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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가끔, 아니 자주 느낀다. 눈은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이 정말 많다. 나는 내 의식을 점령하고 있는 무엇이 허용하는 것만 본다. 너무나 자주 눈 뜬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 앞에서 동료가 나름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지만 나는 고개는 끄덕거릴지언정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적당한 순간에 대꾸를 하는 것인데, 멍청하게도 엉뚱한 말을 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곤 한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때면 누가 내 귀를 막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말을 잡지 못한다. 소리를 듣지만 귀머거리다.
큰 이모는 글을 읽지 못했었다. 용혁이가 태어나고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큰 이모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글을 배운 아이가 자신의 엄마는 읽고 쓰지 못한다고 알게 되었을 때 벌어질 일을 상상한 것이다. 큰 이모는 글을 배우고 싶어했다. 우리 집과 큰 이모집은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였고 난 학교 끝나고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꼬마였으므로 큰 이모의 한글 공부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 쯤 되었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때 알았다.
나의 학생은 곧잘 따라 왔다. 아이들이 말과 글을 배울때 사용하는 낱말 카드를 이용해 보기도 해보고 쉬운 동화책을 같이 읽기도 하면서 처음 며칠은 나도 큰이모도 재미 있었다. 그런데 큰 이모는 외래어를 말하고 읽는 것을 아주 어려워했다. 예컨대 '포크레인', '텔레비젼' 따위의 이제 거의 우리말이나 다름없게 된 외래어를, 큰 이모는 '뽀크리', '떼레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나를 더 화나게 했던 것은 그렇게 대충 말해놓고 끝에는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쓰기를 할 때는 정말 절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부끄럽다.
지금 큰 이모는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운전면허증도 취득했으며 글자를 해독해야만 하는 왠만한 일은 다 직접 하신다. 한글공부를 시작하고 몇개월이 지났을 때 시내를 걸으며 거리의 간판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큰 이모가 하신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눈 뜬 장님 신세 면하려나 보다."
36세의 한나 슈미츠와 15세의 미하엘 베르크의 특별한 관계를 다룬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었다. 소녀의 심성을 가진 성숙한 여인 한나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글이 가지고 있는 힘을 동경한다.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노래가 바로 글 속에 같혀 있다는 걸 안다.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통에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그녀는 타인의 음성을 통해서 글 속에 같혀 있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감춘다.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나는 수치로 여겼다. 역사 앞에서 큰 죄인이 되는 것보다 문맹이 드러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고, 교도소에서 글을 익히고 났을 때는 미하엘로부터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학수고대했다. 더 이상 녹음테이프는 필요치 않았는데도 계속되는 미하엘의 녹음테이프는 여전히 자신을 '문맹인'으로 취급하는 것과 매한가지 였으므로 그녀는 절망했다. 수치심이 절망과 만나자 그녀가 선택한 극단은 죽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미하엘은 '눈 뜬 장님'이 아니었을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진짜 '문맹'이 아니었을까? 상대방이 정말 원하는 것은 모르면서 자기 의무는 충분히 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이기적 존재가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