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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백수생활을 벗어나지 못했을 무렵, 나는 모교 도서관을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법학도로서 그때까지만 해도 형법, 형사소송법, 민법, 행정학 따위의 수험서들이 익숙하지 않았었고 사실 공부하기 싫은 날이 많았다. 뜬금없이 다가온(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중도에 진로를 바꾸게 된 당시의 많은 청춘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에 신세지는 것이나 면해볼까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때 나름대로 찾은 활력소가 LA다저스의 박찬호가 등판하는 메이저리그 게임과 목요일 심야 유시민씨가 진행하던 100분토론이었다. 박찬호가 희망없는 세대에 희망을 던진 영웅이었다면 유시민의 100분 토론은 지적으로 미숙아였던 내게 자극제 역할을 해주었다. 세상엔 참 똑똑하고 말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매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 중 제일 신기한 것은 진행자였다.
사실 유시민씨가 100분 토론을 진행하기 전부터, 진행자를 그만두고 나중에 정계에서 활약할 당시 그가 보여준 언변은 정치적 색을 떠나서 여러 논객 중에 최고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논리의 짜임새나 말할때 보여주는 표정, 억양, 몸짓 등이 '혹시 저 사람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영화 [맨 인 블랙]을 보면 정치인, 영화배우, 스포츠 스타 등 특출난 재능으로 유명인이 된 많은 사람들이 사실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이었다는 설정처럼 말이다.
그가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 그의 글솜씨를 처음 접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유시민의 100분토론보다 훨씬 전 20세기 어느 때였을 것이다. 낡고 헤진 채로 방구석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던 것을 우연히 읽게 된 것이었는데 아마도 독서모임에 열심이던 형이 읽던 책이었으리라. 세계사의 여러 사건들을 간단하게 요약해 놓은 형태의 책으로 기억되는데 저자가 수배 중에 반지하 자취방에서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 그의 나이 20대 후반이었다니 난 그와 비슷한 나이에 아직 역사와 현실,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 드뢰퓌스 사건을 접했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을 보았으며, 검은 이카루스 말콤 X를 만났다. 그리고 아마도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 [청춘의 독서]를 읽는다. 저자가 젊은 시절 읽었던 많은 고전을 다시 읽고 그때의 느낌과 50대의 저자가 느낀 것을 정리한 책이다. 목록을 보면 소설로는 [죄와 벌], [대위의 딸], [광장],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있고, 이론서로는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인구론],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역사란 무엇인가?]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맹자], [사기]까지 총 14편의 고전이다.
고백하거니와 부끄럽게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만이 내 좁은 독서목록에 포함되어 있을 뿐 익숙한 저서명에 비해 직접 읽은 책이 없다. 욕심에 우선 [광장],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역사란 무엇인가?]를 구매했다. 그렇다. 순전히 욕심이다. 의무감과도 같은 욕심이다. 그러나 욕심 한번 부릴만 한 것 아닌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늦은 보상이 필요했기도 했지만 마치 광고 카피와도 같이 [청춘의 독서]에 소개된 유시민씨가 각 고전에 붙힌 유혹이 생뚱맞은 욕망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를 테면 저자가 고 최인훈 선생의 [광장]에 붙인 카피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소개하면서 가진 의문 '슬픔도 힘이 될까.', 또는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두고 묻고 있는 '내 생각이 정말 내 생각일까.'라는 표현은 직접 그 명제와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기를 강요하고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말을 경유한 간접적 감동 말고 직접 체험을 통한 진짜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
내일 난 [광장]을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