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준비한답시고 신림동 고시원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관악산 자락 바로 아래 자리잡았는데 두평 남짓한 방은 달랑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이라는 것도 이동이 불가능하게 벽과 일체가 된 구조여서 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땐 한숨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 방에서 10개월 정도를 살았는데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방 면적에 비해 크게 낸 창문이었다. 아침이 밝아오면 자명종 없이도 일어날 수 있을 만큼 밝은 햇살을 방안 가득 공급해 주었고, 답답한 머리를 시원하고 가볍게 해주었던 것도 그 커다란 창문이었다.
공부하면서 자주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현실 너머를 볼 수 있었던 희망의 구조였다. 유리창 너머의 현실도 방안의 현실과 별반 다를게 없었을 텐데 신기하게도 방안에서 바라 본 창문 밖은 같은 현실이 아닐 때가 더 많았다. 아마도 창문의 방향이 산 쪽이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쪽은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태반이 고시원 아니면 교회였다)들이어서 백수들의 고달픔이 느껴졌지만 내 방 창밖은 나무와 흙과 그 둘이 조화롭게 만든 산길 뿐이었다.
요즘은 창이 많은 집에서 살지만 그때만큼 창 밖을 의미있게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다. 하긴 그 때와 지금은 여러가지로 달라도 많이 다르다. 가끔 베란다 통유리 밖으로 차들로 가득찬 도로를 바라볼 때가 있다. 밤에는 다가오는 차들의 전조등 불빛과 멀어지는 차들의 후미등이 발산하는 붉은 빛에 끌리기도 한다. 창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늘 살펴보게 될 창문 스타일(window style)의 영화 포스터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영화 포스터에 등장한 창문의 이미지에는 대부분 두려움과 은밀함이 숨어있다. 창문을 통해서 엿보이는 시선은 대상을 똑바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시선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안에서 바라보느냐' 아니면 '밖에서 몰래 엿보느냐'인데 개별적인 포스터를 보면서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모두가 승자, 1990]의 포스터>
'누구나 안다, 모두가 유죄라는 것을.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카피가 내용을 짐작케한다. 그런데 제목을 보니 좀 아리송하다. 홍보 카피을 봐서는 '모두가 패자'라는 제목과 더 어울릴 듯한데 '모두가 승자'라니... 스토리는 이렇다. 뉴 잉글랜드 출신의 의사가 살해를 당했는데 의사의 어린 조카가 살인혐의로 기소되는 일이 벌어진다. 매혹적이지만 불안한 기색이 있는 여인 앤젤라(데보라 윙거 분)는 사립탐정인 톰(닉 놀테 분)에게 사건을 의뢰하는데 그녀는 "그 애가 죽인게 아니에요. '모두' 진짜 살인자를 알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과연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포스터는 사립탐정으로 분한 닉 놀테가 창밖에서 블라인드 너머로 누군가를(또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고 앤젤라를 연기한 데보라 윙거가 문에 기대어 역시 무엇을(또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개봉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고 로튼 토마토 평점도 좋지 않았지만, 이 영화 괜히 보고싶어 진다. 연기파 배우 닉 놀테, 데보라 윙거가 함께 연기했다는 것도 기대감을 갖게 한다.

<[베드룸 윈도우, 1987]의 포스터>
[LA 컨피덴셜, 1997]이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한 커티스 핸슨 감독이 그로부터 꼭 10년 전에 연출한 또하나의 스릴러 수작 [베드룸 윈도우]의 포스터를 보고 있다. 뭐 제목에서부터 창문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테리(스티브 구텐버그 분)는 사장의 부인 실비아(이자벨 위페르 분)와 연인이다. 회사의 파티가 있던 날, 두 사람은 테리의
아파트에서 정사를 나눈 후, 우연히 침실 창문 너머로 한 젊은 여자(엘리자베스 맥거번 분)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실비아는 테리와의
관계가 탄로날까봐 신고하지 못하는데 다음날 신문에서 이 사건 기사를 본 테리가 목격자로서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서 두 사람에게 위기가 찾아온다는 내용이다.
이 포스터의 시선은 방에서 밖으로 나있다. [모두가 승자]처럼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경우는 무엇을 살피거나 엿보는 시선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는 우연히 무엇을 목격하는 경우가 많다. 살인이나 폭행 같은 범죄의 목격자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나는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린다.

<[침실의 표적, 1984]의 포스터>
이미 한 차례 [드레스드 투 킬, 1980]을 통하여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 바 있던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히치콕의 [이창(rear window), 1954]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 했다. 줄거리를 보자. 배우 제이크(크레이그 와슨 분)는 폐쇄공포증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 애인이 바람을 피우는 현장까지 목격한 그는 결국
집을 나와 아는 사람의 집을 대신 관리해 주기로 한다. 그리고 그날 밤 망원경으로 다른 집의 아름다운 여인을 훔쳐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곤경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침실의 표적] 포스터의 시선은 다시 밖에서 안으로 집중된다. [모두가 승자]와 다른 점은 카메라 위치를 실내에 두었느냐 아니냐의 차이 뿐이다. 그러나 체감 강도는 훨씬 더 쎄다. 카메라를 밖에 둠으로서 수상한 시선이 바라보는 대상을 우리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인드를 슬며시 내리는 검은 그림자의 손이 엿보는 자의 엉큼한 속내를 대변하는 것 같다.
<[이창, 1954]의 포스터>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의 역할을 뒤집는다는 발직한 상상이 돋보이는 코미디 영화 [셜록과 나, 1988]의 포스터 분위기는 한결 부드럽게 표현되었지만 역시 탐정이 나오는 영화답게 창문의 이미지는 감시 또는 엿보기의 통로가 된다.

<[셜록과 나, 1988]의 포스터>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 1932]를 1979년에 재개봉 하면서 소개된 포스터는 창문 스타일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새롭다. 엿보기, 훔쳐보기의 도구가 아니라 시가전에서의 총격전 장소로서의 창문이다. 이런 창문은 의례 총구멍이 나있고 마치 총성이 들리는 듯한 긴박감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스카페이스, 1932]의 1979년 재개봉 포스터>
문제적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는 이미 고전 반열에 오른 토마스 하디의 원작소설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강간을 유혹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태어났다." 는 문장과 창밖에 서 있는 테스(나스타샤 킨스키 분)의 처연한 눈빛에서 그녀의 절망이 느껴진다. 이 포스터에서의 창은 다가서고 싶으나 그렇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장애물같다. 성냥팔이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테스, 1979]의 포스터>
지금까지 다소 무거운 영화들만 소개되었다. 기분전환이 필요한 지점이다. 창문 스타일의 포스터를 가진 영화들도 따뜻하고 유쾌한 것들이 많다. 아래처럼....

<[두 얼굴의 탐정, 1989]의 포스터>

<[나 홀로 집에, 1990]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