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에 개봉한 김기영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그의 감독 편력에 있어서 가장 난해하고 독특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흔히 김기영의 영화는 '컬트', '오컬트', '괴작', '초현실주의' 등과 같은 수식들이 붙는 편인데 이 작품은 그러한 수식들을 전부 망라하고, 감당할 만한 특징들을 포괄하고 있다. 부언하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김기영 특유의 자의식과 파토스가, 가장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분출된 작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세 가지 에피소드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는 비현실적 호러극(삶의 의지를 역설하는 책장수 노인의 죽음과 그의 사후 귀환), 두 번째는 몽환적인 멜로(사후 이천 년이 지나서 부활한 여인과의 로맨스), 세 번째는 미스터리적인 잔혹극(암 선고를 받은 여인에게 반강제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주게 된 남자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들은 개별적 독립성이 강한 데다가 주인공의 환상과 착각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영화의 결말에는 앞에서 나왔던 세 가지 에피소드들을 일종의 몽환으로 치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주인공 신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관람자에 따라서 여러 각도로 이해할 수 있으며 굳이 해석의 노력을 더하지 않더라도 몇몇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모종의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예컨대 매장과 화장을 당했던 책장수 노인이 해골로 부활하여 ‘의지의 승리’를 외치며 주인공의 자살 기도를 방해하는 장면, 사후 이천 년 만에 부활한 신라 여성이 뻥튀기 기계 앞에서 주인공과 정사를 벌이는 장면, 고고학자의 자택에 남자들의 머리가 주기적으로 배달되어 오는 장면, 시한부 인생인 여성이 죽기 직전에 주인공의 머리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 머리만 남은 주인공이 고고학자가 찌른 칼을 앞니로 물고는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외치는 장면, 고고학자와 딸이 사후 나비가 되어서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 등등 이 영화에는 영문을 알기 어려운 희한한 이미지들이 범람한다. 시청자들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보면서 (공포감을 느끼건 구토감을 느끼건 간에) 기존의 영화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래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키워드를 잡아 보자면 바로 ‘찌질한 남성’이다. 주인공을 포함한 작중 남자들은 현실에서 그다지 쓰이지 않는, 문어체 대사를 주로 구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겉보기에만 근사한 어법에는 실천력이나 행동력이 수반되지 않거나, 만일 그러한 노력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도로徒勞에 그치고 만다. 예컨대 책장수 노인은 삶의 의지를 번번이 역설하나 자신에게 닥친 매장과 화장의 위협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다. 그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은 자신의 육체의 죽음이 경과한 뒤에도, 오로지 입만 살아서 ‘의지의 승리’와 같은 헛소리를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거만한 인물이나 결국에는 머리만 남은 주인공(!)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어깨와 목청에 후카시를 넣고 죽음에의 강박과 매혹을 수시로 말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신라 여성의 간 요구, 암 투병 여인의 동반 죽음 등)이 닥치면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할 따름이다.

 

이러한 남성에의 조롱과 희화는 김기영의 이전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하녀”의 남주인공 동식은 젊고도 가난한 하녀下女의 육체에 탐닉하면서도 그녀가 가부장제의 질서와 안정을 깨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동식은 하녀가 자신의 아이를 유산했어도 심각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하녀가 본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생업 도구인 피아노를 거칠게 두들겨도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유지하고픈 마음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다. 즉, 동식은 젊은 육체에의 집착과 가부장제의 수호라는 갈림길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어리석고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동식의 성격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남자 인물들에게도 얼마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김기영은 그 옛날 아버지(들)의 시대에 생래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가졌던 감독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누군가가 한국에 군림하는 커다란 아버지들(박정희, 이병철 등)에게 맞서서 영웅적 투쟁을 벌인다고 해도 그 역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남근을 지향하는 아버지는 청와대나 삼성의 내부가 아니라 이 작은 마을, 이 작은 가정에도 버젓이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기영은 풍자나 희화와 같은 수법으로, 남자라는 존재들을 한번 웃기고 실없고 '찌질하게' 비틀어 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나간 듯하다. 바로 이러한 노력과 열정에 그의 위대함과 대단함이 수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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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1-2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다맨 님 문학평론도 좋지만 영화평론도 좋을 듯합니다. 모 님은 영화평론가이면서 문학평론가이기도 합니다..

