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단한 사람이 실은 두려웠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막연하게 작은 삶과 작은 행복을 꿈꾸었었다. 요즈음 말로 소확행이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 어쩌고 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선다. 삶은 소확행으로 재단되어서는 아니 되는 무엇이다. 살 만큼 살고 보니 그렇다. 일찍 가신 우리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강아지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의 무릎에 졸고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게는 소확행이 괜찮을 가치일는지 모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버렸으니까. 야생의 개와 고양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려동물 말이다. 만일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을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구조의 신에게 소유되어 버렸다는 뜻이 된다. 현상의 구조 앞에 무릎을 꿇었거나 외면한다는 말이다. 이 구조는 모두가 외면한다고 해도 거기 그대로 버티고 있을 것이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들이 이 구조에 굴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나면 너무도 허무할 뿐이라고. 너무 허무해서 감당하기 힘든 노년을 맞게 된다고, 노인이라고 해서 시시함과 허무함을 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ㅡ 서용좌의 "숨" 151~152쪽.
나는 서용좌라는 소설가를 알지 못했다. 도서관 한편에 이 책이 꽂혀 있어서 가져왔고 특별한 기대 없이 책장을 넘기는 중이다. 윤기 도는 쌀밥보다는 질감이 거칫한 잡곡밥을 씹는 느낌인데 그러다가 이런 구절과 만나면 감흥과 감동이 일면서, 세상에는 '숨은 고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나는 소확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에 소확행을 찬하던 어느 평론가의 소설집 해설이 기억난다. 나는 그 소설집을 가리켜 세태소설의 강점과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도 있다는 식으로 평했다. 즉 세태소설에는 '평균치'나 '일반적', '타협적'이라고 부를 만한 한 성격의 인물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일상을 예민한 시선으로 관찰하면서도 '체제/구조 바깥'의 지점을 상상하기가 어려우며, 도리어 그러한 상상을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일로 간주하려는 저의를 작품에 매설할 가능성도 있다. 해당 소설집의 작가가 그러한 저의까지 품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해설을 쓴 평론가가 이 같은 부분을 짚었으면 하는 독후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평론가가 쓴 해설에는 작금의 문단에 요청되는 것은 '센스의 혁명'이자 '소확행'이며 이것이야말로 개인이 시스템을 버티는 '응전'이자 '근력'이라는 식의 설명이 나온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이 평론가가 언급한 소확행이 시스템에 적응한 범인凡人들의 안분지족이자, 안빈낙도의 의미로 읽혔다. 여기에는 시스템 바깥으로 아예 밀려나간 이들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소설가와 필력 넘치는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 생겼던 아쉬움이 서용좌의 소설을 읽으면서 누그러진다. 이 작가의 글에는 속도감보다는 마비감이 느껴지고, 달변보다는 눌변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과 타인이 살아온 시간을 간곡하게 더듬으며 세속의 풍경을 그려내는 솜씨 또한 섬세하다. 그렇게 어렵사리 말을 잇다가도 빛나는 구절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현상의 구조라는 신 앞에서 허리를 숙이거나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고, 당신에게 (구조에 복종한 대가로) 그만한 과실은 주어지겠지만 그러한 삶은 시시하거나 허무할 수 있다고, 삶이란 소확행으로 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온갖 긍/부정적 경험의 혼효이자 총합이라고. 나에게는 이 전언이 꼰대의 훈계가 아니라 현자의 조언처럼 들리며, 작금의 문학에 필요한 것은 센스나 소확행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가를 만나면 반가움과 존중심이 생긴다. 이 작가의 책이 오래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