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번리의 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7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정지현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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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친근한 노래와 함께 전 세계 소년 소녀들의 마음에 행복의 주문을 걸어주었던 사랑스러운 소녀 앤. 만인의 친구인 그녀이지만, 내가 이 소녀를 만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지만 도통 연이 닿지 않아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이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자신만의 소박한 삶과 행복을 만들어나간다는 소녀의 존재는 내 가슴속에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소녀는, 기대 이상이었다.


비록 어린 소녀를 만나기에 앞서 조금 성숙해진, 소녀와 숙녀의 경계에 선 모습을 마주하게 됐지만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소녀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지, 또 앞으로의 모습은 어떨지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 올랐을 정도로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친구들과 힘을 모아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는 즐거움,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아가며 아이들을 가르쳐나가는 자부심, 소소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알알의 행복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채로운 색색의 세상을 선물해주는 자연과 함께 시간의 흐름을 시간 속에 흘려보내지 않고 뚜렷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부러움 그 자체였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살고 있는 에이번리로 달려가고 싶은 욕심, 그녀와 마주하고 앉아 따뜻하고 달달한 홍차와 마릴라가 만든 자두 절임을 먹으며 마음껏 수다를 떨고 싶은 욕심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부추기는 통에 꾹 참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앤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에이번리의 주민들 또한 얼마나 멋있는 이들인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꼭 안아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면모를 하나 이상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과 이야기를 잠시 엿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없이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상상 속의 사탕으로 덧셈을 배울 때 양손의 사탕을 합치면 몇 개냐는 질문에 "한 입 가득요."라고 답하는 앤의 제자와 친구의 이름에 대해 여왕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며 이름은 그 사람에 따라 멋질 수도 추해질 수도 있다고 말하는 다이애나, 이상과 실수, 그리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조언을 앤에게 해주는 앨런 부인, 세상 그 어떤 이보다도 생동감 있는 모습을 하고 로맨스와 현실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라벤더는 앤과 함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앤과 그녀의 이웃들은 당시에는 다시는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한없이 우울하고 슬픈 일이 생기기도 했다. 마릴라의 지적처럼 이 상상력 좋은 소녀는 한없이 높이 떠오르다가 한순간에 쿵, 하고 떨어지는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서로의 장점은 물론 단점도 훤히 보며 고개를 내젓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다.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래. 이게 삶이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꼭 지적해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여러 사정에 의해 앤과 마릴라와 함께 살게 된 귀여운 쌍둥이 남매에 대한 부분으로, 얌전하고 성실한 도라보다 도라를 괴롭혀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말썽을 부려 모두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데이비를 더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은 보고 있는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에 따른 거라지만, 어쩜 이 사랑스러운 꼬마 숙녀에 대한 애정을 저울질할 수 있는지. 까다로운 사람일수록 그에 맞춰주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일수록 눈과 손이 더 가게 된다는 사실이 괜히 서글프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 책 속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에게 도라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퍼붓듯이 얘기해주고, 도라를 꼭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 모든 행복과 슬픔, 장점과 단점이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것이 바로 에이번리의 앤과 주민들이었다. 가슴 깊이 새겨두고 싶은 문장도, 닮고 싶은 모습도 가득 기록할 수 있어 얼마나 좋았던지.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행복을 느끼고 또 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책을 덮는 순간 이 책의 전작과 후속작을 찾아봤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


이미 수많은 친구들이 있겠지만 진심 가득 담아 말하고 싶은 기분이다. 나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정말이지, 다음 만남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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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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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머니'라는 호칭을 들으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누구든 따뜻하게 품어줄 인자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고집스럽고 억척스러우며 옛 것을 강요하는 매정한 모습이다. 대개의 경우 전자를 떠올리곤 하지만, 후자의 경우도 심심치 않다.


하지만 여기,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보적인 이미지의 할머니가 있다. '아직' 아흔 살이라며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스스로의 삶을 즐기는 그녀. 내 할머니였다면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당장에 기가 죽었을, 어쩌면 내 성격마저 180도로 바꿔놓았을지 모를 모모요다.


