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어릿광대


김신용

 

나는 지금도 내 얼굴이 몇 개인지 모른다

 

뿌리가 도끼에 찍힐 때마다 얼굴을 하나씩 바꾸어 달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모든 표정들의 집합체-

 

나는 얼굴에서 하나씩의 표정을 뜯어낼 때마다ㅡ 새로운 얼굴을 달았다

 

표정이라는 무수한 구름들이 흘러갔을 얼굴의 정거장,

 

눈이 고장난 신호등처럼 삐뚜룸히 매달려 있다

 

그 사시(斜視)로, 나는 수많은 구름의 궤적들을 보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던 길들-, 그 불구의 궤적을 끌며

 

거울 앞에 서면 아직도 달은 어디에 있나? 하고 묻고 있는

 

물음표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깊게 패인 주름살의 레일 위에는

 

그 검은 석탄을 가득 실은 무개화차가 완강하게 얹혀 있다

 

그래, 표정은 관념의 움푹한 함정-, 죽음은

 

언제나 마분지의 살갖을 가지고 있었다. 마분지는 말의 분뇨로 만들어진

 

종이라는 고정관념을 뇌리에 깊게 각인시켜 준, 그 누렇게 퇴색되고

 

검버섯 같은 피부를 가진 죽음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나는 텅 빈 상자 같은 몸통 위에 얼굴을 바꾸어 달았다.

 

그래, 뿌리에 도끼가 찍힐 때마다 잎만 떨어뜨려 주는 나무처럼

 

잎만 떨어트려 주는 나무처럼..... 그래, 잎만......


이제 말하는 것 외에 얼굴이 할 일은? 우는 걸까?

 

아직도 검은 물음표를 가득 실은 무개 화차는 레일 위에 완강하게 얹혀 있는데?


-김신용 "천년의 시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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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한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읽으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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