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대위의 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평점 :


젊은 나이에 결투로 생을 마감한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의 [대위의 딸, 1836]은 작가의 일생처럼 참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귀족 장교인 표트르 안드레비치와 그의 연인 마리아 이바노브나, 그리고 연적 슈바브린의 삼각관계가 황제를 참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푸카초프와 연결되면서 역사적 사건과 조우한다. 인물묘사는 아기자기하며 이야기 전개는 꽤 속도감이 있는 편이다. 거기에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나이 많은 몸종 사베리치가 펼치는 극의 감초 역할은 썩 괜찮은 재미를 선사한다.

 

우연히 푸가초프에게 작은 호의를 베푼것이 인연이 되어 러시아 키르기스 요새의 호위장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으로부터 여러차례 목숨을 구하게 되는 표트르. 애매한 위치에 빠진 그는 반란군이나 진압군 양측으로부터 고난을 겪게 되지만 천성이 정직한 덕택으로 연적을 물리치고 사랑을 차지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표트르의 수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차르 체제, 농노제 등으로 지배 계급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착취가 극에 달에 있었다. 푸시킨은 이 소설을 발표하기 전인 1833년 여름에 2개월에 걸쳐 푸가초프 농민 반란의 자료를 수집하여 [푸가초프 반란사]를 썼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푸가초프 반란의 주원인을 진단했는데 민란의 주도세력은 사회 경제적 불만과 억압을 당하던 민중이며, 그 주동자인 푸가초프는 그들의 불만을 하나로 모은 수괴일 뿐이라고 보았다그로부터 2년 후 이 역사 연구서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대위의 딸]이다. 억압적인 차르 체제하에서도 반란 농민군의 묘사를 꽤 객관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다. 

 

푸가초프에 대해 묘사한 몇 장면을 보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푸카초프와 나의 길안내를 했던 자와는 놀라울 만큼 흡사했던 것이다. 푸카초프와 그 사내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나를 살려 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상스런 인연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떠돌이에게 주었던 어린이용 가죽 외투가 나를 교수형의 밧줄에서 구해 주기도 하고, 하찮은 여인숙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내고 있던 주정뱅이가 요새를 차례차례로 포위해서 국가를 뒤흔들어 놓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111.p

한 자리의 사람들이 자리를 좁혀 주었다. 나는 잠자코 테이블 끝에 앉았다. 내 옆에 있던 키가 크고 미남인 젊은 카자흐가, 내게 값 싼 포도주를 따라 주었지만 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 일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푸카초프는 상석에 앉아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괴고 큰 주먹으로 검은 수염을 받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 생김새는 단정해서 비교적 호감이 갔으며, 잔인하게 보이는 곳은 조금도 없었다.                  114.p

당시 폴란드를 병합하고 남하 정책으로 오늘날 흑해와 크림 반도, 심지어 알래스카까지 세력을 떨쳤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독일 공주로서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다가 이후 여제가 되었다)의 기세가 푸카초프의 반란으로 주춤하게 되었다. 곧 반란군은 진압이 되었지만 러시아 황실 입장에서는 한창 좋았던 기세에 찬물을 끼얹은 수괴 푸카초프가 반역죄인임은 물론이거니와 민중에게 야만인이나 배은망덕자, 좀 과장에서 뿔난 짐승으로 각인시키고 중한 처벌을 내림으로써 또다른 반란의 씨앗을 처음부터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은 반란이 있은 후  한 세대가 훌쩍 지난 때였지만 여전히 차르 체제였으며 별반 바뀐 것 없던 당시 러시아 분위기에서 푸카초프에 대한 위와 같은 묘사는 놀라운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푸카초프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우화는 인간의 본성까지 파고든다.

푸카초프가 뭔가 미칠 듯한 감정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말했다.

"내 자네에게 옛날 얘기를 하나 하겠네. 내가 어릴 때, 칼뮈크인 노파한테서 들은 걸세. 어느 날 독수리가 까마귀에게 물었지. '여보게 까마귀, 자네는 이 세상에서 3백 년이나 살 수 있는데도 나는 모두 합쳐서 33년밖엔 살 수 없으니 이건 어째서 그런가? 까마귀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말입니다, 아저씨. 당신은 생피를 빨아 먹고, 저는 시체를 먹고 살기 때문이지요.' 독수리는 여기서 생각했다네. '그럼 나도 한 번 먹어 보세.' '좋습니다.' 독수리와 까마귀는 날아다니다가 쓰러진 말을 멀리서 발견 쪼아먹기 시작했지만, 독수리는 한두 번 쪼아먹어 보고는 날개를 치더니, 까마귀에게 말했다고 하네. '나는 못먹겠어. 까마귀야, 썩은 고기를 3백년이나 먹느니보다는, 한번만이라도 생피를 배불리 빨아 먹는 편이 좋겠네. 그 다음에는 운명을 하늘에 맡길 뿐이야.'라고 말이야"

이런게 문학의 힘인가. 비록 연애소설(그것도 잘 빠진 연애소설이다)의 겉모습을 했지만은 말년에 차르에 검열과, 적의와 의심에 찬 궁정 세력가들 틈에서도 그의 펜은 정직했다. 결국 음모에 가득찬 결투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고전이 되어 아직까지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p.s. 푸시킨에 이어 러시아 리얼리즘을 확립한 고골은 이 작품 [대위의 딸]을 두고 "가장 뛰어난 러시아 산문 문학"이자,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실보다 더 진실한"명작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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