소설과 에세이 등 여러 글을 쓰는 작가 무레 요코가 자신의 할머니에 대해 쓴 책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책은 모모요의 생(?)과 특징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로 시작된다. 목차 쪽을 뛰어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프롤로그로, 손녀의 눈으로 본 할머니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솔직함'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초긍정의 의미. 이 부분을 읽는 것만으로도 작가가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프롤로그 가장 하단에 적혀져 있는 대로, 아흔 살의 그녀는 '나 홀로 도쿄 여행'을 감행한다. 함께 살고 있는 아들 며느리는 그대로 두고, 혼자 여섯 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딸과 손녀가 있는 도쿄로 올라온다.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아흔 살이 내가 아는 그 나이가 아닌가...?' 하고,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비웃듯 그녀는 누구보다 정정하게, 아니 활기차게 도쿄를 누빈다. 다른 노인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젊은 사람도 따라가지 못할 체력과 열기로 도쿄를 차근차근 정복해간다.


그녀는 혼자 생각하고 정리한 '하고 싶은 일' 목록에 따라 홀로 호텔에서 머물고, 우에노공원에 가서 판다를 본다. 노인들이 좋아할 만한 여행지를 권하는 관광안내소 직원에게 "그런 것 봐서 뭐하게. 빨리 도쿄 돔이나 찾아줘요."라며 본인이 보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말한다. 도쿄 돔이 보고 싶은 이유도 그녀가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할머니, 그것도 얌전하고 예의 바르기로 알려진 '일본인 할머니'에 대한 이미지를 그녀는 산산조각 내서 자근자근 밟아버린다. 어떠한 고정관념 혹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슨 할머니가 그래요?"라고 말한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내 맘이야!"라고 소리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도쿄행이 끝난 이후에도, 아니 그녀가 살아오고 또 살고 있는 모습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선물에 관한 것. 누군가 대가 없이 건네는 선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당당함과 솔직함이 참 마음에 들었다. 가슴이 태평양 보다 넓은 현자 같은 미래를 그리던 내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모모요 할머니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전반부가 지나고 나면 후반부에는 과거로 훅 돌아가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홀로 아이들을 키워 장남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장으로서 생을 책임지기보다 자신의 취향과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그와 똑같은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재미있다가도 답답하고, 각자의 행복이 있구나 싶다가도 왠지 모르게 억울해진다. 대단하다고 박수치며 감탄하고 싶다가도 당장이라도 그녀의 옆으로 달려가 함께 힘써주고 싶어진다. 손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다른 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더욱 공감 가고 슬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기분을 그녀에게 들키는 순간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거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여기,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모모요 할머니라면 분명. (작가 혹은 편집자의 이야기 순서 배치에 감탄하게 되는 부분이다)


서로 다른 느낌의 전반과 후반, 이 모두를 통틀어 참 매력적인 책이었다. 표지에서 기대했던 아기자기함은 그다지 없지만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솔직하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러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살아왔던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덕분에 퇴근 후, 그리고 출근 전 짧은 독서시간이 참 즐거웠으니, 이름마저 매력적인 그녀를 만나게 해준 무레 요코 작가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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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합니다 - 몸의 감각을 되찾고 천천히 움직이고 필요 없는 것은 내려놓고
히로세 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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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50살이 되었다는 작가의 신작 <이제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합니다>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떠올리고 음미하게 해주는 책이다. 작가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로 첫 발을 내디디며 자신이 그동안 경험하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하나씩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옆에 두고 한없이 까먹고 싶은 초콜릿 같은 즐거움도, 두고두고 곱씹으며 후회하고 안달 낼 것 같은 슬픔도 모두 이유가 있다는 말. 그 말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섬세하고 올곧다. 분명 책 임에도 불구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잔잔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선물해 준다.


이 한 권에 담겨있는 것들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결국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다’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지금까지 무수히 들었던 그 말. 하지만 깊은 눈을 가진 어른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하나씩 세심하게 꺼내놓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가슴에 진심으로 새겨진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나의 하루, 일상, 삶은 어떤지 생각하게 되며, 행복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행복의 주문은 내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루를 만들어가고 일상을 가꾸어가며 삶을 어루만지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기에, 작가가 말하는 모든 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책에 있는 것들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기에 독자는 그것들을 발판 삼아 자신의 것을 찾아가게 된다.


