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엔 확실히 도둑놈 같은 것들이 들끓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라와 동족에게 예사로 해를 끼치고, 사회를 좀먹는 해충이나 독충 같은 인간들 말이다. 정치적인 투철한 신념도 없고, 국가와 민족에게 봉사하려는 정신자세도 돼 있지 않으면서, 이권과 감투욕에 미쳐서 정치를 한답시고 휘젓고 돌아가는 놈들, 국민의 공복이라는 책임있는 자리를 이용해서 뇌물이나 받아먹고 공금이나 들어먹는 탐관오리배들, 국가의 동량인 인재 양성을 빙자하여 육영사업을 한다는 미명 아래 폭리도 이만저만이 아닌 지독한 학교 장사꾼들, 사업을 합네 하고 기상천외의 간계를 꾸며 어머어마한 나랏돈을 끌어내어다가는 뒷구멍으로 말아먹지 않으면 고작 독점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 가지고는 시세의 몇 배인 엄청난 가격으로 소비자를 골탕먹이는 협잡 사업가들, 품질을 속이고 가격을 속이고 심지어는 가짜 물건을 진짜로 속여 팔아먹는 사기상인들, 이런 악질 도배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니, 제 정신 가진 사람치고, 그 입에서 욕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손창섭, "길", 북갤럽,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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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녀"를 읽고 손창섭의 매력에 푹 빠져서 그의 전 작품들을 사 모으는 중이다. 단편전집은 작년에 다 샀고 장편인 "삼부녀"와 "인간교실", "길"까지 구했지만 그의 최후의 대표작인 "유맹"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이 책이 헌책방에도 없었기에 출판사(실천문학사)에까지 직접 전화를 걸었지만, 재고는 출판사 보관용으로만 한 권 남아 있다고 하며, 앞으로 재판을 찍을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이 책은 E북으로라도 사거나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 제본이라도 뜨려고 한다. 

특히 위와 같은 손창섭 특유의 독설은,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신형철은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냐며 감탄을 표했지만,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대체 "손창섭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냐고 말이다. 나는 이 이야말로 한국의 진정한, 거의 유일한 리얼리스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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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손창섭 책을 삼부녀 빼고는 모두 도서관에서 봤습니다. ( 유맹은 저도 못 읽었군요. ) 3일 연휴일 때 도서관 가서 창섭 소설, 평론, 기타 기사 등등..... 그래서 집에는 달랑 삼부녀가 전부예요.
뭘 좀 말하고는 싶은데 후다닥 읽어서 서평을 쓰기는 그렇고...

그러다가 오직 서평을 쓸 목적으로 오늘 인간교실 구매했습니다. 인간교실 기억나는게 이게 막 신간이어서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있더라고요... 유맹은 아무래도 그 이후에 출간되었나 봅니다. 도서관에 없었던 걸 보면 말이죠...하여튼 지금 읽고있는 책들만 읽고 나면 손창섭에 대해 말 좀 해야겠습니다.

수다맨 2014-03-19 22:08   좋아요 0 | URL
삼부녀에 확실히 과장이나 비약이 없지 않아 있다면 "인간교실"은 조금 더 정통소설에 가까우면서도 장차 "삼부녀"와 이어지는, 고리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곰곰발님도 말씀해주신 것 같은데, 손창섭은 혈연주의적 공동체와 계약에 묶인 일처일부제를 끔찍이도 증오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구성원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또다른 패거리주의나 패밀리주의(우리가 남이가!)로 변질되기 쉽지 않습니까. 손창섭이 꿈꾸었던 공동체는 ㅡ다소 추상적인 문학적 형상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ㅡ 핏줄이 다르고 연령이 달라도 상처 입은 사람들의 유대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삼부녀"에서 그런 것을 아주 멋지게 보여줬죠 ㅎㅎ 곰곰발님 말씀처럼 이 사람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작가라고 봅니다.
 
