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녀
손창섭 지음 / 예옥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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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쳇말로 막장인 소설이다. 헌데 이 막장은 현실의 추악한 지점을 남김없이 까발렸기에 도달한 결과다. 소설은 가족공동체, 혈연공동체의 허구적 이면과 허약한 지반을 들추면서 새로운 '계약가족'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려낸다. 손창섭이 얼마나 재미나고, 당대적인 글을 쓰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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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4-03-14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췌언을 덧붙이자면 이 소설 만큼이나 가족과 성의 문제를 파헤치는 한국 소설을, 과문한 나는 읽어본 적이 없다.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나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도 이 소설의 밀도와 강도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다. 또 하나 말하자면, 이 작품과 비슷한 시대에 나온 ㅡ정확히 오 년 전에 ㅡ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그 얼마나 풋내 나는 소설이란 말인가. 문득 손창섭이 ㅡ아이들이 노는 판에서 ㅡ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드디어 읽으셨구려. 으하하하하 ! 이 작품 진짜 걸물이죠. 정말 걸물입니다.
독보적 존재였죠. 글구 수다맨 님 밀씀대로 굉장히 재미나게 쓰는 사람이기도 해요.
손창섭 소설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 이거 정말 천재는 종종 시대의 평범함에 우울하기도 하죠...

수다맨 2014-03-14 12:19   좋아요 0 | URL
아, 이거 읽느라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런 흡인력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어요. 모노가미(일부일처제)라는 것, 가족공동체라는 것의 환상을 이렇게 단호하고도 재미나게 부수는 사람은 간만에 봅니다. 한국도 모노가미의 허구나 가족공동체의 본질을 까발리는 소설들(김원우 "모노가미의 새얼굴",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등)이 더러 있는데, 그러한 작품들도 삼부녀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손창섭은 정말 우울했을 것 같아요 ㅎㅎ 조카나 아들뻘인 친구들이 (아무리 잘 써야)"무진기행" 정도 급 소설을 쓰면서 당대를 주름잡았을 때, 왠지 손창섭은 멀리서 혀를 끌끌 차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애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희희낙락할 때 어른인(!) 손창섭은 조용히 용을 잡으러 갔다고 해야할까요. 아,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는데, 어쨌거나 이 소설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이라고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4:28   좋아요 0 | URL
아까 어느 알라디너 글 보니 김중혁이 이런 소릴 했다고 하더군요. 인간에 대한 경멸이 있어야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말이죠.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룬 학문이라는 소릴 곧잘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인문학이란 인간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손창섭은 괴물이었어요. 삼부녀도 보면 이런 시대에 과연 자기 검열 없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를 평가할 때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개인적으로 위대한 작가는 손창섭이 넘버 원입니다.

수다맨 2014-03-14 15:12   좋아요 0 | URL
지금은 "인간교실"이라는 글을 읽고 있는데 이것도 좋군요. 손창섭의 초기작이 잔혹하고 역겨울 정도로 인간의 밑바닥을 묘사하고 있다면, 후기작은 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펜 끝에 여유와 능란이 붙으면서 한 사회의 당대적 모순을 잡아내고, 대담한 사고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김중혁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한 말은 백 프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경멸을 품어야 오히려 인간을 보는 눈이 더 좋아지죠. 그 점에서 손창섭은 인간 경멸의 극한까지 나아간 작가라 봅니다. 몇몇 감상주의적 작가들과는 격 자체가 다르죠 ㅎㅎ
 
그녀가 보인다
김선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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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하고 담담하면서도 플로우(flow)가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는 작가를 만났다. 각 단편들의 주된 제재는 이별이나 고독, 불임이며 더불어 우리네 사회의 병리적 모습과 일상에 잠복한 불행을 길어 올리려는 능력과 노력이 주목에 값한다. 신인의 저력과 장래를 보여주는 데 모자람이 없는 창작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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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로우가 자연스러우면 리듬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다맨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읽고 싶군요. 그나저나 수다맨 님은 한달 독서량이 어떻게 되십니까. 한달에 서른 권 정도 읽으신는 것 같습니다 ?

