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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로마사 - 7개 테마로 읽는 로마사 1200년
모토무라 료지 지음, 이민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언급해 유명해진 이 말, 팍스 로마나. 학창 시절 듣고 성인이 되어서는 좀처럼 들을 일이 없었는데 인문학 서적 한 권 속에서 그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감회가 새로웠달까. 정말 부럽게도 로마 자유민의 소득은 18세기 어느 유럽국가의 국민 소득과 비교해도 굴욕적이지 않았다고 하니 얼마나 부를 누렸던 시절인지 짐작케 만든다.
흔히 로마라고 하면 전차 경기가 그 유적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의 부흥을 지켜온 것은 보여지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고 전한다. 법을 중시하고 가풍과 명예를 지켜왔던 민족, 그들은 교육의 중심은 가정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해 왔으며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명예를 지키는 인간으로 자랄 수 있도록 그 교육을 맡아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어 놀랍기만 했다. 그간 알고 있던 로마의 이미지는 중고교시절 배웠던 역사수업과 영화의 장면들에 기초한 것이었다면 다시 처음부터 쌓아가는 로마의 이미지는 도쿄 대 명예교수이자 와세다 대 특임교수인 모토무라 료지 교수가 쓴 <처음 읽는 로마사>로부터 그 출발점을 잡았다.
왕정과 공화정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라는 국가가 왕>귀족>평민>노예의 신분에 따른 사회적 권리의 차이가 존재했고 처음에는 100명 정도였던 공화정 로마의 중심, 원로원(파트레스)이 추후에는 300명 가량으로 늘어가면서 왕이 독재를 하지 못하도록 견제했지만 이 역시 악용된 사례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 씁쓸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p81 로마가 강한 이유는 패배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기 떄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합리적인 면이 강했던 로마라는 국가는 패장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그리스와 달리 군대를 전멸하게 만들었을 망정 최선을 다했다고 판단되었던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재기의 기회를 주며 그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국가. 오늘날에도 없을 그런 결정을 고대 로마는 해 오면서 인재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리적이었을 것만 같은 로마에도 삼악제의 시대가 존재했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이 세 황제를 일컫는데 불과 3년 남짓 통치했던 칼리굴라는 잔인한 폭군이었고 14년 로마를 통치했던 네로는 모친과 이복형, 두 아내, 세네카를 죽음으로 몰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악행을 문장으로 열거하는데만 해도 끝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두 황제에 비해 약간 낯선감이 드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낭비와 의심으로 나라를 위험에 빠트렸던 군주로 기록되고 있었다.
세 명의 악제가 있었다면 로마는 다섯명의 빛나는 황제가 팍스 로마나를 구현해 왔다고 한다.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마르쿠스아루렐리우스로 이어지는 계보 중 친 아비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뜻을 잇고 존경으로 아비를 대한 관계의 부자지간도 있다니....로마와 합리적이라는 표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단어 같았고 그 현명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이 찬란한 로마가 무너진 이유 또한 '사람'이었는데 로마말 집권했던 세베루스 왕조는 50년간 70여명의 군인 황제를 배출하면서 그 중 24명이 암살당했고 종국엔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할 통치 되면서 그 수순을 밟아나갔다고 볼 수 있겠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로마는 서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뒤이어 동로마까지 붕괴되면서 무너져갔다고 책은 분석했다. 물론 이미족의 침입, 인프라의 노후화, 이탈리아의 쇠퇴등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처음의 초심을 잃었던 로마는 더이상 예전의 명예로왔던 로마일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역자의 후기글처럼 역사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것이다. 고대의 로마가 강력한 힘의 국가로 인지되었던 것과 달리 현대의 로마는 평온한 종교국가의 색채가 짙다. 그렇다면 '인류의 모든 경험이 들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로마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워나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