김기영 영화와 손창섭 문학은 비슷하죠.
둘 다 아버지 시대와 남근에 대한 생래적 경멸과 혐오가 엿보이니깐 말입니다..
김기영 감독이 손창섭의 삼부자 같은 소설 영화화했으면 정말
재미있는 영화 한 편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됩니다..

수다맨 2017-11-23 13:14   좋아요 0 | URL
영화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ㅎㅎㅎ 예전에 추천해 주신 영화사전이라는 책을 가끔씩 읽을 뿐 영화도 평소에 잘 보지 않습니다. 다만 김기영의 영화에 대해선 약간은 코멘트를 남겨야할 듯해서 거칠게 몇 글자 적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기영과 창작 후반기(˝삼부녀˝와 ˝부부˝, ˝인간교실˝을 집필하던 무렵)의 손창섭은 닮은 점이 많은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김기영이 만일 ˝삼부녀˝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기막힌 걸작이 하나 나왔을 것 같습니다.
 
마오 Ⅱ
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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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적 군중과 소외받는 개인의 대비는 근대문학의 영원한 주제라 부를 만하다. 메시아주의/근본주의/테러리즘/이미지즘에 열광하는 다수의 모습과 이에 맞서 자발적 은둔과 고립을 실천하는 어느 문인의 이야기는 식상한 감이 없진 않으나 오늘날 세속의 정면을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열의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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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7-11-2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임에도 별 하나를 까는 이유는 이 작품의 배면에 오리엔탈리즘이 깔려 있다는 혐의가 들어서이다. 돈 드릴로는 때때로 우월의식에 찬 서구인의 심리로 비서방 지역의 종교(이슬람, 통일교)와 이념(마오주의)을 ‘광신‘이라는 키워드로 묶어서 맹렬한 비판(호메이니, 마오쩌둥, 문선명은 모두 사악한 독재자고 대중 선동과 대중 기만을 자행한다)을 가한다.
이러한 의견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비서구인들이 하나의 종교와 사상에 경도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 진단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아시아인들은 왜 호메이니/마오쩌둥/문선명 등에게 그토록 열광했을까? 여기에는 그동안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로부터 수탈과 모욕을 당했던 자들의 불만과, 서구 기독교 제일주의에 이의를 가졌던 이들의 반발도 당연히 깔려 있다. 즉 특정 지도자/사상에 대한 전폭적 지지에는 서구 문명에 반발하고 저항하려는 심리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돈 드릴로가 이것을 자꾸만 간과하는 듯하기에 별 하나를 깠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2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편은 어디있습니까 ? ㅎㅎ

수다맨 2017-11-21 14:10   좋아요 0 | URL
그냥 제목이 ˝마오 2˝입니다 ㅎㅎㅎ 작가는 지금이 일종의 포스트 마오주의의 시대라고 생각하기에 저런 제목을 붙인 듯합니다.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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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글에는 창백한 청년의 파토스와 조로한 남자의 회춘욕망이 섞여있다. 이 두가지 성향은 그의 글에 마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작가개인의 미성숙‘과 ‘타인에 대한 적대적/피상적 이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못하는 한계를 낳는다. 그만한 가치는 인정하겠으되 경외나 찬탄이 크게 일어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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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7-11-16 0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문열/김훈 소설에 내재한 여성에의 몰이해, 가부장적 남근주의를 비판하는 평자들이 막상 ˝무진기행˝이나 ˝서울의 달빛 0장˝과 같은 작품들에 ‘그다지‘ 메스를 들이대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진기행‘이나 ‘서울의 달빛 0장‘ 등은 문체의 분칠이 워낙에 잘된 작품이다. 근데 ‘무진기행‘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작중 여성들은 엄마,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내연녀(하인숙), 자살한 미친 여자(술집 여자), 애정 없는 부인(서울 아내) 이라는 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모성을 상징하는 엄마를 제외하면 나머지 여성들은 화자의 시선에서 모두 병리적/불온적/적대적 존재 등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화자의 엄마조차도 그가 다분히 이상적으로 여기는 존재일 뿐, 실제의 엄마와는 당연히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근데, 이게 과연 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이라고 상찬받을 만한 것인가?
나는 김승옥 소설을 졸작이나 범작이라고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재능이 탁월한 소설가이자 범상치 않은 문체의 소유자였고 당대 독자들의 감정을 흔들고 북돋울 줄 아는 대단한 재주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서 엿보이는 미성숙(안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안주하려는 작가 본인)과 타인에의 도식적 피상적 적대적 병리적 인식은 비판적 검토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안한 얘기지만 김승옥 신화는 얼마큼은 벗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6 12:42   좋아요 0 | URL
구구절절 제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군요.. 그의 문체가 당대에는 세련되었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서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뭐 좀 구태스럽다고나 할까요..

