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 손자병법 1
정비석 지음 / 은행나무 / 2002년 9월
평점 :
프롤로그
인생을 경영하는데 참고할 만한 것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오래전부터 여러 인생 선배들이 한결같이 추천하는 지침서 중에 하나가 손무의 손자병법이다. 아이들이 보기 쉽게 학습만화로 된 것부터 사회에 이제 막 첫발을 디디려는 사회초년생에게 현장에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돌발상황을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하고 새로 형성되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원만하게 유지할까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까지 손자병법의 활용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느즈막히 소설로서의 손자병법을 접했다.
[소설 손자병법]은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고 정비석(1991년 작고) 선생이 1981년에 발표한 중국역사소설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손무, 오자서, 범려, 문종, 합려, 부차, 구천, 서시 등 영웅들의 흥망성쇄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자 병서 손자병법의 저자인 제나라 출신 손무와 초나라 출신으로 본국에서 역적으로 몰려 아비와 할아비를 비명횡사로 잃은 오자서가 중국 남부 지역의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전국의 패권을 차지하는 과정이 전반부라면 오나라왕 부차와 월나라 왕 구천 사이의 물고 물리는 복수전이 후반부 이야기의 골자이다.
1. 전반부 이야기
전반부는 오자서의 처절한 복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젊은 시절 초강대국 진나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게 된 여러 제후들을 명석한 논리와 대담한 용기로 구해내어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전쟁에서는 임전무퇴의 일당백 용장이자 지장이었으나 시절을 잊은 그의 복수심은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이 발발하는 당시 형편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면이 있었다.
초나라 평왕은 간신 비무기의 모함을 받아들여 충신으로서 대를 이어 봉사해 온 오자서 일가를 잔인하게 죽였다. 아버지의 당부로 단신으로 초나라를 빠져나온 오자서는 망명길에 올라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오나라 희공공자에게 몸을 의탁한다.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희공공자를 도와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오자서. 바로 이 희공공자가 오나라 24대 왕 합려가 된다. 모든 것이 원수를 갚기 위한 잘못된 동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오자서는 병법의 대가인 손무까지 영입하여 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초석을 다진다. 오랜 준비기간 동안 자신의 일족을 모함한 간신 비무기뿐만 아니라 평왕도 죽었건만 결국 오초전쟁을 일으켜 초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오자서의 복수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자서가 두려워 무덤까지 숨겼던 평왕의 무덤을 찾아낸 후 오자서는 복수의 화신과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평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오자서는 원한의 분노가 새삼스러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시체를 바위 위에 꺼내 놓기가 무섭게, 왼발로 시체를 짓누르며 오른쪽 손가락으로 평왕의 두 눈알을 후벼 내었다. 그러고도 성이 가시지 않아 손에 들고 있던 아홉 마디의 구리 채찍으로 시체를 3백 대나 때려 갈겼다. 그러잖아도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조각조각으로 분산되자 오자서는 시체 조각을 모래밭에 산산조각으로 던져 버렸다.
17년만에 이루어진 오자서의 복수는 그의 수많은 위업에 부끄러운 일면이다. 그런 뼈에 사무치는 한이 그의 평생을 지탱해 준 힘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오자서는 고국 초나라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으니 어찌 인과응보가 아니랴!
복수하면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초한 쟁패전에서 승리한 유방의 조강지처 여태후에 비하면 사실 오자서는 할말이 많을 수도 있겠다. 한고조 유방이 죽자 여태후는 유방이 아끼던 척부인에게 악귀에 들린듯 잔인한 복수를 한다.
여태후는 영항에 갇혀 있던 척 부인을 끌어내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고막을 연기로 그을어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던져 넣었다. 야사로 떠도는 말에 의하면 음부를 짓이겨 버렸다는 말도 있고, 남자 죄수들이 우글거리는 감방에 벌거벗은 채로 던져 넣어 척부인을 마음껏 능욕하게 했다는 말도 있다. 또 어떤 기록에는 죽은 조왕(척부인의 아들)의 시체를 끌어다 보여 주며 척부인의 발악을 끌어내어 욕하는 그 혀를 자르고, 노려보는 그 눈을 뽑고, 종당에는 귀머거리를 만들고 사지까지 잘라 버렸다고도 한다.
이른바 '사람돼지'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다니.
그리스 로마 신화 아트레우스 이야기도 복수하면 빼놓을 수 없다. 탄탈로스 손자들이자 펠롭스의 아들들이며 니오베의 조카들인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형제간의 끝없는 증오와 파멸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형 아트레우스가 동생 티에스테스를 맹목적으로 증오한 나머지 결국 조카들을 죽이고 그 시신을 토막낸 뒤 동생에게 머리와 팔다리를 조각상이라고 보여준다. 동생 티에스테스는 조각상이 죽은 자신의 아들들임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형의 말은 그 이상이었다.
"방금 네가 먹은 그 맛있는 음식은 사라진 몸통으로 만들었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사람다와야 한다. 근데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자서를 변명하는 사람들은 꼭 여태후,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따위가 아니더라도 홀로코스트, 마루타, 십자군 전쟁 등 역사에서 수없이 목격되어지는 인간의 잔인성을 들 수도 있겠다. 다시 궁금해진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손무는 오자서가 저지른 복수극의 전말을 전해듣고서 오랫동안 비통한 침묵에 잠겨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고 한다.
