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누군가로부터 조종당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떤 때는 의지와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내 뜻대로 한 일도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이미 신선하지 않다. 많은 대중들은 [매트릭스] 시리즈나 [트루먼 쇼, 1998] 같은 영화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라는 매체가 이런 철학적 사유를 진지하기 다루기 훨씬 이전부터 '신'과 '운명'이라는 사슬은 이미 인류의 최대 고민거리 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탁'을 통해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해 무수한 영웅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안해본 것은 아니나, 한낱 인간의 저항은 뻔한 결말에 대해 흥미진진한 과정을 제공해줄 뿐이었다. 오이디푸스가 그랬고, 아킬레우스가 그랬다. 손오공이 아무리 재주를 부려봤자 결국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영화 포스터는 훨씬 노골적으로 이런 비극적 상황을 활용한다. 꼭두각시를 활용해서 말이다. '꼭두각시 스타일(wirepulling style)'은 심각할 때도 있지만 희화화된 느낌을 더 많이 주는 이유도 어쩔 수 없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꼭두각시(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닐까?   

 

꼭두각시 스타일 포스터를 보자.

 

 

 

[대부, 1972]

 

  

[대부 2,1974]    [대부 3, 1990]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대부]시리즈다. 20세기 최고의 영화라는 [대부]시리즈를 작년 11월 경에 EBS를 통해 다시한번 본 적이 있었다. 돈 꼴레오네 가문이 미국에 정착하여 암흑가의 거대 조직이 되고 파멸하기 까지의 대서사시를 3주에 걸쳐 1주 간격으로 본 거다. 결혼식, 세례의식, 오페라 공연 같은 축제의 장면들과 경쟁자를 제거하는 잔인한 유혈 화면이 교차 편집된 장면들, 어두운 방에서 산하 조직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는 장면들이 진한 자욱으로 남아있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 격정적이다.

 

1972년에 공개된 [대부]의 포스터는 간결하지만 강렬하다. 이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The Godfather' 글자 위의 마리오네트 줄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후 개봉된 후속 시리즈의 어떤 포스터 보다도 인상적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것’이라는 말과 딱 들어맞는 포스터다. 마리오네트의 실을 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신탁처럼 꼴레오네 가문에 드리워진 운명이 장난노는 것은 아닐까.

 

 

 

[막을 올려라, 1992]

 

 

 

피터 보그다비치 감독의 [막을 올려라]는 연극 배우들의 사랑과 예술을 주제로 한 영화다. 주인공 로이드(마이클 케인 분)는  '노이지즈 오프'란 연극의 순회 공연을 준비중인 브로드웨이의 저명한 연출가다. 이쯤에서 이런 포스터가 나온 이유가 이미 드러났다. 영화든 연극이든 그 밖에 다른 무엇이라도 하나의 작품이(목표가) 완성되려면(이루어지려면) 구성원 각자가 제 역할을 하는 것 이상으로 연출가(총괄 책임자)의 조율 능력이 중요하다. 여덟 개의 인형을 엉킴 없이 혼자 조정하는 저 '조정자(wirepuller)'처럼.

 

 

 

 

 [스턴트 맨, 1980]

 

 

 

이 포스터는 피터 오툴이 출연한 [스턴트 맨]의 스페인어 포스터다. 카메론(스티브 레일스백 분)은 베트남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오지만 사랑하던 여인도 친구도 떠나고 설상가상으로 경찰에게 부상을 입힌다. 몸을 피하려 해변에 들어선 그는 그곳에서 영화 촬영중 익사 위기에 놓인 여배우를 구해준다. 그 일로 감독 일라이(피터 오툴 분)가 카메론을 스턴트맨으로 고용하게 되면서 사건이 펼쳐진다. [막을 올려라]에서는 연극 연출가, [스턴트 맨]에서는 영화감독이라는 설정이 비슷하다.

