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 하
김성한 지음 / 달궁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혼란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최초 통일 제국을 건설한 영웅. 아방궁, 만리장성, 여산릉, 불노불사를 쫓아 동남동녀 6000명을 뱃길로 내몬 폭군... 단편적이고 지극히 말초적인 정보 이외 내가 알고 있는 시황제는 어떤 모습인지 오랜 기간 동안 잊혀져 있었다. 

 

최근,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고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 공자의 삶을 다룬 우간린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것인가], 그리고 항우와 유방의 쟁패전인 [이문열의 초한지]를 읽었다. [시황제]는 시기적으로 전국시대와 한제국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진시황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초한지] 1권에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으나 이야기로서 좀 더 드라마틱한 시황제의 일대기가 궁금한 나머지 눈에 들어온 소설이 김성한 작가의 [시황제]였다.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 출신의 거상 여불위는 여러 나라 사이에서 무역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는 더 큰 한 건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정세는 전국 7웅 중에서 단연 秦나라가 앞서고 있었다. 죽고 죽이는 혼란한 전국시대를 마감할 수 있는 유력한 세력은 진나라 밖에 없다고 판단한 여불위는 일생 일대의 배팅을 한다. 투자 대상은 세상의 관심 밖에서 조나라에 볼모로 가있는 진나라 왕손 영이인.

 

이 얼뜨기를 때빼고 광을 내어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진나라 왕위를 물려받게 하는 것, 성공만 한다면 이것은 어떤 장사보다도 더 많은 이윤을 남길터. 여불위는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의 여자, '주희'마저 영이인에게 바친다. 주희가 여불위에게서 영이인에게로 옮겨 간 후, 12개월만에 아이가 태어나니 이 아이가 바로 영정, 훗날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시황제이다. 누구는 영정의 아비가 여불위라고 하고 또다른 누구는 영이인이라고 한다. 전자는 시황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그의 공을 깎아내리려는 무리이고 후자는 '사실은 사실일 뿐' 악의적인 왜곡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일 테다. 심지어 [사기]의 저자 사마천 마저도 본기에서는 영이인의 아들로, 열전에서는 여불위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불현듯 그리스 로마 신화의 불세출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출생에 관한 웃지 못할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랑하는 알크메네와 결혼할 기대를 품고 전장에서 서둘러 돌아온 암피트리온은 알크메네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를 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지 않은(?) 알크메네가 한다는 말, 간밤에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도 아직도 원하느냐? 암피트리온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소리냐 했다. 사실인즉 암피트리온이 알크메네의 침실을 찾기 전 가짜 암피트리온으로 몸바꾸기를 한 제우스가 몇날 몇일을 알크메네와 거친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알크메네는 쌍둥이를 출산했는데 그 형이 헤라클레스, 동생이 이피클레스 였다. 말만 쌍둥이지 누가 최고의 신 제우스의 아들이고 누가 호구가 된 암피트리온의 아들인지 이후 두 아이의 행적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영정(시황제)과 헤라클레스, 두 불세출의 영웅 모두 출생에 있어서 누구를 아버지로 불러야 할 지 헷갈리는 공통점이 있다. 영정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왕위에 오르고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 어미(주희)는 한때 기녀였고 항간에서는 그 아비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던 터였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비록 남의 나라에 볼모로 와있는 신세이나 강대국의 왕손이 분명한 영이인의 자식이었다.

 

시황제, 그는 출생부터 영웅의 조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헤라클레스의 예에서 뿐만 아니라 한다하는 영웅치고, 한 나라의 역사를 연 시조 치고 평범한 출생이 몇이나 되는가. 진실이건 아니건, 불세출의 위인이거나 그 반대이거나, 권력을 쥔 자들의 체계적 조작을 통해 말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대중들의 집단적이고 집요한 편집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것과는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그런 사후 조작을 모두 제거하고 주관이 개입할 수 없는 자연과학적인 사실만을 두고 보더라도, 영정의 출생은 기구하다. 유별난 부모를 두었고, 이국에서 태어나 핍박을 받으면서 생사의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 어려서 부터 말수가 없고 표정의 변화가 드물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겪은 세상의 풍파가 가르쳐준 처세술이 아니었을까?

 

어린 나이(13세)에 즉위한 후, 어머니 주태후의 섭정과 어머니를 둘러싼 여불위와 노애의 추악한 밀약, 그리고 노애의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영정의 개입은 아주 미미하다. 어른들의 놀음에 아이를 끼워주지 않았던 것일까? 다 알면서도 최후의 역전을 위해 자존심을 죽이고 스스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일까? 주태후의 섭정이 끝나고 시황제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면서부터 군주로서 그가 처음으로 바로잡은 것은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헝클어진 실타래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증조할아버지 소양왕부터 꿈꿔왔던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한 첫걸음도 내딛기 힘들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전국 통일 과정에서 첫번째 제물이 여불위의 고국 한나라 였음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아비를 진왕으로 만들어 결국 자신이 왕이 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도 여불위, 통일의 기틀을 잡아 준 것도 여불위였지만, 어미의 전남편 이자 노애라는 요물을 들여 왕실을 웃음거리로 만든 장본인도 여불위였다. 실로 애증의 결정체였지만 아무래도 사랑보다는 증오 쪽으로 저울추가 기운 것은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여불위를 제거하고 그가 난 나라까지 없애버려야만 자신과 왕실을 둘러싼 정통성 논란이 잠들 것이 아니겠는가.

 

두번째 목표물은 어머니의 고국, 자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조나라였다. 자신의 외가와도 같은 나라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고단했고, 왕실을 유린했던 노애의 출신지이기도 한 조나라를 오래 남겨둘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진왕이 된 영정의 통일 과정은 자신을 둘러싼 갖은 오욕들을 씻어내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결국 어지럽던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그는 왕에서 황제가 되었고 스스로 짐이라고 일컬었다. 모든 왕들이 그의 앞에서 굴복했으며 법치주의을 앞세와 천하의 민초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귀속시켰다. 각기 다른 도량형을 통일하고, 봉건제를 혁파하여 군현제를 도입했으며, 치도를 건설하여 주요도시의 교통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였다. 이런 가운데 책을 불사르고 유가들을 구덩이에 묻어버리는 지울수 없는 역사의 오점을 남기기도 하고, 만리장성이다 아방궁이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켜 민초들의 삶을 팍팍하게 하기도 했으나 당대 시황제는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영광이 고작 15년도 지속되지 않았으니 진시황제의 삶과 더불어 통일 진제국은 순간 화려하게 타올랐다 스러져 버린 불꽃 같았다. 잔인한 것이 역사라고 했다. 진제국 패망이후 새로운 강자들은 시황제의 위엄이 컸던 만큼 그 그림자를 말끔히 없애기 위해 영씨의 씨를 말렸으니 시황제는 한세상 원없이 살았으되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권력의 속성, 인간의 속성이 그러하다.

 

약 2200년전의 중국이란 나라에서 있었던 진제국의 흥망에서 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수많은 영웅과 간신, 그리고 민초들의 삶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온나라가 메르스와 국회법 개정문제로 떠들썩한 오늘, 깊이 생각할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