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 문학상은 상금이 자그마치 1억원이다. 빗맞은 로또보다 큰 금액의 상금. 3회 수상작인 [천년의 침묵]을 읽으면서야 이 상의 상금보다 작품의 무게가 더 무거움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2회 수상작은 나오지 않았고 거꾸로 보게 되었지만 이제서야 1회 수상작을 읽을 수 있었다. 3회는 피타고라스에 관한 소설이었는데, 1회는 진시황이라니...역사물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강세인 모양이었다. 진시황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추리물도 아니면서 김전일이나 코난이 등장해야할 것만 같은 미스테리한 살인사건을 출사표로 내던지고 있다. 광화문 한 복판에서 실시간으로 한 남자의 목이 잘려지고 뉴스에 보도된다. 전쟁터도 아니고 무슨 화랑의 후예나 닌자의 소행도 아닐진데, 현대의 시간 속에서 이는 회괴한 일이었다. 살인범은 잘린 머리를 첼로 가방에 넣고 사라졌고 연쇄적으로 살인이 자행되지만 경찰은 그 실마리는 커녕 범인의 행적을 쫓는 것도 힘겹다. 뒤를 쫓는 강력8반의 형사들은 유력한 용의자 서교수의 뒤를 쫓게 되고 이 모든 긋이 진시황 프로젝트와 관련있음을 밝혀낸다.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기 위해 서불을 동으로 보냈던 진시황. 결국 돌아가지 않은 서불의 자손을 찾아 심장과 머리공양으로 그 뜻을 이루려는 계획이 진정 이 살인의 목적이었을까. 거기에 의문을 가진 강형사가 바로 소설의 중심인물이다. 국문과 석사 수료 출신의 외골수 강형사는 청내 제자이자 사랑하는 여인인 방형사와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서교수의 조교 소연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고, 사건은 사건대로 진시황 프로젝트를 너머 친일파, 민비시해, 정신대 등의 역사적 아픔과 맞물려 복잡하게 얽혀 있음이 밝혀지고 있었다. 거기에 내부의 공범, 국제적인 킬러 송곳의 정체를 풀어가면서 마지막까지 반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의 강력함도 함께 맛볼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진시황 프로젝트]였다. 거대한 스케일, 탄탄한 구성, 소설의 재미 외에 이 소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생각해볼 시점이 아닐까 싶다. 한국 문학의 스토리텔링.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로빈훗 이나 타이타닉을 비롯 스크림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화들이 패러디 되는 것을 봐왔다. 헐리우드는 독특한 유머 코드를 가지고 있어서 기존의 영화에 코믹 요소만 가해도 새로운 영화로 재변신하곤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유머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건 그 사실이 꼬집고 있는 풍자적 요소를 알고 넘어갈 때일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난 헐리우드의 패러디 영화 중 과연 몇 %를 이해하고 웃어넘겼는지 이제와서야 의문이 생긴다. [트와일라잇]이 발표되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에드워드와 벨라의 사랑이야기는 급물살을 탔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이미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고, 10대뿐만 아니라 20대 30대도 열광하며 트와일라잇의 금지된 사랑에 녹아들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영화화 되고 나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전 3편인 이클립스의 개봉을 맞아 오프라 윈프리 쇼에 4명의 배우가 나와 그들이 찍은 영화 이클립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트와일라잇을 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이 소설이 가져다준 파장과 유명세는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트와일라잇조차 패러디물이 등장했다. 이름도 비스무리한 [나이틀라잇]. 기존에 영상으로 보아왔던 것과 달리 [나이틀라잇]은 소설로 읽게 되어 그들의 유머 요소를 놓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다. 친절한 주석 덕분에 비록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결코 웃기만 할 수는 없었다. 풍자인만큼 [나이틀라잇]에서는 기존 스토리의 달콤함은 기대하기 힘들다. 병뚜껑 수집이 취미인 벨 구즈는 포크스에서 스위치 블레이드로 전학온다. 마을의 유리창닦이인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해 전학 온 벨은 에드워트 멀렌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고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망상을 펼치며 계속 그를 대한다. 연약하면서도 강인하며 사랑스런 우리의 스완은 어디로 가고 엉뚱하고 엽기적인 구즈가 자신만의 착각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펼쳐지다니.... 하버드 램푼이 발표한 [나이틀라잇]은 전세계 소녀들의 뱀파이어 신드롬을 잠재우며 그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유머스러움을 잊진 않았지만 원작을 좋아했던 나에게는 이 책은 소금 한 자루같다. 다소 삐뚤어진 시각으로 원작을 바라보는 하버드 램푼의 비틀기는 같은 이야기지만 이토록 다른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나이틀라잇은 독특하다. 그들만의 유머도 가득하며 주석이 달려 있지만 나는 이 유머들을 어떻게 소화해야할지 한동안 난감했었다. 2번,3번을 다시 읽으면서 그들의 유머에 익숙해지려 노력중인데, 이슈화 된 베스트셀러를 이토록 엽기적으로 비틀 수 있는 그들의 용기에는 쉽게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한 소녀 속에서 살고 있는 13개의 인격...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소설은 많다. 그 중 가장 먼저 읽었던 시드니 셀던의 2권 분량의 소설이 가장 재미있게 기억되는 건 아마 처음 읽었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것은 우선 선점권을 갖나보다. 기억에서조차도. [검은집]의 작가 기시 유스케도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소설을 집필했다. 제목이 [13번째 인격]이었는데 누군가의 리뷰를 보고 나서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이야, 재미있다"였기 때문이다. 제3회 일본 호러 소설 대장 장편부 가작인 [13번째 인격]은 호러성 공포를 안겨주진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이다. 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오츠이치의 섬찟한 비린 공포를 맛보았기 때문인지 기시 유스케의 치히로는 그저 병을 앓고 있는 소녀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유체이탈과 그 13번째 인격인 이소라의 실체도 M정도의 놀라움 정도라고나 할까. 마지막에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잔혹성에 대한 잔재도 그랬구나 싶을 정도로 반전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류의 반전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식스센스 이후의 왠만한 반전은 이제 반전으로써의 힘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훌륭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막힘없이 술술 읽혀졌고 단 한 순간도 지루하게 놓아두질 않았다. 그런면에서보면 소설의 재미는 탁월했다. 다만 신선도 면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을 뿐.