수다맨 2017-11-16 13:20   좋아요 1 | URL
저는 차라리 김승옥이 좀 더 일찌감치 통속성의 세계ㅡ실제로 그는 창작 생활 후반에 ˝강변부인˝, ˝보통여자˝ 같은 작품들을 쓰기도 했지요ㅡ로 나아갔거나 아니면 진실성과 성실성이 담긴 사회파 색채가 묻어나는 글들(일례로 서울 1964년 겨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등)을 더 많이 썼어야 한다고 봅니다.
˝무진기행˝은 재기와 감각을 갖춘 단편들의 모음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편집만으로도 김승옥은 호평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지요. 문제는 김승옥을 신화적 존재로, 일국의 문호로 평가하려는 평자/문학사가들의 태도라고 봅니다. 저는 그 정도는 분명 아니라고 보거든요. 그의 세계 및 타인 인식에는 적잖은 결점들이 노출되고 있는데 이를 가리켜서 혁명 어쩌구 하는 건 난센스라고 봅니다.
저는 최인훈/김승옥 같은 이들을 볼때면 문지파로 대표되는 4.19세대가 선배 문인들(김동리, 서정주 등)과의 세대 투쟁에서 우위와 승리를 얻고자 다소 섣부르게 전설적 존재로 격상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김승옥만? 2017-11-17 01:3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근데, 벗기지 않아도 좋을만한 신화도 있나요?


수다맨 2017-11-17 13:35   좋아요 0 | URL
모든 신화에는 일정한 허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 신화의 실상을 좀 더 분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김승옥이 우리네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과 남다른 가치를 지녔던 작가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이미 정전으로까지 자리잡은 그의 작품들 이면과 배면에 잠재하는 인식들에 대해선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마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2017-11-16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6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것은실로 2017-11-1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보신 것 같아요. 김훈이야 역사소설을 많이 썼고 그 시대상을 생각하면 일견 혐의가 덜 해지는 지점이 있죠. 그러나 김승옥의 서울의달빛0장, 특히 야행(여성 화자의 시점이라 더욱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의 경우에는 남성 독자의 시점에서도 좀 많이 갔다 싶습니다. 아름다운 문장과 구성이 빛나는 무진기행, 1964년 겨울, 데뷔작인 생명연습과 같은 작품들이 볼 만합니다. 지적하신 신화는 분명히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실로 2017-11-18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덧붙이자면 무진기행이나 서울의달빛0장 말미에서 드러나는 자기 연민의 제스처도 일차원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미성숙’과 ‘피상적 이해’와 분명히 맞물리는 접점이 있어요.

수다맨 2017-11-19 13:00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ㅎ 저는 김승옥이 존중과 애정을 받을 만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역시나 그의 신화적 위치와, 그를 신화로 만들려는 동료 후학들의 노력에 대해선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말하면 이십대 작가의 명편 몇 편에 대해서 지나친 극찬을 덧붙이는 것은 이 나라의 문학사가 그만큼 빈곤하고 미흡하다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지나가다가 2018-02-03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지나가다 이 리뷰를 보고 댓글을 남깁니다. 학창시절 스치듯 읽었던 무진기행을 최근 다시 읽고 적잖이 실망한 1인으로서, 수다맨님 리뷰에 200% 공감했습니다 ㅎㅎ 저 역시 여성을 대상화하는 부분이 특히 불편했습니다. 이외에도 찰스 부코스키의 여러 책들에 관한 리뷰(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관한 리뷰, 최은영, 정지돈, 김경욱 같은 작가들에 관한 코멘트에도 구구절절 공감하고 갑니다 ㅎㅎㅎ

