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옛날 얘기지만 한 때 형과 함께 쓰던 내 방에는 언제나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자이언트, 1956],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61], [대탈주, 1963] 같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 영화들 부터 [타워링, 1974], [프레데터, 1987], [남부군, 1990], [바톤 핑크, 1991], 그리고 [가슴달린 남자, 1993] 등에 이르기까지 장르 불문, 시대 불문 여러 영화들이 함께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것은 액자에 담겨서, 어떤 것은 책상을 덮은 유리 아래에, 흔하게는 벽 한면을 가득 메웠었다. 그렇게 영화 포스터는 나와 생활을 함께 했다.
12년전 제주도에서 근무했을 적에 자주가던 극장이 있었다. 멀티플렉스 극장 '프리머스'였는데 낯선 첫 근무지인데다 결혼 전이어서 자주 가던 극장이었다. 다른 극장과는 달리 여기서는 상영이 끝난 영화들의 오리지널 대형 포스터를 테이블에 죽 늘어놓고 무료로 나누어 줬다. 이 시기 2년 동안 수집한 대형 포스터가 스무장 남짓 되는 데 지금도 보관용 원형 통에 잘 보관되어 있다. 바빠서 그런지 열정이 식어서 그런지 꺼내본지가 몇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다 보면 가끔 '액자 구조'의 소설을 접할 때가 있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이 우선 떠오른다. 영화 포스터도 이런 비슷한 것이 있다. 포스터 안에 포스터가 있는 것이다. 영화 포스터 이야기 다섯 번째, 벽보 스타일(poster style) 이야기다.
이런 유형 중에 가장 대표적인 포스터는 역시 [스타워즈, 1977]가 아닐까. 여러가지 버전의 포스터 중 D-style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포스터 아티스트 드류 스트러잔의 작품이다. 이 천재 아티스트는 과학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찰스 화이트 3세와 함께 이 포스터 작업에 착수하면서 조지 루카스와 첫인연을 맺었는데, 결과물을 확인한 조지 루카스는 큰 만족감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스타워즈 : 에피소드 4, 1977]의 포스터>
우주시대의 서부영화라는 평을 들었던 SF의 고전, 포스터 마저 고풍스런 느낌이다. '오래전 멀리 떨어진 은하계에서'라는 홍보 카피와 함께 주요 캐릭터가 표현되어 있다. 후미진 골목길 어귀에 있는 허름한 벽에 찢어진채 덕지 덕지 붙어있는 포스터들, 마치 폐허로 변해버린 우주의 황량함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드류 스트러잔이 그렸던 벽보 형식의 이 오리지날 포스터는 현재까지 조지 루카스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니 대단하다. 그리고 탄생 후 28년이 지나 [스타워즈 :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2005]편에서 이 포스터는 다시 한번 부활한다.

< [스타워즈 :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2005]의 포스터>
여섯 편의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제작된 이 영화의 포스터가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영화의 포스터를 거의 그대로 베껴낸 건 영화에 대한 오마쥬이자 포스터에 대한 오마쥬와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포스터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 전설적인 시리즈의 신작이 곧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니 학수고대하는 사람들 많겠다.
같은 유형의 포스터 하나 더 소개하겠다. 아래 영화는 존 린치, 헬렌 미렌이 열연한 [칼의 고백, 1984]이라는 영국 영화다.

<[칼의 고백, 1984]의 포스터>
직장에서 해고당한 북아일랜드 청년 칼은 어느 날 도서관에 새로온 여직원인 젊은 미망인 마르셀라를 보고 사랑을 느끼지만 예전에 그가 IRA(아일랜드 공화군)의 대원이었을때 살인한 사람이 그녀의 남편인 것이 밝혀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이다. 마지막에 서로 사랑을 확인하지만 살인자로 체포되어 끌려가는 칼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마르셀라의 모습을 비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 분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포스터는 낙서로 가득한 벽(peace, love라는 단어가 선명하다)에 떨어질 듯 붙어있는 포스터를 통해 민족적 분규라는 혼란한 상황하에 펼쳐지는 정열적인 사랑 이야기를 건조한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액자 구조'가 그러는 것처럼 이런 타입의 포스터는 관객과의 일정한 거리두기를 의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벽보 스타일에는 영화 포스터를 활용한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경기 포스터, 현상수배 포스터, 포고문 형태의 벽보 스타일도 있다. 이런 경우, '액자 구조'를 빌리지 않고 직접 해당 벽보 형식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래 [록키 2, 1979]의 포스터는 복싱 포스터를 차용했다. 과거 TV가 귀하던 시절 경기장에 직접 가지 못하는 복싱팬들을 위해 복싱경기를 녹화해서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했었는데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보다. [록키] 시리즈가 복싱영화 였기에 가능한 포스터가 아니었나 싶다. '세기의 재대결'이라는 복싱계의 상투적 멘트가 눈길을 끈다. 이 영화에서 록키 발보아는 드디어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오른다.

<[록키 2, 1977]의 독특한 포스터>
그 다음에 주목하고 싶은 포스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생소할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TV에서 본 기억이 나는 서부 영화로 외모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 괜히 친숙함이 느껴지는 배우 제임스 코번이 출연한 [허망한 경주(Bite the Bullet), 1975]의 포스터다. 이 포스터는 미국 서부개척시대 마을 입구나 보안관 사무실 문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방' 또는 '포고문'의 틀만 빌려 왔다. 핀으로 고정시킨 것으로 봐서 판자로 된 벽에 부착되었으리라. 종이의 헤짐이나 색 바램 정도는 꽤 오래 밖에서 바람과 햇빛에 노출 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허망한 경주(Bite the Bullet), 1975]의 포스터>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현상수배 포스터 형태이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수배범 모두가 해리슨 포드가 연기했다는 것이 재밌다. 첫번째 것은 [스타워즈, 1977]의 캐릭터 한 솔로를 수배한 것인데 이 포스터는 공식으로 인정된 [스타워즈]의 포스터가 아니다. 두번째 것은 [도망자, 1933]의 주인공 리처드 킴블 박사가 아니라 배우인 해리슨 포드를 수배한 것처럼 표현되었다. 영화속 수배 전단에는 '해리슨 포드'가 아니라 '리처드 킴블'로 되어 있다.

<이 포스터는 공식적인 [스타워즈] 포스터가 아니다. 영화의 소품 아니었을까?>
<[도망자, 1993]의 수배전단지 형 포스터>

<영화 속 '리처드 킴블'의 수배 포스터>
영화 포스터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때로는 그때 그 영화를 생각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새로운 것을 상상하게도 한다. 다른 일에 필요한 아이디어도 제공해 주고 기분이 다운 되었을 때 빠른 회복을 돕기도 한다. 영화를 한 편 보기에는 시간이 없을 때 해당 포스터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감상할 수 있어 오히려 여유를 준다.
좋은 하루 되시길....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