수다맨 2014-03-11 22:35   좋아요 0 | URL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읽습니다 ㅎㅎ 곰곰발님에 비하면 많이 읽지도 못합니다.
이 작가가 시도 쓴다고 하더군요. 시는 읽어본 적이 없지만 소설은 왠지 믿음이 갑니다. 뭐 흠을 굳이 잡자면 이 소설도 신인의 첫 창작집답게 결점이 눈에 띕니다(이를테면 내면 독백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 너무 많으며 그것이 더러 지루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도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참 예사롭지 않습니다. 들뜨지 않은 서술이나 문단 곳곳에 박혀 있는 아포리즘적인 문장도 감칠맛이 있구요. 좀 더 두고봐야 겠지만, 앞날이 기대되는 작가 같습니다.
 

달과 어릿광대


김신용

 

나는 지금도 내 얼굴이 몇 개인지 모른다

 

뿌리가 도끼에 찍힐 때마다 얼굴을 하나씩 바꾸어 달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모든 표정들의 집합체-

 

나는 얼굴에서 하나씩의 표정을 뜯어낼 때마다ㅡ 새로운 얼굴을 달았다

 

표정이라는 무수한 구름들이 흘러갔을 얼굴의 정거장,

 

눈이 고장난 신호등처럼 삐뚜룸히 매달려 있다

 

그 사시(斜視)로, 나는 수많은 구름의 궤적들을 보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던 길들-, 그 불구의 궤적을 끌며

 

거울 앞에 서면 아직도 달은 어디에 있나? 하고 묻고 있는

 

물음표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깊게 패인 주름살의 레일 위에는

 

그 검은 석탄을 가득 실은 무개화차가 완강하게 얹혀 있다

 

그래, 표정은 관념의 움푹한 함정-, 죽음은

 

언제나 마분지의 살갖을 가지고 있었다. 마분지는 말의 분뇨로 만들어진

 

종이라는 고정관념을 뇌리에 깊게 각인시켜 준, 그 누렇게 퇴색되고

 

검버섯 같은 피부를 가진 죽음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나는 텅 빈 상자 같은 몸통 위에 얼굴을 바꾸어 달았다.

 

그래, 뿌리에 도끼가 찍힐 때마다 잎만 떨어뜨려 주는 나무처럼

 

잎만 떨어트려 주는 나무처럼..... 그래, 잎만......


이제 말하는 것 외에 얼굴이 할 일은? 우는 걸까?

 

아직도 검은 물음표를 가득 실은 무개 화차는 레일 위에 완강하게 얹혀 있는데?


-김신용 "천년의 시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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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한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읽으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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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문단에서 나름 멀리 있었던 이유로는, 첫째로는 제가 ‘작가가 되겠다’라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인간이 극히 보통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소설을 하나 써서, 그것이 뜬금없이 신인상을 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단이 어떤 것인지, 문학상이 어떤 것인지, 그런 기초적인 지식이 아예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 저는 ‘본업(재즈카페 운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루하루 생활이 너무도 바빠서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습니다. 몸이 몇 개 있어도 부족하달까, 필요불가결한 것 외에는 무언가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전업작가가 되어서는 그만큼 바빠지지는 않았지만, 저만의 어떤 다짐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일상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고, 덕분에 밤에 어디 나가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주쿠의 골든가(문단bar가 주로 밀집된 술집거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닙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런 장소에 관여하거나 실제로 가거나 하는 필연성도 시간적 여유도 그 당시의 저에게는 ‘어쩌다보니’ 없었던 것 뿐입니다. 


-아쿠타가와상에게는 ‘마력이 있다’고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고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도 잘 모르겠고 그런 것 자체를 의식한 적도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누군가가 이 상을 타고 누가 타지 못했는지 그런 것도 모릅니다. 예전부터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비슷한 정도로(랄까 점점 더) 관심이 없습니다. 혹시 그 칼럼의 저자가 말씀하셨듯이 아쿠타가와상의 마력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최소한 그 마력은 저 개인 가까이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마력은 아마 길 어드매에서 헤매다가, 저한테까지 도달하지 못한 거겠지요. 


