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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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를 풍미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1821~1881)를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통해 다시 만난 이유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이 책의 제목에서 지난 달 읽었던 또다른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는 점과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작가의 대표작 [죄와 벌]과 재회했었던 기억이 알라딘 중고서점 한 켠에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이 낯선 소설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1부 '지하의 세계'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1부 '지하의 세계'와 2부 '진눈깨비의 연상에서'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수기의 필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고, 자신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 나타난 까닭을,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있다고 소개한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간장이 나쁘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기는 나 자신의 병에 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내 몸의 어디가 나쁜지 그것조차 확실히는 모른다.

1부의 첫 문단이다. 첫 도입부가 인상적인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과 함께 앞으로 어떤 강렬한 느낌으로 남을 '시작'이다. 40년 가까이 지하생활을 하고 있다는 우리의 주인공은 시작부터 속시원하게 자기가 정상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다. 동시에 이 고백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위협처럼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횡설수설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창 떠들어 놓고 여태 했던 이야기를 뒤집는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이니 이 친구 대책이 없다. 20대에 지금으로 말하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은 왜소한 체구에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위 진상 민원인을 상대할 때도 드러내 놓고 화풀이도 못한다. 속으로나 소심한 복수를 하다가 가끔 화를 내면 며칠이나 불면증으로 시달릴 만큼 유약하다. 

나는 짓궂은 인간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위인이다. 악인도 될 수 없었고, 선인도, 비열한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우연히 먼 친척이 유산을 상속해 주는 바람에 '오직 먹고 살려고' 해왔던 관리생활을 그만 두고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 생각에)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을 향해 넋두리를 쏟아낸다. 그의 이 무조건적인 적개심이 어디에서 왔을까? 그의 악의에 찬 발설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가자니, 스스로 여러 가지 모험을 궁리해 내서 인생을 창작할 필요가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날 이때까지 얼마나 많이 화를 냈는지 모른다. 그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공연히 화를 내는 것이다. 나 자신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일부러 나 자신의 약을 올려주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로 화가 나서 못 견디게 된다.~~~이것 역시 생활의 따분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지하생활자'는 19세기의 교양인임을 자인하면서 높은 지적 수준으로 '주위의 누구보다 현명'하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절반으로도 충분하다며 '선'이라든가 아름다운 것으로 대표되는 위선을 혐오하고 마치 '벽'처럼 누군가에 의해 규정된 규칙을 희롱한다. 예컨데 '2+2는 4' 같은 수학 산식을 조롱하며 오히려 '치통'같은 것에 쾌감을 느낀다.

 

물이 담긴 비이커에 떨어진 한방울 올리브유 처럼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다가 누군가의 사소한 언행에도 모욕의 감정을 느낀다. 이런 것이 한 번 두 번 누적되어 모욕이 '숙명'처럼 느껴졌을 때 그는 그만의 토굴속으로 들어가 빗장을 걸어 버린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주인공은 '의식의 과잉'에 빠져 있는 환자이다. 외로움이 정신병을 만들었다. 그는 그 원인 제공자에게 화살을 겨누기 위해 그 무엇을 찾고 있다. 악의에 차 복수할 대상을 찾고 있다. '사람이 복수를 하는 것은 그 안에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두 발로 걸어다니는 배은망덕한 동물'이므로 복수는 정당할 수 있다.

 

지하생활자는 독자를 겨냥해 따지듯이 화풀이하다가 하소연하다가 하면서 자기가 글로 남기는 이 행위 자체를 애매하게 설명한다. 진짜 이야기는 2부 '진눈깨비의 연상에서'가 될 것임을 정말 긴 독백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2부 '진눈깨비의 연상에서'

 

24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인공은 자존감이 낮아 직장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누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고 길거리에서 누구와 어깨라도 부딪힐라 치면 마음 깊숙히 '꽁'하고 있다가 쫓아가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현실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할 수 없고, 남다른 '두뇌'를 활용한 상상속에서만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비겁함, 무능함, 소심함을 정당화한다. 멸시와 모욕과 치욕 따위는 전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만 항변은 그렇게 심연으로만 빠져들다 드디어 현실에다 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난다.

