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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누군가 내게 과거의 기억들을 기록하라고 하면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뻔 하디 뻔한 일기 형식? 내 감정을 극대화해 문제를 크게 느껴지도록 한 소설 형식? 그때의 생각과 감정을 지금의 것과 비교하며 풀어나가는 에세이 형식? 무엇이 됐든 이 책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면 보고서>는 폴 오스터가 자신의 기억과 추억을 기록한 에세이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부터 부딪치며 방황했던 시간을 지나 작가가 되어 살아가는 삶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들이 이 안에서 펼쳐진다. 작품 전체에서는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문장들이 돋보이며, 감정과 생각과 경험이 풍부하게 녹아든 내용들이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읽는 이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가진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이 평에 대한 근거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이렇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가는 자신을 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당신이라고 부르며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독자들이 자신을 함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정중함을 갖추어 대하도록 한다. 게다가 글 전체에서도 맴도는 긴장감도 한 몫 한다. 예민함을 넘어 금방이라도 빵, 하고 터져버릴 듯 팽창한 분위기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역시 독자가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저지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요소이다.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마력이 그 안에 있다.

 

읽는 이를 절로 감탄하게 만드는 그의 능력도 근거 중에 하나이다. 이 내밀한 기록은 읽는 내내 작가의 뛰어난 기억력에 감탄하게 만든다. 또한 그 묘사력, 세밀함 같은 능력들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당시의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난 오늘날 과거를 되짚어 보며 하게 된 것인지 모를 생각과 감정들이 주는 긴장감은 또 어떠한가. 모호하고 알 수 없기 때문에 한 순간에 매료되고 만다.

 

굉장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말이라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내 솔직한 감상이다. 내가 읽는 작가의 작품들 중 단연 최고였고,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이 감상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다. 그러니 작가의 팬이라면, 아니 작가의 팬이 아니더라도 책을 좋아하는 누구나 이 책을 읽어보라고 꼭 권해주고 싶다. 좀 유치한 표현일 수 있지만,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한 번 매료되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글이었다.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자세히 얘기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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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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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한 것과 무례한 것은 한 끗 차이이다. 솔직함이 매력이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당신이 그 한 끗을 넘어버리는 순간 허울 좋은 핑계라며 손가락질하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한 순간의 실수가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고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다는 말은 솔직히 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번 책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읽기 전부터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솔직한 것도 아니라 격하게 솔직하다니.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왠지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건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어서 살짝 지지치고 말았다.

 

그 선을 넘었나 안 넘었나를 구분하는 것은 개인차가 있는게 당연하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관점을 말하는 건데, 내 눈에는 굉장히 위험천만한 외줄타기처럼 보였다. 먼저 선 바깥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이렇다. 초반부터 등장하는 뚱뚱하거나 못생긴 여자의 이야기는 불쾌했으며, 영화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했다.”거나 누추하고 촌스러운 감자 같은 남자라는 문장과 중후반쯤에서 만나는 토실토실 살찐 아기 돼지 같은 어머니라는 묘사, “기가 세고 재능 있고 못생기고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한 여자는 이렇게 훌륭한 거군.”이라는 작가의 생각은 읽는 순간 이거 좀 아슬아슬하지 않아?’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그저 읽는 것뿐임에도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숨을 들이키게 되었다. 지금까지 솔직함을 낯설어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한다면 나도 수긍하는 편이지만 그런 생각보다 당황스러운 기분이 더 컸다. 물론 맥락을 통해 그 말을 하는 의도는 확실히 알 수 있으니 단지 여기에 적는 문장만으로 판단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반면 선 안은 제법 매력적이었다. 자신에게 맞는 음악의 리듬이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나 불쌍하다는 주변사람들의 말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당사자를 불쌍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부분 등은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나도 변명 따위 집어치워!’라고 스스로를 억제하기보다 저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 영어는 세탁소 주인과 싸울 때는 완벽했다.”라거나 커피 값을 절대로 내지 않는 남자가 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서 잘 마셨습니다.“하는 거다. (생략) 그것은 이미 예술이다.”라는 문장들은 나를 웃게 만들었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피식 웃음이 나오니 그 안의 내용은 상상이 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솔직함이 유쾌함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즐거운 기분으로 맛보았다.

 

아슬아슬함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고, 다 읽었을 때는 조금 지치고 말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책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싶다. 게다가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38년생의 어른이었다는 것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연스럽게 작가의 다른 작품이 효과라니. 과연 작가의 다른 책은 그 선을 어떻게 넘나들고 있을지 상상하며 다음에 읽을 책은 이 작가의 것으로 결정했다. 