-이런 것을 말하면 열받을지 모르지만, 아쿠타가와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문예춘추’라고 하는 민간출판사가 영업의 일환으로 만든 상에 불과합니다. 문예춘추는 그걸로 장사하고 있는 거지요-까지는 말 못하지만, 장사에 활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어쨌든 간에, 이만큼 오랫동안 소설가를 하고 있는 인간의 실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신인레벨의 작가가 쓴 것들 중에서 정말로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는 일은 대개 5년에 한 번 꼴 정도입니다. 조금 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2,3년에 한 번 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해에 두 번 뽑는 거니까 결과적으로 퍼주는 격이 됩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지만(상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축제의식같은 것이고, 문호를 넓히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그렇게 매번 매스컴 대상으로 행사하면서 소란피울만한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밸런스가 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 속에서 노벨문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대작가가 되고 싶은 것일까? 나는 노벨문학상을 타고 싶을까? 노벨문학상이 뭐란 말이냐. 너무나 많은 이류작가들에게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 읽을 마음도 들지 않은 그런 작가들에게 말이다. 저런 상을 타면 스톡홀름까지 가서 정장입고 연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벨문학상이 그 수고를 할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나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작가 넬슨 올그렌은 커트 보네거트의 강한 추천을 받아서 1974년에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의 공로상수상자에 뽑혔는데 그 부근의 바에서 어떤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그만 수상식을 펑크내고 말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이었습니다. 나중에 따로 보내진 수상메달을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음…어딘가 던져버렸던 것 같기도 하고…”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터즈 터켈 자전]이라는 책에 그런 에피소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과격한 예외일지도 모릅니다. 독자적 스타일과 일관된 반골정신을 가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은 아마도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서 문학상보다 중요한 것이 몇 가지가 있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확신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 숫자는 둘째치고 – 제대로 거기에 존재해준다는 확신입니다. 그 두 가지의 확실한 감촉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상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버립니다. 그런 것은 그저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인정에 불과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껏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의뢰받은 적은 있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거절해왔습니다. 심사위원을 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고 하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하는 인간 안에는 저 자신의 고유의 비전이 있고 그에 형식을 입혀가는 고유의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을 잘 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잣대’이고, 저한테만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작가들한테까지도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의 방식 외의 모든 방식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저와 해나가는 방식은 달라도 경의를 가지는 대상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것은 어떻게 해도 나와는 안 맞는다’ 혹은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것들은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자신이라고 하는 축만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적인 것이고, 걍 말하면 제멋대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저의 제멋대로인 잣대를 가지고 타인의 작품을 평가한다면, 그걸 당한 사람은 왠지 억울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신인작가의 운명을, 저의 편견이 들어간 세계관으로 좌우하는 일은 무서워서 할 수가 없습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책무는 조금이라도 질이 높은 작품을 계속 써나가고 그것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단은 현역 작가이고, 바꿔 말하면 아직도 발전도상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아직 찾는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어떻게든 싸워나가야 하는 상태의 인간일 뿐입니다. 거기서 살아남아 계속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것,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타인의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고 평가하고 책임을 가지고 추천하거나 혹은 팽하거나 하는 작업은 현재의 저의 시야에는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한다면 – 물론 일단 하면 열심히 할 수 밖엔 없겠지만 –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일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정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그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함께 제대로 잘 해나가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매일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제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만을 해야합니다. 상이라는 것은 작가가 한 작업물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물론 결론같은 것도 아니죠.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든 보강해준다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 있어서 ‘좋은 상’이 될 것이고, 그것이 안 되면, 혹은 반대로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된다면, 아쉽지만 ‘좋은 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올그렌처럼 메달을 멀리 내던져버리거나 챈들러처럼 스톡홀름행을 거부한다고 호언장담하게 됩니다 – 물론 그가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ㅡ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상에 대하여-무라카미 하루키 사적 강연록2" 中에서

