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1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넘기면서 조르바가 춤추고 떠벌리는 대목을 접할 때마다 자간 사이로 '안소니 퀸'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혼났다. 어렸을 적에 내게 '안소니 퀸'이라는 배우는 매우 특별했다. 그 시절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은 거의 100% 더빙으로 방송되었는데 어떤 배우는 꼭 담당 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했었다. 이를 테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목소리는 송두석이 제격이었고 더스틴 호프만은 배한성만한 성우가 없었다. 안소니 퀸은 TV에서도 친숙한 노배우 이치우의 목소리가 딱이었다.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처음에 TV속 외국배우들이 우리말을 왜 이렇게 잘할까하고 궁금한 적도 있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25시], [라 스트라다]에서 안소니 퀸의 연기는 이치우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찰떡 궁합을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TV에서 더빙이 사라진 후 이것도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책을 읽는데 안소니 퀸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소설 속 조르바를 잘 연기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실 오로지 독서에 집중할 수 없는 단점도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 크레타 섬 태생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로서의 [그리스인 조르바(원제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시간')]는 적어도 내게 있어, 순수성을 잃었다. 그럼에도 작가의 시적인 문체와 영화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많은 부분들은 독서의 즐거움을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책벌레 주인공(작가 카잔차키스)에게 조르바는 니체가 말했던 '초인'의 이미지와 작가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지상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르바는 꾸밈 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수호자로서 사랑에도 신에게도 거침이 없다. 동양에서는 나이 마흔이면 '불혹(不惑)'이라고 해서 미혹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하는데 조르바는 그 이상의 경지이다. 지천명, 이순으로 이어지는 연대기적 개념이 아닌 늙지 않는 청춘이다. 작가도, 소설 속의 주인공도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동경으로만 끝나는 그런 성격의 인물이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작가처럼, 주인공처럼 알면서도 선뜻 '조르바'같은 삶을 살기에도 어려운 것이 또 우리네 인생이다. 정신만이라도 자유를 추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으리라. 내 머리를 강하게 때린 조르바의 말과 행동 몇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지 가르쳐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누구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누구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하느님께 돌린다고도 합디다. 그러니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 셈이지요. 보스, 나는 최악도 최선도 아니고 중간쯤 될 겁니다. 나는 내가 먹은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쓰니까요. 그다지 나쁠 것도 없겠지요?

p. 90

 

난 혹시 먹음 음식으로 비계와 똥만 만들어 왔던건 아니었는지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춤에 완전히 빠진 그는 손뼉을 치는가 하면 공중으로 뛰어 오르고, 발끝으로 돌다가 무릎을 꿇었다. 다리를 구부리고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마치 고무로 만든 사람처럼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를 보고 있으면 늙은 몸속에 그의 몸을 들어서 어둠 속에 유성처럼 날리고 싶어 안달하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공중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땅에 떨어질 때마다 몸이 몹시 흔들리면서도 다시 더 높이 뛰어올랐다가 또 쉴 새 없이 떨어지곤 했다.

p. 95

 

"...언젠가 기술자 한명이 가르쳐 줬는데 말입니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벌레가 우글거린다고 합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근데 또 안 마시면 목마르니. 보스,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다오. 정신도 번쩍 들 수 있고 말이오."

p. 155

 

얼마나 명쾌한 해결책이던가. 쓸데없는 속박은 벗어던지는 것이 상책이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대목에서 조르바의 시원시원한 언행을 목격할 수 있다. 어떤 성인의 말보다도 더 선명한 전류를 내보내는 그의 모습이 명배우 안소니 퀸의 형체를 빌어 자꾸 머리속을 맴돈다. 좋은 원작을 만난 훌륭한 배우가 대중들에게 남긴 훌륭한 유산이다.

 

마지막으로 책 표지에도 있는 문구를 언급하며 마치겠다.

 

"인간의 영혼은 날씨나 침묵, 고독, 누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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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기 2015-10-0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잔차키스는 한때 `성자의 질병(중세 수도자들이 육체적 욕망에 못이겨 유곽을 찾아 발길을 옮기면 몸에 종기와 부스럼이 났다는 희귀한 증상)`까지 앓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유명한 수도원 계곡까지 가서 고행을 거듭하는 수도자들을 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조르바처럼 `현재를 살자`였다. `자유롭게 살자`였다. ... 장자가 꿈꾼 `眞人`의 삶을 소설로 그련낸다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강상구의 [그때 장자를 만났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