 

우연히 알게 된 친구의 송별연 자리에 우격다짐으로 참석하고자 한 주인공은 출발 전 까지 갈까말까를 한 참 고민하다가 결국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그들은 아무도 와 있지 않았을뿐더러, 예약한 좌석을 찾아내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테이블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된 판인가? 애써 물어본 끝에 간신히 급사한테서 안 것은, 회식은 다섯시가 아니라 여섯시로 약속됐다는 것이다. 식당측에서도 여섯시가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물어보는 것조차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이제 겨우 다섯시 이십오분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시간을 변경했다면 무슨일이 있어도 마땅히 알려줘야 할 게 아닌가. 그런 때 이용하라고 속달 우편이라는 것도 있다..... 그런데도 나한테 나한테.... 더군다나 급사들 앞에서까지 이런 개망신을 시키다니! 

 105~106P

 

이렇게 누구도 원하지 않은 장소에 나타난 '지하생활자'는 모임 내내 무리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무리는 마지막 회포를 풀기 위해 창녀촌에 가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여자를 살 돈도 없어 그를 끼어주지 않으려는 동창생들에게 화대를 구걸한다. 결국 돈을 빌리지만 심한 모멸감을 던진 후 먼저 떠난 동창생들을 뒤쫒으며 외친다.

 

"이게 바로 그거다. 마침내 현실과 맞부딪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속으로 결투까지 염두해 두고 쫒아간 곳에서 그들은 만나지 못하고 창녀 리자를 만나게 되자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지하생활자. 난생 처음 우월적 지위에서 착한 청자를 대상으로 올바른 삶을 설파하는 이 은둔 고수의 모습에 리자는 좋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찾아온 그녀에게 무지막지한 상처를 주면서 다시 삐뚤어진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지하생활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지하세계'로 파고들어 '지하생활'에 길들여져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는 '겁쟁이'이자 '노예'였고, '외톨이'였으며, 공상에 사로잡힌 '책벌레'에다가 '웃음가마리(하는 짓이 남과 달라서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였다. '파리 새끼'나 '벌레 새끼'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폭군' 노릇도 했던 '바보'같은 자였다. 지나치게 높은 자존감, 그러나 현실세계에 대한 부적응은 세상과 조화하거나 타협하는 방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받은 모욕과 멸시에 대한 분노를 어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서로 위로가 될 수도 있었던 '리자'를 향해 폭발함으로써,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제불능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자신 만의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참 불쌍한 한 인간을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의 한줄 한줄을 꼼꼼히 읽다 보면 슬픈 생각이 든다. '지하생활자'가 한 몸으로 받아 낸 그의 문제가 오롯이 그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여러 모순들이 만들어 낸 돌연변이 같은 '괴물'에 불과하다. 권위가 흔들리는 신분 사회, 숨막힐 정도로 엄격한 교육제도, '차르'의 독재와 맹목적인 복종이 낳은 삐뚤어진 가치체계 등이 낳은 사생아다. 그러나 이 따위 불합리 부조리로 콘크리트화된 사회에 어쩜 이렇게 무력할 수 있는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다니.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또 얼마나 많은 '지하생활자'가 존재할 것인가. 여러 이유로, 19세기 러시아와는 비교도 안되는 수많은 외톨이들이, '히키코모리'가 자취방에서, pc방에서, 골방에서, 학교에서 스스로 외부를 차단하거나 차단당한 채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있음을 매일 매일 목도한다. 과학은 발전하고 세상은 더 편리해졌다고 하지만 사람은 더 외로워졌다.

 

"빌라에서 어머니는 변사체로 발견되고 아들은 침대에서 아사 직전의 상태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옆집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웃집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확인한 내용입니다. 사망한 어머니는 거의 백골화가 진행되어 정확한 사망 시간을 추정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들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경찰은 사체를 부검하는 한편, 어린 아들의 건강이 회복하는 대로 사건의 진상을 밝힐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뉴스는 이제 드물지도 않다. 재앙이 일상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공포가 어디나 만연해 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사람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울 때 서로 돕고 바쁠 때 손을 보태 일을 거들고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사람 냄새 풀풀 내며 살던 때도 분명 있었는데... 숨쉴 구멍을 주자. 바쁜 세상 빠르게만 살지 말고 서로서로 손을 내밀며 살자. 나는 순진하게도 누군가가 어려울 때, 외로울 때 용기를 내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이상 일상이 공포가 되지 않도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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