출처:http://catwoman.pe.kr/xe/3036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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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글-비록 강연록이지만-을 읽으니 하루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작가정신은 높이 평가한다. 적어도 하루키는 오늘날 시장과 문학, 독자와 문학의 관계를 정확하고 사려 깊게 숙고하는 작가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써나가야 할 글과, 주머닛돈을 헐어 자신의 책을 사줄 독자들이다. 즉, 진정한 작가는 문단의 평가나 상의 획득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독자와, 자신과 정면 승부를 치른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그 소설적 성취가 고전의 수준에 미만할지라도- 오래전에 작가혼을 불살랐던 몇몇 고전적인 작가들의 면모를 일정 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그에게 마루야마 급의 자세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이만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의 마음가짐치고 너무도 훌륭하지 않은가. 

하루키의 신작이 나오면 나는 또 험궂은 비판을 가할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건필을 바란다. 때로 존경할 만한 적을 가진다는 것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얻는 것보다 더 기쁘고 소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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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확실히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습니다. 어떤 통찰이 있거든요.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니 읽을 일이 별로 없지만 에세이'는 좋습니다. 일단 이 작가는 성실하잖아요. 아마 지금도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을 겁니다. 9시간인가... 매일 얼마간 글을 쓴다고 하더라고요.하루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닐 겁니다....

수다맨 2014-03-09 19:4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강연문을 읽고 이상문학상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상이란 뛰어난 작품들에 줘야 하는데, 오늘날 이상문학상은 문학사상사의 장삿속에 불과해진 감이 있죠. 작품이 탁월해서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기에 작품이 받는 식으로 본말이 전도되어 버렸습니다. 현대문학상(현대문학)이나 황순원문학상(문예중앙)도 마찬가지죠.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글쓰기 자세나 작가 정신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문단 진입이나 상에 욕심내기보다 자기 자신과, 독자와 정면승부하려는 저런 태도는,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봅니다.

수다맨 2014-04-17 20:24   좋아요 0 | URL
저는 통찰이 있다고 말한 적은 없는 데요. 다만 상이나 평단에 연연해하기 보다는 작가적 성실성과 충실성을 갖고 독자와 정면 승부를 하려는 것, 하루키의 이러한 태도는 존중할 가치가 있다는 거지요.
저는 하루키의 통찰이 아니라 기개를 얘기한 건데, 이것을 님께서 통찰로 읽으시니 좀 뜨악합니다.
 
불란서 안경원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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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소설은 너무 고고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딘지 도사연한다는 느낌이 든달까. 소설가가 현장과 거리를 두는 것은 좋으나 현장을 초월해 세속과 풍속을 낮추보듯 응시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그녀의 소설에는 언제나 귀족이 있으며, 그 귀족은 섬세하긴 하나 진탕에 뒹굴만한 용기는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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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8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100평계의 무림 고수 같습니다. 어찌 그리 100자 안에 할 말 똑부러지게 하십니까.
저도 조경란 소설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굉장히 블란서스럽다는 것 ? 마치 프랑스 소설을 번역한 소설처럼 읽힙니다. 가끔 소설 속에서 된장국을 끓여서 먹었다는 문장을 읽을 때, 이거 한국소설이었지 ? 하며 읽습니다. 조경란은 기본적으로 도도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죠. 그게 전 아주, 싫습니다. 조경란 말이지요. 이런 풍이 너무 많아요..

