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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ㅣ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평점 :
'라이벌(rival)'은 원래 '강물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리발리스(riva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시 씨족사회 시대에 강을 사이에 둔 두 부족이 서로 강물을 공통으로 이용하다가 시장이 생기면서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즉 시장에 내다 팔 물고기를 경쟁적으로 잡게 되면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쟁자인 라이벌을 없앤답시고 그 강에 독을 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대방은 물론 자신도 결국 파멸할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라이벌이라면 '파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을 추구한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영웅들이 피고 졌고 이들 상호간에는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라이벌이 존재했었다. 중국 전국시대의 항우와 유방, 삼국시대 말기의 두 영웅 김춘추와 연개소문, 성리학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골프계의 전설 아널드 파마와 잭 니클라우스 등등 수많은 라이벌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로를 자극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오늘, 상대 약점을 밟고 일서서야 하는 '적(enemy)'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경쟁, 상대방에 대한 인정, 그래서 스스로는 물론이고 세상을 더 위대하게 '발전'시켜 나간 라이벌들, 진짜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바로 한니발과 스코피오의 이야기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두번째 권 '한니발 전쟁'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로마의 집정관 스코피오가 벌인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9년~기원전 201년), 로마인들에게는 '한니발 전쟁'으로 더 유명한 고대의 세계전쟁을 다루었다. 제해권만 보자면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으면 로마인은 바다에서 손도 씻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지중해 최고 강대국이었던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에서 패해 지중해 연안의 제해권을 로마에 넘겨주었다.
그로부터 22년 후 아버지의 패배를 본 카르타고의 청년 한니발은 29세의 나이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형사고를 친다. 바로 이탈리아 본토를 전장으로 하는 대로마 복수전이 그것이다. 현대의 전차부대에 해당하는 코끼리 부대와 10만 병력을 이끌고 한겨울에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 젊은 장군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성공했다. "천재는 그 개인에게만 보이는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뻔히 보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기존의'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천재다(209쪽)"라는 시오노 나나미에 언급에 의하면 그는 가히 '천재'적인 장군이었다.
한니발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땅에서 자기가 원할 때 전투를 했다. 트레비아도 그렇고, 트라시메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땅으로 적을 유인했다는 점에서는 칸나이도 다를게 없다.
...193쪽
계속되는 한니발의 승전 소식에 로마인들은 어쩔줄을 몰랐다. 우리 조상들이 흔히 아이들을 야단칠때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했던 것처럼 로마인들은 "문간에 한니발이 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니 그 공포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좌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니발 전쟁이 중기에 접어들던 기원전 215년 이후 로마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위기가 닥치면 국론이 분열되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니발에게 참패를 당한 뒤에도, 이것은 로마의 진정한 강점으로 남아 있었다.
...228쪽
그리고 기원전 211년 로마에는 24세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수제자가 한니발이라면, 한니발의 수제자는 바로 이 스키피오가 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제자의 재능을 시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의 행운이기도 했지만, 한니발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262쪽)"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자신의 싸움에서 그대로 적용하여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고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싸움을 할 줄 알았다. 한니발처럼...
"...지금까지는 카르타고가 로마에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는 로마가 카르타고에 싸움을 거는 것입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한 짓과 똑같은 일을 우리 로마인이 아프리카에서 하는 것입니다.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한니발이 실증해준 것이기도 합니다..."
... 320쪽
그야말로 카르타고는 쑥대밭이 된다. 스코피오의 등장으로 로마는 수세에서 공세로 접어들게 되고 결국 기원전 202년 서로 12년의 시차가 있는 희대의 두 명장은 카르타고 '자마'에서 서로 마딱뜨린다. 결전이 있기 전 두 장군은 가까이서 대면할 기회를 갖는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을 테다. 강화를 제의한 한니발에게 젊은 스코피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운명이 변덕스럽다는 것쯤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 만약 로마군이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에 장군께서 자발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면, 그리고 내가 제안한 강화 교섭이 결렬되기 전이었다면, 장군의 제안은 장군께서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졌을 거요. ~~~ 한니발 장군, 장군께는 내일의 전투를 준비하라고 권할 수밖에 업소. 왜냐하면 카르타고인, 그 중에서도 특히 한니발 그대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사는 데 능숙하지 못한 모양니니까."
...355쪽
결국 이 싸움에서 천하의 명장 한니발은 전에 없던 대패를 하게된다. 단순한 하나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전체 전쟁의 행방을 결정하는 동시에 지중해 지역 전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무너진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스코피오는 '스코피오 아프리키누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권과 2권 두번에 걸쳐 자마 전투 이후의 두 명장의 또 한번의 만남에 대해 언급한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열전]에서도 읽은 기억이 나는 에피소드다.
자마전투가 있고 몇 년 뒤에 한니발과 스코피오가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소."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굽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업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번째가 되었을 거요."
...365~366쪽
이 에피소드가 실제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한니발의 장수로서의 자부심은 정말로 대단했다고 한다. 두 맞수의 대결은 역사적으로 스키피오의 승리로 끝났지만 인간 한니발이 과연 패자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자마전투에서 패하고 쇄락하기 시작한 카르타고는 멸망까지 이르러 지금은 지도상에 없는 나라가 되었지만 역사는 한니발의 용맹과 위대함을 잊지 않고 그의 혁신적인 마인드를 때마다 상기하고 있으니 나는 그를 불운한 천재로 기억하고 싶다. 스코피오도 마찬가지다. 적에게서도 배울줄 아는 열린 마인드의 소유자며 청출어남의 본보기로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둘 다 말로가 그다지 명예롭지는 않았지만 두 라이벌은 세상의 어떤 라이벌보다도 멋진 승부를 펼친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사욕이 아닌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인 한판 승부라는 점에서 경외감마저 든다.
p.s. 접어둔 페이지 들...
보통사람이라면 육체의 쇠약이 정신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훌륭한 업적을 쌓은 고령자에게 나타나는 완고함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훌륭한 업적을 거둠으로써 성공자가 되었기 때문에 완고해진 것이다. 나이가 사람을 환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사름을 완고하게 만든다.
...321쪽
추위도 더위도 그는 묵묵히 견뎌냈다. 병사들이 먹는 것과 다름없는 식사조차도, 식사시간이 되어서 먹는게 아니라 배고픔을 느끼면 먹었다. 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는 잠시도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그런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항상 우선했다. 그런 한니발에게는 밤낮의 구별도 없었다. 잠도 휴식도, 포근한 침대와 조용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342~343쪽
뛰어난 지도자란 단지 뛰어난 재능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인간이 아니다. 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반드시 상호관계다. 일방적 관계에서는 지속적인 관계를 바랄 수 없다.
...344쪽
고대의 다섯명장들라면 한니발과 스키피오 두사람은 거기에 반드시 들어간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 전체에서 뛰어난 명장 열명을 들라 해도 이 두사람은 분명히 들어갈 것이다. 역사는 수많은 명장을 배출했지만, 비슷한 재능을 가진 사람끼리 정면 대결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 드문 예가 자마 전투에서 실현되려 하고 있었다.
...3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