그래도 행복은 조금씩 비슷한 부분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매일 아침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차 한 잔의 시간, 마음을 담아 힘주어 적었기에 하나씩 하나씩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하고 싶은 일 목록, 스스로를 점검하며 반성하는 시간, 깊게 호흡하고 자신의 움직임을 의식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것, 닮고 싶은 롤모델은 갖는 것, 맨발로 걸으며 피부로 느끼는 세상,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들기에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는 식사,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일상의 아름다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고맙다"라는 말.


덕분에 잊고 있었던 행복의 주문을 몇 개 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내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복의 주문도 하나씩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


시린 손끝에 와닿는 따뜻한 온기,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이른 새벽 떠올랐다가 느지막이 모습을 감추는 태양, 파-란 하늘 위로 동동 떠있는 새하얀 뭉게구름, 각양각색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꽃과 풀과 나무,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바람, 몽글몽글 귀여운 고양이와 강아지,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감촉, 벌겋게 익은 얼굴 위로 내려앉는 시원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카멜레온 같은 하늘, 오른손으로 힘주어 쓰는 편지, 새하얀 종이 위로 번지는 상상의 세계, 마음속까지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책, 크게 숨을 들이키며 즐기는 산책,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예쁘고 귀여운 무언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지금까지 무수히 겪었고 앞으로도 무수히 겪을 첫 경험, 혼자 느릿느릿 나만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시간과 소중한 이들과 함께 발맞추어 걷는 시간, 엇박자에 분개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


그 외에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수많은 것들을 떠올리며 나를 위한 행복의 주문은 결국 내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곁에 두고 한 장씩 넘겨보고 싶은 책,이라는 주문도 함께.
글 중간중간 담겨 있는 사진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가슴 깊이 들어오는 책 <이제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합니다>. 좋은 책을 만나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됐으니,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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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팬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6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정지현 옮김, 김민지 그림 / 인디고(글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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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을 되짚어 보면 자그마한 키에 동글동글한 눈과 얼굴, 초록색 나뭇잎 옷을 입고 통통 튀어다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창문을 타고 들어와 새침한 숙녀처럼 구는 귀여운 소녀에게 손을 내밀고, 맞닿은 온기를 꼭 쥐고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아 환상의 세계 네버랜드로 떠나는 뒷모습까지, 점차 또렷해지는 기억 속에 정체 모를 그리움이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찰나의 꿈이었는지 아니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던 기억인지 모를 소년과의 추억.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피터 팬>은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낯설고 섬뜩한 느낌이었다.


기억 속의 소년은 늘 당당하고 늠름하면서, 장난끼 넘치고 재치있는 모습이었다. 꿈과 희망의 세계인 네버랜드에서 제멋대로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요정과, 길 잃은 아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넘치는 매력으로 끌어당기고 포용하는, 희망의 수호신 같은 소년. 호시탐탐 아이의 자유를 억압하려 드는 해적들을 상대로 멋진 꾀를 부려 승리하고, 아이들의 바람을 위해 집까지 인도해주는 꼬마신사같은 모습.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희미해져가던 기억이 강렬하게 떠오르는 탓에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을 안고 책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착각이라는 것을, 추억이란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소년이었지만, 소년이 아니었다.


다시 만난 피터 팬은 제멋대로에 단순하고 얄미우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나아갈 줄 모르고, 다른 친구들 역시 그 안에 가둬놓으려고 하는 그런 아이. 그 어떤 현실도 마주하려 하지 않은채 상상 속으로 도망치고, 끝끝내 영원한 아이로 남아 "걔는 나한테 뭔가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대. 그런데 내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대."라고 말하는 모습이 미화된 기억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이 아이의 불행은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어쩌면 내가 어른이 되어서 그런걸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며 처음에 느꼈던 재회의 기쁨을 혼란으로 바꿔버렸다.