인간교실
손창섭 지음 / 예옥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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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좋은 소설이란 당대성과 보편성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에 대한 폭깊은 이해와 속악한 세속을 꿰뚫는 시각, 그럼에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손창섭은 당대의 미쳐돌아가는 성풍속과 군부정권 치하의 타락한 현실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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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4-03-15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말을 보태자면, 이 소설의 품격과 가치는 오늘날 소설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상의 광휘를 뿜어내고 있다. 감히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과 맞먹는 한국의 리얼리즘 소설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이 소설에서 손창섭은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견된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16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읽으셨군요. 손창섭은 단편과 장편 모두를 섭렵한 전무후무한 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이 사람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시대를 미리 내다보는 당대성은 마치 신들린 무당 같습니다. 한국 문단이 민족 노선에 빠져서 고은 같은 이를 대표 작가라고 숭배해서 그렇지 손창섭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수다맨 2014-03-16 11:29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손창섭을 한국의 훌륭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생각했지만, "인간교실"까지 읽고 나니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곰곰발님 말씀처럼 손창섭이 한국 근대문학사를 빛내는 최고의 작가인 것 같습니다.
아, 이 소설 읽고 나니 서양의 위대한 고전을 한 편 읽고 난 기분이 드네요. 흔히 손창섭이 신문에 쓴 연재소설들은 통속소설이라 평가절하되곤 하던데, 이건 뭐 요즘 장편이랑 비교해 봐도 '클라스' 자체가 다릅니다. 인간과 시대를 외부자로서 그린다는 것, 이것을 이 작가만큼 해낸 사람을 앞으로 보기 힘들 거예요.
 
삼부녀
손창섭 지음 / 예옥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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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쳇말로 막장인 소설이다. 헌데 이 막장은 현실의 추악한 지점을 남김없이 까발렸기에 도달한 결과다. 소설은 가족공동체, 혈연공동체의 허구적 이면과 허약한 지반을 들추면서 새로운 '계약가족'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려낸다. 손창섭이 얼마나 재미나고, 당대적인 글을 쓰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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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4-03-14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췌언을 덧붙이자면 이 소설 만큼이나 가족과 성의 문제를 파헤치는 한국 소설을, 과문한 나는 읽어본 적이 없다.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나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도 이 소설의 밀도와 강도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다. 또 하나 말하자면, 이 작품과 비슷한 시대에 나온 ㅡ정확히 오 년 전에 ㅡ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그 얼마나 풋내 나는 소설이란 말인가. 문득 손창섭이 ㅡ아이들이 노는 판에서 ㅡ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드디어 읽으셨구려. 으하하하하 ! 이 작품 진짜 걸물이죠. 정말 걸물입니다.
독보적 존재였죠. 글구 수다맨 님 밀씀대로 굉장히 재미나게 쓰는 사람이기도 해요.
손창섭 소설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 이거 정말 천재는 종종 시대의 평범함에 우울하기도 하죠...

수다맨 2014-03-14 12:19   좋아요 0 | URL
아, 이거 읽느라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런 흡인력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어요. 모노가미(일부일처제)라는 것, 가족공동체라는 것의 환상을 이렇게 단호하고도 재미나게 부수는 사람은 간만에 봅니다. 한국도 모노가미의 허구나 가족공동체의 본질을 까발리는 소설들(김원우 "모노가미의 새얼굴",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등)이 더러 있는데, 그러한 작품들도 삼부녀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손창섭은 정말 우울했을 것 같아요 ㅎㅎ 조카나 아들뻘인 친구들이 (아무리 잘 써야)"무진기행" 정도 급 소설을 쓰면서 당대를 주름잡았을 때, 왠지 손창섭은 멀리서 혀를 끌끌 차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애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희희낙락할 때 어른인(!) 손창섭은 조용히 용을 잡으러 갔다고 해야할까요. 아,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는데, 어쨌거나 이 소설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이라고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4:28   좋아요 0 | URL
아까 어느 알라디너 글 보니 김중혁이 이런 소릴 했다고 하더군요. 인간에 대한 경멸이 있어야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말이죠.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룬 학문이라는 소릴 곧잘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인문학이란 인간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손창섭은 괴물이었어요. 삼부녀도 보면 이런 시대에 과연 자기 검열 없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를 평가할 때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개인적으로 위대한 작가는 손창섭이 넘버 원입니다.