 

 


 

[토이, 1985]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꼭 사줄게." 이런 약속 함부로 하면 안된다. 가끔 아이들은 어른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기발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된다고 하면 '뻥쟁이'가 되고 해주자니 답이 없을 수 있다. [토이]는 그런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일반적으로 간단한 마리오네트 극에는 인형의 두 다리, 두 손, 두 어깨, 두 귀와 등의 총 9군데에 줄을 달아 공연한다고 한다. 줄을 더 달면 더욱 섬세하게 인형을 움직일 수 있겠다. 그런데 [토이]의 포스터를 보면 8개의 줄이 달렸는데 전부 손, 팔, 어깨 등 상반신에 집중되어 있다. 리처드 프라이어의 표정이 재밌다.

 

 

 

 

 [석양의 무법자, 1966]

 

 

 

세르지오 네오네 감독의 걸작 서부영화 [석양의 무법자]를 2008년에 미국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에서 특별상영을 했을때  Jeff Kleinsmith가 제작한 포스터도 꼭두각시 스타일로 재구성했다. 영화 줄거리를 상기했을때 원 포스터보다 이 작품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관련, 네이버의 파워 블로거 '주노'님의 글을 인용한다.

 

영화포스터에도 인디(Indie)가 있다...


영화포스터라 함은 영화제작사가 사진을 찍고, 디자인을 해서 극장에 배포하는것을 상식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극장이나 개인이 자체적으로 새롭게 사진과 디자인을 하는것은 저작권도 문제가 있지만, 비용문제도 만만치 않아서 그럴 엄두도 못내고 또 그럴 필요성도 못느낀다. 개봉관을 거쳐 동시상영을 하는 지방의 작은 극장이라도 전혀 새롭게 포스터를 제작하지는 않고 기존포스터 아래 극장이름만 인쇄한다. 그런데 미국 어느 한 지역극장에서 자체영화포스터를 제작해서 판매해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곳이 있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위치한 Alamo Drafthouse Cinema...

http://www.drafthouse.com/

 

 

1997년 처음 문을 연 이 극장에서는 처음에는 재상영관으로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텍사스와 버지니아에 걸쳐 많은 프랜차이즈 극장을 거느린 극장체인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개봉영화도 상영하지만, 컬트영화나 팬들의 요청에 의해 오래된 명화도 상영하고 자주 자체 무료 야외영화제를 개최해서 넓은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유명 아트스트들에게 의뢰해 아주 독특한 포스터를 출시해 판매하고 있는데, 한정수량 300장 내외의 이 포스터들은 매번 판매시작과 동시에 한정수량이 모두 매진되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후 이베이 같은 경매사이트에서 처음 판매가에 10배를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특히 이 포스터들의 특징은 소량 제작을 위해 옵셋인쇄가 아니라, 실크스크린 인쇄를 하기때문에 더 희소가치가 있다. 그리고 시리얼넘버를 손글씨로 써넣고 작가의 싸인이 있는경우도 있어서 이 극장 포스터들만 모으는 콜렉터들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이제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인,

Andrio Abero - Philippine, Erick Tan - USA, Jeff Kleinsmith - USA, Lil Tuffy - USA

Martin Ansin - Uruguay, Olly Moss - UK, Tyler Stout - USA

 

도 이곳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터들의 크기는 대부분 24X36인치로 국2절보다는 조금 크고 대국전보다는 작다.

하지만 이 포스터들을 앞에서 보고 있노라면, 그 실크스크린 프린팅에서 오는 질감이 보는이의 눈을 가득 채운다.

 by Zuno... ^L^

 

 

 

마지막으로 볼 꼭두각시 스타일은 다큐멘터리 영환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아카데미를 5회나 수상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이름이 전면에 나와 있는 걸로 봐서 그와 관한 전기 기록영화가 아닐까 싶다. [길], [벼랑], [달콤한 인생], [8과 1/2] 등 그의 대표작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고 있다. 꼭두각시 중 [인생은 아름다워]로 유명한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보이는 인형 하나가 가위로 줄을 끊고 있다. '나는 당신의 조종을 받고 싶지 않소'라고 외치는 것 같다. 펠리니 감독과 불화가 있었나?

 

 

 

[펠리니 : 타고난 거짓말쟁이, 2002]

 

 

 

 

우리는 신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운명'이든 '독재자'든 체념하며 살 순 없다.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예'를 할때나 '아니오'를 할때나 주체적으로 결정해야지, 운명 탓, 네 탓만 할 수 없잖은가. 단, 내가 '운전대'를 잡은 만큼 책임질 각오를 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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