"승자라고 해서 무슨 일이나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일 것이오. 패자는 패했으니까 어떤 망동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지만 승자의 망동은 반드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오."
오자서는 손무의 말에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태산을 쌓아 올리다가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실패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슨 일이든지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작은일이라도 잘 살피지 않는다면 결코 일을 마무리 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게다. 오자서의 명성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죄로 악명만 남게 되었다.
2. 후반부 이야기
후반부는 단연 오월동주, 와신상담, 경국지색으로 요약되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쟁패전이 압권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대륙 남쪽에 위치하면서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국가였다. 그러나 이웃사촌 같은 정감어린 표현과 거리가 있다. '오월동주'란 오나라와 월나라가 한배를 탔다는 뜻으로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주 왕조를 섬기지 않는 남방의 오랑캐 소리는 함께 들으면서 내륙의 다른 제후국들과 경쟁하는 것보다 오히려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니 탈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초나라와 제나라를 제압한 합려의 오나라가 패권국으로 부각되고 있는 시기였다. 합려로서는 눈엣 가시 같은 월나라를 굴복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손무도 떠나고 오자서도 예전같지는 않았지만 월나라 왕 윤상이 죽자 '상중에는 공격하지 않는다' 당시의 관례도 무시한 채 군사를 일으키는 오나라.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손가락에 구천(월나라 왕, 윤상의 아들)의 독화살을 맞은 합려가 전장에서 사경을 헤매게 되자 오나라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부탁하며 합려가 죽자 아들 부차는 절치부심, 3년 동안이나 섶나무 더미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와신).
때가 무르익자 부차는 전쟁 준비에 힘을 쏟지만, 오나라 움짐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구천이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구천은 오나라 내의 전장에서 상대국에게 대패를 당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오나라 부차에게 항복과 동시에 신하로서의 충성을 맹세한다. 심지어 재상 범려와 함께 오나라의 볼모로 잡히게 된 구천, 그러나 이 모든 수모는 또 다른 반전의 기회를 얻기 위한 2보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부차의 의심을 푼 구천은 수년동안 짐승의 쓸개를 심으며 복수를 다짐한다(상담). 범려는 착실하게 안으로 힘을 기르는 한편 오나라를 내부로부터 완전히 패망시킬 무서운 계책을 세운다. 후세에 경국지색으로까지 일컬어 지는 서시를 활용한 미인계가 바로 그것이다. 서시는 중국역사에 있어 여포와 동탁의 여인 초선, 모든 꽃들이 수줍어할 만큼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양귀비 등과 함께 4대 미인 중에 하나일 만큼 그 미색이 뛰어났다고 한다.
각설하고 이런 절세의 미녀가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 쥔 패권국가의 왕실에 던져졌으니 이제 그 나라는 서시의 치마폭에 놀아나게 된거나 다름 없었다. 첫번째 목표는 오나라의 명장 오자서의 제거, 어려움 없이 성공했다. 그리고 향락과 황음으로 오나라 권력의 핵심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니, 월나라 대군을 맞이하는 오나라 병사들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가랑잎 꼴이 되었다. 허망해라! 천하를 호령하던 오나라는 부차를 끝으로 패망했다. 전국의 격전지를 발품을 팔아가며 연구하여 최고의 병법서의 기초를 마련하고 실전에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 보였던 손무, 천하제일의 명장 오자서, 그리고 수많은 영웅 호걸들의 영혼들은 갈데없이 흩어지고 전쟁의 상흔만 남게 되었다.
승자는 어떠한가. 토끼 사냥을 마치면 사냥개가 삶겨지는 것처럼 월나라 사정이라고 나은 것은 없으리라. 역사는 늘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고 이야기해오고 있는 바, 논공행상을 둘러싼 얼마간의 피바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현명한 월나라 재상 범려는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범려는 군왕 구천의 상이 '고생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을 같이 할 수는 없는 상'임을 읽어내고 발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날 뜻을 표한다. 왜 바라는 것이 없었으랴마는 무엇인가 그 이상을 탐해서는 본전도 안되는게 인생인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간신의 모함으로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3족의 멸화를 당한 1등 공신 문종의 최후가 모든 것을 웅변해 주고 있지 않는가.
에필로그
소설 손자병법은 병서 손자병법의 해설서가 아니다. 소설이다. 이야기다. 이야기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그런 점에서 고 정비석 선생의 소설은 충분히 재미있다. 손무의 저작 [손자병법]의 깊이는 다른 척도로 재기로 양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춘추시대 말기 춘추오패들의 상승과 몰락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작가 신영복은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한 적이 있다. 역사는 서고에 쌓아둔 책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이해한다.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있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경계한 실수를 반복한다.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이해하는 비루함이 역사속에서 피로 아로 새겨준 교훈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망각시켜 버린다. 역사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또 '미래는 오래된 미래'라고도 했다. '현재의 모순과 갈등을 지양한 새로운 현재가 미래'라는 것이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누군가 연필을 쥐고 백지 위에 쉼 없이 선을 긋고 있는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과거에서 시작해서 미래로 이어지는, 끝이 없는 그 무엇이다. 예전의 과오를 반성하고 현재 우리 삶의 모순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오늘을 살아가야지 다짐한다. 지혜를 얻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