게다가 피터 팬과 그와 함께한 아이들이 쥐고 있는 것은 기억 속 나무로 만든 뭉툭한 목검이 아닌, 날이 잔뜩선 진짜 칼의 칼자루였다. 아이들은 무서운 해적들 앞에서 지지 않고 칼자루를 휘두르며 그들을 베어넘겼다. 아이들과 해적과 인디언이 서로 죽고 죽이는 그 장면은 예쁘게 포장되었던 기억을 북북 찢어버렸다. 그야말로 하얀 도화지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칼자루를 휘두른 것은 해적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무한한 애정 앞에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칼자루를 휘두르며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아이들과의 재회에 기뻐 어쩔줄 모르는 웬디와 존과 마이클의 부모를 보면서도 결코 제 부모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쥔 칼자루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줬다.


표지 속 피터 팬의 묘한 표정이 후크선장을 죽이러 가며 "이번에는 후크와 나, 둘 중 한 명은 죽는다."고 맹세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피터 팬은 그만큼 섬뜩하고 무서웠다. 해적들을 찔러 죽이고, 웬디네 가족과 함께 살며 어른이 되는 아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 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랜만의 만남이 반갑고 즐거웠지만,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나의 피터 팬은 이러지 않았어, 라며 누구에게든 따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게 진짜 이야기였고,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어린 내 눈에 보였던 피터를 만날 수 없겠지. 책을 덮으며 든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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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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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곧 내용, 흔히들 줄임말로 제곧내라고 표현하는 책들이 있다. 잘 지은 제목 하나가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인데, 이번에 읽은 책이 딱 이 범위 안에 들어갔다.

 

보는 순간 내 이야기인 것 같은 착각 아닌 착각에 빠지게 하는 책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는 끝에 느낌표가 찍힌 단호함까지 완벽하게 제목이 책 자체를 표현한다. 1365일 홀로 미식을 즐기는 남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인기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로 유명한 저자가 참을 수 없는 식욕으로 쓴 이야기라니. 표지의 제목과 그림, 지은이의 배경,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완벽하게 제목에 충실한 책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각 목차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세워놓고, 그에 대해 본능에 충실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준다. 라면, 돈가스, 샌드위치, , 메밀국수, 튀김덮밥 등 듣는 순간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음식들을 내세운 것으로 모자라 보는 사람까지 그 음식을 먹고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급기야 나중에는 당장이라는 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이 본능적이고 생생한 있는 이야기는 읽다 보면 어느새 속도감이 붙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후루룩후루룩 면을 들이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먹는 즐거움에 푹 빠진 사람답게 각 음식에 대한 자신만의 음식 철학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객관성은 필요 없으며, 오로지 저자 자신의 본능과 경험이 그를 뒷받침한다. 그 안에는 오니기리의 속은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쪽에서 먹든 균형이 맞도록 밥 정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것, 여행지에서 먹는 아침 죽의 대단함, 비싸고 호화로운 샌드위치에 대한 불만처럼 읽는 순간 그렇지!’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만드는 것들도 있고, 나폴리탄, 중화냉면, 고양이 맘마, 오차즈케처럼 아직 나만의 경험치가 없어 그래? 한 번 먹어보고 싶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아주 가끔은, 괜한 반발심이 들고 뭘 모르네!’하고 소리치고 싶은 것들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음식은 먹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각각 다른 철학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그것에 대해 떠들어대는 즐거움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먹는 즐거움도, 먹는 이야기를 하는 즐거움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처음엔 세상 이치를 말하는 것처럼 단호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뭐야 이거?’ 싶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푹 빠져 공감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반박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얼마나 생생하게 들려주는지 각 장을 넘길 때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먹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힘들기도 했다. “식욕 자극 에세이라더니, 정말 제목이 내용 그 자체였다.

덕분에 오늘도 뭘 먹을까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으니, 참 보람차고(?) 즐거운 하루가 아닐까 싶다. 식탐 아재처럼 섬세한 입맛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나만의 먹방을 찍으며 나만의 철학을 쌓으러 앞으로도 쭉 열심히 먹어야지. 그리고 친구를 만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서로의 철학을 나눠야겠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행복감에 젖어드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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