이사카 고타로는 독특하다. 흡사 외계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주적인 상상력을 뻗쳐 우리는 사로잡는다. [마왕]이 그랬고 [사신치바]가 그랬다. [종말의 바보]나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에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쪽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더니 끝나버렸다. 최근에 [그래스 호퍼]를 보면서 감동받았는데, 후작인 [sos원숭이]를 읽으면서 혼란에 빠졌다. 대체 이 작가 정신상태는 괜찮은 것일까 하고. 일반인들의 정도라든가 한계치 라든가 도덕적 관념이나 사회적 통념을 통해 그어놓은 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없애 버리는 작가. 그래서 가전제품을 파는 엔도 지로가 히키코모리인 마사토의 엑소시스트를 떠맡을 수 있고, 20분 동안 300억 엔의 손실을 낸 주식 오발주 사고가 난 현실 속에서도 서유기의 손오공이 나타나 활보할 수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와 손오공 이야기로 이분법화 되어 있는 듯 한 시점 속에서도 우리는 이야기의 전반 줄거리를 다 훑어내릴 수 있다. 이런 혼잡한 소재를 가지고 이토록 잘 조합되는 이야기를 짜낸다는 점에서 이사카 고타로의 필력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인간이란 존재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자신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남을 구할 수 있을까, 과연. 이라는 의문. 역자의 표현대로 소설은 요란하다. 현란하고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요란스럽다. 그런 소설 속에서 진심이 전해지기 보다는 엉뚱함이 전달되는 것은 왜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를 한다는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게 만드는 작가 고타로. 그의 작품을 두고 미루어 짐작을 해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진다. 절대 짐작할 수 없는 길을 향해 소설은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sos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진 지로. 그는 신호를 보내는 모든 이를 구할 수 있을만큼 뛰어나거나 영웅적이지 못한 인물이다. 돕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쉽사리 어쩌지 못할때가 많은 우리와 닮은 그가 평범하지 못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어쩌면 재미는 이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암의 소설 속에서 보아왔던 매점매석이 서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쩐의 전쟁]에서 보여준 돈의 흐름도 속에서도 우리는 돈 자체 보다는 그가 지닌 가치에 대해 쫓고 있었다면 [악화의 진실] 에선 당백전 자체부터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당백전 한 닢. 고리짝적 동전 하나가 소설의 발단이 될 수 있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당백전 속에 담긴 인간의 욕망과 그 속에 스며들어버린 그들의 삶은 굵은 선이 되어 소설의 줄기를 형성해냈다. "화폐의 타락"이라는 무거운 주제 속에서 그 숨은 비밀을 밝혀내는 것도 재미의 요소였지만 당백전 발행으로 급변하는 조선 사회의 사회생활을 엿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주로 왕조에 그에 따른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사극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돈의 역사와 함께 흐르는 인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읽은 페이지가 쌓여가면서 스토리 속 이야기들이 옥수수알마냥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작가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면서 써내려갔을지 눈 앞에 고스란히 보였다. 역사적 고증없이 역사소설에 발을 담갔으랴 만은 그래도 이토록 문장문장에서 공을 들였을 흔적들이 찾아지는 책을 읽게 되는 것이 몇년만인지 모르겠다. 소설의 소재가 된 당백전은 분명 실패한 화폐전이다. 상평통보 같은 양화에 비해 악화로 결정되어 발행한지 채 1년도 되지 못한 시점에서 발행이 중단되는 비운도 겪었다. 게다가 화폐로써의 가치가 떨어지자 놋그릇을 만드는 재료로 전락하기에 이르른다. 그로인해 누가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본 것일까. 두말할 나위없이 가장 타격을 받은 층은 양반이 아닌 서민들이었다. 화폐로서 지불교환 능력을 상실한 당백전을 폐하면서 통용마저 금하다보니 백성들의 손에 쥐어진 그 화폐는 어느 순간 구리 조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십원짜리 동전이 변할때도 1원짜리가 사라질때도 5만원권 신권이 나타났을때도 우리는 그저 새로운 화폐개혁이 일어나나 보다 정도만으로 구경하고 있지 않았던가. 과거 당백전의 폐혜를 읽어나가면서 나 스스로도 사회 전반, 경제 전반의 변화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었나 싶어졌다. 변화에는 분명 좋든 나쁘든 결과가 뒤따르는 법인데, 현재의 화폐 변화를 뒤따른 그 변화에는 눈을 가린 채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비떨어지는 대로 좋은 것만 보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반성의 물고를 트고 있다. [화폐의 진실]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복습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과거의 일이 답습되어 우리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수 많은 징조를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하는 것. 그저 동전 하나에 불과한 돈에 관한 역사소설로 읽힐수도 있겠지만 좀 더 파고들면서 읽게 되면 우리는 이 소설의 어마어마한 무게에 눌릴지도 모르겠다. 화폐의 타락사를 살펴보았지만 그 화폐의 타락이 누구의 타락을 가지고 왔는지도 눈여겨봐야할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