 

 

 

 

 

 

 

*알라딘 공식 신간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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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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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질문 앞에서 고민하고 각자 자신들만의 주장을 펼쳤다. 현재에 와서는 적당히 타협하고 둘 다라고 이야기하는게 일반적인 편이지만 정확히 50:50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지인 중 한 사람은 나쁜 일이 있거나 외모나 습관 등에 대해 지적을 당할 때면 유전자를 탓하곤 하는데 정말 가끔가다가 이렇게 자란걸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경우 엄마(혹은 아빠) 닮아서요.” 라는 말을 할 때가 종종 있고,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타고난 성격적 소심함을 깨닫는 경험을 했지만 사람이 자란 환경과 교육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입장이 더 강하다. 결국 사람들마다 각각 어디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둘 다라는 같은 주장도 미묘하게 달라진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볼 때 <내 심장을 향해 쏴라>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각자의 견해를 흔들면서 무엇이 게리 길모어라는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무엇을 더 중점으로 두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의문을 던진다.

 

이른바 묻지 마 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평범한 사람 둘을 총으로 쏴 죽이고 스스로는 사형을 고집해 끝내 1977년 미국에 사형제도를 부활시키며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린 게리 길모어. 그가 일으킨 그 거대한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그를 경멸하거나 존경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에 처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취재하고 풀어낸 노먼 메일러의 <사형집행인의 노래>가 출간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접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찾아본 바로는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탓에, 그리고 그 사건이 한국에는 그리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정보가 부족한 탓에 정확한 반응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후 마침내 게리 길모어의 친동생 마이클 길모어가 혈통이라는 뿌리부터 시작해 자기 형제들에 으르기까지를 끈질기게 추적해 한 가족,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내 심장을 향해 쏴라>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의문과 마주하게 되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무엇보다 책의 뒤표지에 적형 있는 누가 이 남자를 이토록 끔찍한 괴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옮긴이의 후기까지 합쳐 정확히 703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기에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저 단편적으로나마 말하자면 게리 길모어라는 사람은 살인의 역사를 지닌 모르몬교도의 피를 이어받았고, 폭력과 공포로 점철된 길모어라는 혈통을 온 몸으로 생생하게 느꼈으며, 끝내는 그 스스로도 그와 같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마이클 길모어는 이에 대해 파멸의 혈통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면서 영혼과 악몽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 역시 잊지 않는다. 가족 그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아(심지어 책이 끝나고 나서도 독자는 물론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안정을 주지 못했으면서 끊임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가족을 화풀이 대상으로, 제멋대로 굴 수 있는 대상으로 본 아버지 프랭크 길모어와 남편의 폭력에도 떠나지 않고 그 옆을 지키면서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끔찍한 경험을 하게 만든, 그러면서도 자신은 정상적인(이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정을 주지 못한 베시 길모어에 대한 이야기는 그와 형제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를 알려준다.

 

책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는 단숨에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끝에 도달해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는 없다. 혈통과 환경에 대한 언급을 읽을 때 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 의문 앞에서 나는 같은 가정 속에서 거의 같은 것을 겪으며 자라온 길모어가의 장남 프랭크2세와는 무엇이 달랐기에 한 사람만이 살인자가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했으며, 방식은 다르지만 스스로를 괴롭히고 망치는 길을 향했던 그들 부모와 형제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끝을 보지 못했고 지금 나의 솔직한 입장으로는, 모르겠다.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던 것처럼 환경에 더 중심을 두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게리 길모어와 그의 가족, 지인들이 겪은 불행을 환경으로 치부할 수 가 없다. 프랭크가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됐잖아, 라고 말하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고 또 생각했다. ‘혈통의 문제로 보기에는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되는 언급이 불편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 모두 절망으로 밀어뜨리는 방식은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닮아 혈통도 환경도 모두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무엇이 더 중심이 된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는 류의 것이었다.

 

