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평점 :


어처구니 없게도 처음에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제목을 보고 낭만적인 느낌을 받았다. '수레바퀴'를 '물레방아'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시 변두리, 고즈넉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옆에 까페가 붙어 있었는데 통유리 밖으로 커다란 물레방아가 돌아갔다. 수력으로 도는 것처럼 위장을 했지만 모터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수력이든 모터든 물레방아는 돌아가는 자체로 여유로움을 줬던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물레방아 아래서'로 단어 바꾸기를 하고 보면 확실히 느낌이 확 바뀌긴 한다. 물소리가 들리는 속에 동력이 만들어져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 같다. 예부터 물레방아간에서 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돌아가는 모습 자체로 근사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수레바퀴는 그렇지 않다.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한 대목을 보자.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 지도 모르니까." 

p.146

 

'당신'이라는 존칭을 해야 하는 젊은 아가씨들과 사귄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쩐지 끔찍하게 여겨졌다. 더군다나 이 아가씨는 지나치게 활달한 수다쟁이였다. 더욱이 그녀는 한스가 옆에 있거나, 그가 수줍어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p.207

 

달팽이 한 마리가 수레바퀴 아래 위태롭게 있다. 다행히도 수레는 멈추어 있다. 그러나 농부는 곧 떠나기 위해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수레바퀴에 깔려 큰 곤경에 처할 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위험을 인지한 달팽이,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쉽지 않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포심, 두려움, 좌절감. 최고조의 스트레스 환경 때문에 수레바퀴에 깔리기도 전에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모른다. 달팽이에게 심장이라는게 있다면 말이다. 아니면 심한 심리적 압박을 버티지 못해 먼저 삶을 포기하려 할 수도 있다.

 

이건 달팽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 이야기였고 우리 후배, 나아가서 우리 아들딸 이야기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한 지방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순수하고 내성적인 한 소년의 슬픈 이야기가 남의 나라 먼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잘 짜여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엉터리가 많다.

 

'수레바퀴'가 처음 발명된 이래 인류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이동시간이 짧아져 삶은 더 풍부하게 변화되었다. '수레바퀴'는 문명과 제도 따위의 사람이 만들어낸 도구의 총체로 읽힌다. 이러한 도구 중에는 가족제도와 학교, 종교 등이 삶과 밀접하게 작동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도구들이 형식에만 같혀 있을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과정을 생략한 채 오히려 사람을 '도구'로 바라볼 때 생긴다.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p.142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p.172

 

도대체 무슨 영광을 위해 아이들로부터 뛰어 놀 수 있는 권리와 순수한 동심을 앗아가고 있는가. 이렇게 말한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모든 어머니가 이런 마음으로 자녀들을 가둔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사례도 볼 수 있다. 가까이에는 한석봉의 어머니와 이율곡의 어머니가 있고 이웃에는 맹자의 어머니도 있다. 멀리 로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도 있다. 그 밖에도 더 찾아보면 많은 성공사례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 있는 훨씬 더 많은 실패사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답을 내 놓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면서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한스'가  생각난다. 세계적으로 유별난 교육열때문에 이제는 그에 대한 성과 보다는 부작용을 걱정하고 있는 현실 아닌가. 2012년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조사대상 청소년의 11.2%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변하는 나라, 자살하고 싶은 이유의 첫번째가 진학 및 성적고민(28%)인 나라가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성적이 떨어져서 투신했다던 어떤 여학생의 성적이 전교 10등 안쪽이었다니...에휴~~~.

 

'자식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이라면 이렇게 하면 안될 것이다. '교육열이란, 어쩌면 비뚤어진 자기과시의 수단'일 지 모른다고 지적한 강상구 씨의 말처럼, 자식이 잘 되길 바란다면 교육열이 아니라 우리 아이를 삶의 주체로 인정하는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줄로 믿는다. 주입과 강요와 억압이 아니라 꿈과 이상을 자유롭게 펼 수 있는 공간과 자유를 주어야 한다.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나 하나 꽃 피어 / 풀밭이 달라 지겠느냐고 /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 결국 풀밭이 온통 / 꽃밭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 산이 달라 지겠느냐고도 /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 결국 온 산이 활활 / 타 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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