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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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철학적이고, 2부는 인간적이며, 3부는 현실적이다. 사유와 휴먼과 현실이 어우러져 문학이란 큰집을 짓는 작가적 솜씨는 독특하고 원숙하다. 무서우리만큼 절제된 단문의 행렬을 따라가다보면 삶이란 무한한 고통이자, 고독의 연속이며, 무의미하고 불확실한 경로라는 것을 누구든 알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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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의 시간

 

김신용

 

계란의 다수확 생산을 위해

24시간 조도(照度)를 통제하는 양계장

낮이고 밤이고 밤이 낮이다

대낮에도 해가 떠 있고, 캄캄한 밤에도 해가 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날들의 백야(白夜), 그러니까 닭들에게 낮과 밤의 의미를 지움으로서

모든 시간을 산란의 시간으로 조장하는 것이다.

그 양계장의 천정에는 지지 않는 수백 개의 해가 떠 있다

백열등들, 핏줄 속으로 전기의 피가 흐르는 태양들

매일 그 유리알의 태양이 떠 있는 닭장 속에서

닭들은, 쏟아지는 빛 속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자신의 유전자 속에 입력되어 있는 시간을 무의식이듯 문득 일깨워 내고는

벌건 대낮에도 횃대에 올라가 우렁차게

긴 목울음을 뽑아내기도 한다

그 비명 같은 목울음 속에서 마치 발작이듯

산란을 하는 닭들

죽어버린 시간들이 묻혀 있는 무정란,

그 시도 때도 없는 배란에, 닭들의 항문은 염증으로 벌겋게 부어오르고

폐사된 닭은, 깨끗하게 털이 뽑힌 냉동된 알몸으로

자신이 낳은 알들과 함께 시장으로 팔려 가는,

그 닭들의 정서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씨의 그림자가 구부정히 걸어 다니는

닭들의 해가 지지 않는 세계

폐사된 시간, 오로지 산란을 위한 눈빛들만 오로라처럼 휘몰아치는

빛의 무덤,

닭들의 신자유주의 공간.

 

ㅡ김신용은, 좋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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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1~2 세트 - 전2권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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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계의 한복판에서 출세와 쇠락을 반복한 그이기에 이번 회고록의 사료적 가치는 남다르다. 그럼에도 지난날을 말하기 위해선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신념과, 자신의 전생을 낮추볼 수 있는 겸허가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 회고자는 과거를 낭만적으로 미화하고, 영웅적 일대기로 윤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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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6-03-1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의 증언을 그대로 옮긴 회고록이다. 노회한 정객의 일대기가 나오는 만큼 나름대로 읽는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망과 짜증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JP는 한국사에서 공보다는 과가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JP는 자신의 과와 죄를 애국과 구국의 행동으로, 영웅적인 업적이자 헌신적인 공로로 변명하려 한다. 이 변명과 미화는 회고자로서의 올바른 마인드라 보기가 어렵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g 수다맨 님의 독서 경향은 정말 광범위하군요.. 과학서를 제외하면 전분야 독서 경향이신 것 같습니다....

수다맨 2016-03-14 01:0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닙니다. 저야말로 곰곰발님에 비하면 독서 경향이 한쪽으로 치우친 편이지요.
사람이 노년이 되면 마음이 담백하고 겸허해진다는 말이 있던데, JP는 그러하지 않은 듯합니다. JP는 자신이 중령 시절에 일으켰던 군사 반란(5.16 쿠테타)을 조국을 구하려는 혁명으로 여전히 주장하고 있더군요. 반면에 12.12를 가리켜 단순한 반역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봅니다...

yamoo 2016-03-18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읽어도 김종필이 그렇게 쓸 줄 알았습니다^^

수다맨 2016-03-18 13:45   좋아요 0 | URL
이 구순의 영감님은 도무지 자기 반성이랑 자기 성찰을 못 하는 분 같더군요.
 
화두 1 최인훈 전집 14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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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다운 박력과 박학이 드러나는 전반부이다. 작가는 반도의 북쪽에서 지냈던 유년과, 낯선 땅에서 고독과 방황의 시간을 견뎠던 청년기의 삶을 돌아본다. 더러 지루하고 난해한 부분도 있으나 지성이라 불릴만한 거인의 족적에는 시대를 응시하고, 인간의 자유를 고민하려 했던 에너지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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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6-03-0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부만 읽고 할 말은 아니나 내 짧은 생각에는 지식인 화자가 나오는 한국 소설(멀게는 복거일에서 가깝게는 김연수까지)들 중에서 가장 잘 쓰인 작품은 ˝화두˝ 같다. 최인훈의 글은 복거일의 글처럼 이념적 맹목이 없고, 김연수의 글처럼 감상의 과잉이 보이지 않는다.

yamoo 2016-03-18 00:25   좋아요 0 | URL
최인훈의 글은 복거일의 글처럼 이념적 맹목이 없고, 김연수의 글처럼 감상의 과잉이 보이지 않는다.

짧은 단평 중 최고인 거 같습니다!

수다맨 2016-03-18 13:48   좋아요 0 | URL
yamoo님 안녕하세요 ㅎㅎ
저는 지식인 소설을 쓰는 작가들 중에서 최고봉은 최인훈 같더군요. 최인훈에 견주면 복거일/김연수는 확실히 단수가 낮아 보입니다.

나무그늘 2022-07-2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초판본도 읽어보셨는지요. 제가 초판본을 3번 정도 읽었는데, 개정판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수다맨 2022-07-20 15:44   좋아요 0 | URL
아마도 1994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판본을 말씀하시는 듯한데 저는 이쪽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초판본과 개정본이 실제로 얼마큼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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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는 주로 한사람의 일생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작가이다. 그동안 작가가 노인을 주인공 삼아서 파란의 역사를 재조명했다면, 이번 작품에선 중년 남자를 전면에 내세워 자본과 물신에 미쳐돌아가는 오늘을 그려낸다. 담백한 서술로 대륙의 비참한 내장을 보여주는 응전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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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6-03-0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작품은 전작들인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에 견주면 소설적 완성도가 다소 떨어져 보인다. 또한, 위화가 그동안 보여준 건강한 리얼리즘이 이번 작품에 들어와선 통속적/감상적인 비탄으로 얼마큼 바뀌고 있다는 인상도 든다.
그럼에도 위화가 (서사를 만드는 기존의 패턴은 바꾸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7일˝에 들어서 변화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작가는 이제 지난날을 돌아보기보다는 오늘날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타락한 세속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의 글 속에는 만민 평등의 기치를 내걸었던 과거의 중국이, 이제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계급화된 사회로, 인정과 도의를 상실한 지옥으로 변해버린 모습이 뼈아프게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