄로 10년째 성에 갇혀 지내던 그의 아내 엘리노 왕비와 호시탐탐 영토의 반환을 노리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프랑스 왕의 여동생이며 헨리 2세의 정부가 되어버린 알레 공주, 정치적 야망이 가장 크고 용감한 셋째 리처드 왕자,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천박하기만 한 둘째 제프리 왕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만 무기력하고 불운한 막내 존 왕자가 모여든 궁정에서 또 한 번 왕권을 노린 음모가
싹튼다. 후대인들로부터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으로 손꼽히는 엘리노 왕비의 탁월한 계략으로 반목을 거듭하던 왕자들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고 아버지 왕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면서 잉글랜드 왕가와 나라는 파멸 위기에 놓인다. 헨리 2세는 그들에 맞서기 위해 냉혹한 결정을 내리고
피비린내 나는 가족 간의 왕권 다툼은 골이 깊어진다.
다음 영화

[세가지 색 ; 블루, 1993]
폴란드의 명감독 키에슬로브스키의 '세가지 색'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인 [블루]는 1993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뽕네프의 연인들] 부터 눈여겨 봤었던 줄리엣트 비노쉬의 아름다운 모습이 푸른색 톤의 서정적인 화면과 함께 오래 기억되던 영화다.

[이지 라이더, 1969]
반문화 영화의 대표가 되어버린 [이지 라이더]는 배우이자 감독인 데니스 호퍼에게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다. 노란색 종이에 가는 펜으로 그린 포스터의 분위기가 황량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미국(꿈)을 찾아 나선 젊은이, 그러나 어느 곳에서 미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문구와 딱 어울린다.

[달콤 쌉사름한 초콜렛, 1992]
이 멕시코 영화는 무려 10개 이상의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멕시코의 문화를 전파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때로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기도 한다.

[초콜렛, 2000]

[재키 브라운, 1997]
오늘 소개한 포스터들 말고도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특정 영화제의 상을 수상하면 메인포스터와는 별도로 어워드 스타일의 포스터를 만든다. 재개봉 할 때의 중요 홍보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흥행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종상 영화제는 그런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나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인데... 영화인들, 각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가 되어 버린 대종상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