수다맨 2014-03-08 11:26   좋아요 0 | URL
몇 년 전 여친이 될 뻔(!) 했던 여자와 함께 조경란 문학강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애가 조경란 팬이었거든요. 객석에 앉아서 턱 괴고 1시간쯤 들었는데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아,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얘기하면서 은연중에 자기와 그를 동일시하는 듯한 제스처는 보였죠.
집에 돌아와 그녀의 첫 작품집이라는 "불란서 안경원"에 실린 단편 몇 편을 읽었는데, 읽다가 씁쓸해졌습니다.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몇 년이 지나고, 어제는 잠이 잘오지도 않고 해서 다시 그녀의 책을 잡고 읽었지만, 역시나였습니다. 섬세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은 보이는데, 그 외의 것은 잘 안 보여요. 무엇보다 화자가 ㅡ비록 알바를 뛰거나 형편이 빈한해도 ㅡ하늘에서 하강한 선녀(!) 같다고 해얄까요. 그것이 저에겐 마뜩잖게 보였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08 12:1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스타일이 원래 " 가난해도 도도하자, " 가 아마 조경란 소설 주인공의 핵심일 겁니다. 여자 윤대녕'이라고나 할까요 ? 소설이 섬세한 것까지는 좋은데 지나치게 신경질적이면 그것은 한번은 좋으나 자꾸하면 짜증이 나죠. 하여튼 전 조경란 읽을 때마다 프랑스 번역 소설 읽는 느낌이 듭니다. 어찌나 고상하신지....

수다맨 2014-03-08 12:35   좋아요 0 | URL
그 고상함이 버터적인(!) 귀족적 제스처에 그칠 뿐, 정신적 귀족(예컨대 마루야마 겐지)으로 가지는 못해서 씁쓸할 뿐입니다. 그 옛날 조경란이 마루야마 겐지를 참으로 되풀이해 얘기하던데, 그럴수록 왠지 조경란이 빈곤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세상의 혼탁한 시류와 맞서고, 어떠한 무리 짓기도 거부하면서 수도승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신적 귀족이죠(물론 작가들 모두가 정신적 귀족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초월적 위치에서 세상을 썩은 물 바라보듯 구경하고, 자기는 거기에 몸담지 않아 고고한 척하는 사람은 그냥 버터적인 귀족이죠 ㅎㅎ 그 고상함은 강남좌파의 위선과 어금지금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08 14:05   좋아요 0 | URL
조경란, 혀 표절 논란 있을 때 끝까지 해명 안 하고 해외로 떴다가 다시 나타나셨더군요. 잡어들 노는데 백로가 낄 수 있냐, 이런 태도여서 속으로 콧방귀를 뀐 적이 있는데 그녀가 와서 내놓은 책은 공교롭게도 소설이 아니라 < 백화점 > 이라는 사회학 비스무리한 거였습니다. 백화점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알고 싶다나 ?! ㅎㅎㅎㅎㅎㅎ 그래서 전세계 유명 백화점을 두루두루 다니셨다고 하시더구요. 그 결과가 백화점이란 이상한 책.....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게 웃었습니다.

수다맨 2014-03-08 15:08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 사건은, 조경란이 표절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더러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주이란 씨가 어거지로 우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물론 조경란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그 사건은 주이란 씨가 오버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조경란의 "백화점"은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3-0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표절이라고 하기에는 튼튼하지가 않습니다. 저도 네이버에 적은 적이 있는데 조경란이 표절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여러 정황상 주이란이 오해할 수 있는 팩트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논란으로 불거져서 문단이 발칵 뒤집어지고 언론이 기고, 반박을 하고 그러면 적어도 입장 표명은 있어야 하는데 조경란은 아주 철저하게 무시하고 그냥 떠났다는 점이죠. 전 그 점이 보기좋지 않더군요.. 흠흠..

수다맨 2014-03-08 22:4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누군가는 무대응도 하나의 대응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작가가 진정으로 자신의 작품을 독창적 창작물이라고 여긴다면 일정한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조경란의 소극적인 태도가 짤막한 귀족적 제스처로 보이긴 했습니다. 최근에 이승우 소설가도 자기 작품이 표절 논란에 휩싸이자 신문사 기자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 봤자 표절 논란이 수그러든 것은 아닙니다만. 조경란이 이 정도 만큼의 대응은 해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