사람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침묵하고 만다. 어떤 답을 하던 나는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반발과 혼란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건 게리 길모어와 프랭크 길모어,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내게서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책의 가치로만 보았을 때, 굉장히 훌륭한 책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을 추천할만한 대상은 도저히 떠올릴 수 가 없다. 인간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사형을 포함한 여러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의문을 가지고 싶은 사람? 잘 모르겠다. 내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웬만한 영화보다 더욱 흥미진진하다는 것, 그러나 가볍게 보고 넘길 수 있는 액션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이다. 이미 책 두께에서부터 망설여질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한 번 더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한 사람, 한 가문, 그리고 한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스스로 생각하고 겪어보기 전에는 모를 테니까. 그만큼 압도적이고 생생하며 거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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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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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 책을 읽더라도, 영화나 그림을 감상하더라도, 사람을 만나더라도, 대화를 하더라도, 하다못해 길에 서있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건물 한 채를 보더라도 딱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예를 들자면 경복궁에 나들이를 가더라도 경복궁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경복궁은 그저 옛날에 지은 오래된 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사실을 경험을 통해 수없이 많이 깨닫고 되새기면서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인지하고 솔직해지게 됐다. 그래야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우고 또 알 수 있게 된다는 것 역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솔직하게 이 책이 무척이나 어려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보는 동안 이러한 생각,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작가의 여정은 그 누군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함께하기에는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한 인물에 대한 전기가 아니기에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정보와 한 번 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장소의 만남은 서로를 보완하기보다 오히려 흐트러트렸다. 번번이 글의 흐름을 놓쳤고 장면 장면이 뚝뚝 끊어졌다. 특히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서의 이야기는 나를 체념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건 종이요 검은건 글씨니, 나는 일단 글을 읽고 있긴 하구나, 하는 상태가 된 나는 이 책을 일단 덮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린 나는 책갈피도 빼버린채 책을 덮어버린 후 일단 짧게나마 각각의 인물에 대해 찾아보았다. 무엇을 했고, 무엇이 유명해졌는지에 대해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알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책을 펼쳐들었다. 그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아예 처음 보는 책처럼 신기하면서도 마음이 끌리는 부분이 잔뜩 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문장을 옮기기도 하면서 두 번째 독서를 이어나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여느 여행 에세이들을 볼 때면 으레 그런 것처럼 나도 그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욕구도 가지게 되었고, 그 장소를 머리로라도 방문하고자 노력해 보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어릴 적부터 달이 궁금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망원경으로는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선배의 이야기도, 물을 무서워하는 강아지에게 괜한 두려움이라는걸 인식시키는 훈련을 하는 밀다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아 내가 이 책에 애정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아는 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그만큼 여유가 생긴 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보지 못한 것이 본 것 보다 더 많다. 그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푸시킨의 시를 곱씹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탐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박과 고흐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아는 사람의 자취를 따라가는 정도로는 아직 한참 멀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세 번째 독서를 시도하면 나는 또 어떤 것을 볼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다.

 

이 책은 다른 책들보다도 더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읽는 이에 따라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다를 거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읽으라고, 재미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저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자신이 볼 수 있는 하늘을 넓히기 위해 끝없이 우물 안에서 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옆에 두기를 추천하고 싶을 뿐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확실히 하고 그에 대해 솔직해지기만 한다면 이 책은 매 순간 다른 매력을 뿜어내며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사람을 나아가게 만드는 책이 얼마나 값진것인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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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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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나는 이 책에 대해 말할 자신이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그것은 나의 멍청함과 부족함을 떠벌리는 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역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부재가 이토록 무겁고 강렬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사실이 나를 짓눌렀고, 나는 몇 번이고 이 책을 덮을까 고민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들이 반복되고 그에 대한 생각, 마음, 기억들이 끊임없이 뒤바뀌며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무질서하게 제 존재를 드러냈지만 나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그 속에 가득했지만 온전히 받아낼 수 가 없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소련의 몰락이었다. 그걸 인정했을 때의 실망감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컨드 핸드 타임>은 한 나라와 사상과 체제의 몰락이라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명료한 사실 속에 상상도 못할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음을 이야기한다. 자유와 승리, 해방이라는 빛나는 단어들 밑에 숨겨져 있던 누군가의 절망도, 우리와 국가, 동지라는 든든한 단어들 밑에 숨겨져 있던 누군가의 절규도 모두 더하거나 빼지 않고 담아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빛나는 단어들을 두 손 가득 담아 치켜세운 채 미소 짓는 이들의 이야기도, 든든한 단어들을 온몸에 새겨 넣은 채 가슴을 활짝 핀 이들의 이야기도 책 안에 가득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국가), 같은 이념 속에서 살다가 같은 변화를 맞이한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다르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니, 믿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더 놀라울 지경이다. 이 책 앞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지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자유변화를 보는 관점. 책임이 뒤따른다, 정도가 있다 등의 전제가 붙긴 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보는 시각은 긍정적을 넘어 우호적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이를 침해하는 것은 악 그 자체로 본다. 하지만 자유를 비판하고 거부하고 경멸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을 무지하고 가엾은 이로 치부하지만 그들에겐 그들만의 지식과 이해와 신념과 경험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읽기도 전에 겁부터 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대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세컨드 핸드 타임>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는 읽는 사람에 따라, 또 시기에 따라 다른 것을 보여준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깨닫고 얻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리고 또 다시 읽었을 때 내가 알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를 것이다. 지금의 깨달음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더 큰 무언가를 얻을 수 도 있을 것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언제 어느 때고 이 책을 읽기를, 나처럼 스스로에게 실망하더라도 이 책을 덮지 말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읽고 또 읽기를 당부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주는 책이야 말로 정말 좋은 책이라는걸 나는 이 책을 앞세워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책과 친하지 않은 사람마저도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여러 가지 것들과 더불어 독서의 즐거움까지 깨닫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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