수다맨 2014-03-14 15:12   좋아요 0 | URL
지금은 "인간교실"이라는 글을 읽고 있는데 이것도 좋군요. 손창섭의 초기작이 잔혹하고 역겨울 정도로 인간의 밑바닥을 묘사하고 있다면, 후기작은 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펜 끝에 여유와 능란이 붙으면서 한 사회의 당대적 모순을 잡아내고, 대담한 사고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김중혁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한 말은 백 프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경멸을 품어야 오히려 인간을 보는 눈이 더 좋아지죠. 그 점에서 손창섭은 인간 경멸의 극한까지 나아간 작가라 봅니다. 몇몇 감상주의적 작가들과는 격 자체가 다르죠 ㅎㅎ
 
그녀가 보인다
김선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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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하고 담담하면서도 플로우(flow)가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는 작가를 만났다. 각 단편들의 주된 제재는 이별이나 고독, 불임이며 더불어 우리네 사회의 병리적 모습과 일상에 잠복한 불행을 길어 올리려는 능력과 노력이 주목에 값한다. 신인의 저력과 장래를 보여주는 데 모자람이 없는 창작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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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로우가 자연스러우면 리듬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다맨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읽고 싶군요. 그나저나 수다맨 님은 한달 독서량이 어떻게 되십니까. 한달에 서른 권 정도 읽으신는 것 같습니다 ?

수다맨 2014-03-11 22:35   좋아요 0 | URL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읽습니다 ㅎㅎ 곰곰발님에 비하면 많이 읽지도 못합니다.
이 작가가 시도 쓴다고 하더군요. 시는 읽어본 적이 없지만 소설은 왠지 믿음이 갑니다. 뭐 흠을 굳이 잡자면 이 소설도 신인의 첫 창작집답게 결점이 눈에 띕니다(이를테면 내면 독백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 너무 많으며 그것이 더러 지루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도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참 예사롭지 않습니다. 들뜨지 않은 서술이나 문단 곳곳에 박혀 있는 아포리즘적인 문장도 감칠맛이 있구요. 좀 더 두고봐야 겠지만, 앞날이 기대되는 작가 같습니다.
 

달과 어릿광대


김신용

 

나는 지금도 내 얼굴이 몇 개인지 모른다

 

뿌리가 도끼에 찍힐 때마다 얼굴을 하나씩 바꾸어 달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모든 표정들의 집합체-

 

나는 얼굴에서 하나씩의 표정을 뜯어낼 때마다ㅡ 새로운 얼굴을 달았다

 

표정이라는 무수한 구름들이 흘러갔을 얼굴의 정거장,

 

눈이 고장난 신호등처럼 삐뚜룸히 매달려 있다

 

그 사시(斜視)로, 나는 수많은 구름의 궤적들을 보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던 길들-, 그 불구의 궤적을 끌며

 

거울 앞에 서면 아직도 달은 어디에 있나? 하고 묻고 있는

 

물음표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깊게 패인 주름살의 레일 위에는

 

그 검은 석탄을 가득 실은 무개화차가 완강하게 얹혀 있다

 

그래, 표정은 관념의 움푹한 함정-, 죽음은

 

언제나 마분지의 살갖을 가지고 있었다. 마분지는 말의 분뇨로 만들어진

 

종이라는 고정관념을 뇌리에 깊게 각인시켜 준, 그 누렇게 퇴색되고

 

검버섯 같은 피부를 가진 죽음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나는 텅 빈 상자 같은 몸통 위에 얼굴을 바꾸어 달았다.

 

그래, 뿌리에 도끼가 찍힐 때마다 잎만 떨어뜨려 주는 나무처럼

 

잎만 떨어트려 주는 나무처럼..... 그래, 잎만......


이제 말하는 것 외에 얼굴이 할 일은? 우는 걸까?

 

아직도 검은 물음표를 가득 실은 무개 화차는 레일 위에 완강하게 얹혀 있는데?


-김신용 "천년의 시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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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한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읽으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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