수다맨 2018-02-04 15:50   좋아요 0 | URL
호의적인 댓글을 남겨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ㅎㅎㅎ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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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두근두근 내인생" 정도의 작품들이 '뜨는' 나라에서 이작품은 희귀종이다. 한트케는 세상의 엄마들이 겪는 학대와 광증에 대해서, 이곳의 아이들이 겪는 성장의 통증과 경이에 대해서 잔잔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신의 혈친에 대해서 이만한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는 소설은 흔치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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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7-10-3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이 여성을 다루는 소설들 중에서 상당한 수준의 깊이를 확보하는 경우, 그러니까 ‘진실하고도 리얼하다‘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 여러 남성 작가들은 여성을 육체적 찬미의 대상(김훈)으로, 사회 질서를 저해하는 나쁜 X들(이문열)로 서술해 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한트케는 ‘소망 없는 불행‘에서 한 여자의 일생 그 자체를 통시적으로 서술하는 전략을 보여준다. 한 여자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나고, 낮은 교육을 받고, 몇몇 남자들과 동거하고, 그 중에서 변변치 않은 남자와 결혼하고, 몇 명의 아이를 낳거나 유산하고, 먹고 살고자 고된 노동을 하고, 남편에게 몇 차례 구타를 당하고, 그러면서도 가정을 끝내 유지하고, 아이 기르는 기쁨을 맛보고, 신이나 초월에 대한 환상을 버려나가고, 몸이 조금씩 망가지고, 성장한 자식들과 소원해지고, 늦게나마 문학에 눈 떠서 글쓰기를 시도하고, 노년에 들어서 우울과 광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그야말로 한 여성의 일생에 나타나는 모든 희로애락을 한트케는 빠짐 없이, 냉정 섬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치밀함과 절제심이 바로 이 작품의 근간이자, 미덕이다.
 

적(滴, 물방울 적)

ㅡ 포에지 푸어

 

김신용

 

너는 없는 것처럼 있다 아무도 너의 존재를 몰라보지만
너는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이 있다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유령의 형체처럼 만져지지도 않지만 너는 너와 만나는
모든 것을 유체처럼 통과한다 유체처럼 통과함으로 누구도
너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너는 안다 자신이 지금
누구의 육체를 지나왔는지 무엇의 몸과 함께 머무르며
숨결을 심장의 두께를 느끼며 그것의 체온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차가왔는지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로 눈빛으로 지나왔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너를 유령처럼 바라본다 꼬집으면
아프고 한 끼를 굶으면 허기에 시달리는 고된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모른다 모른 척 한다 그냥 유체 이탈처럼 너를 바라보며
역시 유령처럼 스쳐지나간다 그 때마다 너는 일회용으로
포장되고 무덤이라고 느낀다 그것을 잊기 위해 사유 또한
유리의 벽을 투과하는 햇살처럼 차가운 언어의 벽을 혼신으로
스며들지만 그것 또한 일회성으로 포장되고 소모될 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누가 그랬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치욕일 뿐이라고― 혼자 책을 뒤적이며 사색에 잠겨 보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그냥 유체처럼 너를 통과해 간다 그렇게
유체 이탈하는 것은 생활일 뿐―남루하게 누더기
누더기 기워 입는 것 같은 사유만 광고 끝난 거리의 전광판처럼
녹슬고 쇠락해 갈 뿐이다 그래도 너의 눈은 빛난다
물방울 거울처럼 빛난다 물방울 거울에 비친 모든 것은
마치 얼음 조각처럼 맺혔다 스러지지만 너의 눈은 빛난다
자신을 유체 같다고 생각하므로 어느 무엇에도 일회용으로
소비되고 소모되지 않는다는 듯이―

ㅡ 제1회 한유성문학상 수상작

 

이 칠순의 시인도 드디어 문학상이라는 것을 받았는가 보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발견하고 무단으로(!) 가져온 시이다.

정말로 이 사람은 기품 있게 늙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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